2016년 스웨덴 예테보리영화제에 참석해서 <설행_ 눈길을 걷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한 여성 관객이 영화를 감명 깊게 잘 봤으며 자신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떠오른다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나는 질문한 관객에게, 마르케스를 말하는 거냐고,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기에 나는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정말 좋아하는데 연관성은 잘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은 설행을 보면서 마술적 리얼리즘과 남미문화에 나타난 영적인 연결에 대해 강하게 연관성을 느꼈다고 얘기해줬다. 그 이후로 나 역시 곰곰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영화의 방향은 그런 것인가 하고.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꿈, 기억, 판타지
돌이켜보면 나는 꿈이나 현실에 갑자기 나타난 판타지를 언제나 좋아해 왔다. 얼마 전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내가 폴란드 우쯔국립영화학교 재학시절 만든 단편영화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실기수업이라 단편영화의 예로 보여준 것인데 다시 본 나의 첫 번째 단편 극영화에서 나는 그 단초를 보았다. <아버지의 초상>은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는 하루에 대한 영화로 아버지가 화장실 변기뚜껑위에 앉아 결혼식 하루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하루를 회상한다고 하지만 회상이라는 것은 어차피 주관적이라 그것은 아버지가 기억하는 하루인 것이다. 딸을 떠나보내야 하지만 보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이 주된 정서로 드러나는 영화이다 보니 결혼식을 즐기는 대다수에서 떨어져 나와 고립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첫 장면으로 드러난다. 그 마음을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듯 회상하는 형식을 빌려 표현 한 것이다.
-열세살, 수아
그런 판타지의 전조는 나의 첫 번째 장편영화 <열세살, 수아>에 더 잘 나타나있다. 수아(이세영 분)는 열세 살로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이다. 2년 전, 아버지가 죽자 식당을 하는 엄마(추상미 분)와 둘이 살고 있다. 그런데 수아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자신의 친 엄마가 유명한 가수 윤설영(김윤아 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중간, 중간 수아에게 말을 건네는 윤설영이 나오거나 수아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윤설영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사춘기소녀가 현실을 잊고자 만든 판타지로 친엄마는 사실 자신의 곁에 있는 구질구질한 식당 아줌마가 아니라 유명한 가수일거라는 환상이다. 그 환상이 사춘기에 아버지를 잃은 수아가 현실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된다.
-설행에서의 연결
<설행_ 눈길을 걷다>로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 스웨덴의 관객이 마술적 리얼리즘 그리고 남미문화에 나타난 영적인 연결이라고 느끼게 한 요소는 뭐였을까? 설행은 알코올중독자인 남자 정우(김태훈 분)의 이야기이다. 그는 알코올중독이 심해져서 수녀들이 하는 요양원에 쉬러 들어온다. 그곳에서 정우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치는데 그 과거를 인정해야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먼저 알코올중독의 증상에 대해 얘기하고 가야 하는데 이 증상이 전체 영화를 이해하기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술을 안마시게 될 경우 생기는 증상이 금단증상의 종류인 섬망증상이다. 섬망증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경계가 흐릿해지며 환각, 환청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영화 내내 정우는 환상을 보게 되고 환청을 듣게 된다. 단주하고 삼일에서 일주일 정도가 최대 고비인데 이 시기에는 알코올전문병원에서도 보호자나 간병인을 24시간 환자에게 붙여놓는 게 원칙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환자들은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설행은 결국 정우가 이 시기를 극복하고 깨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만나게 되는 마리아수녀(박소담 분)와의 영적인 연결이 또 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이다. 이 연결을 위해서 보여 지는 장면이 두 개 있다.
장면 하나,
마리아수녀는 정우의 숙소에 걸려있는 폴란드의 검은 마리아 성화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준다.
마리아 아! 차르나 마트코 보스카예요.
정우 뭐라구요?
마리아 (웃으며) 폴란드 말인데 검은 성모라는 뜻이죠. 기적을 일으키는 성화예요. 진품은 폴란드 쳉스토호바에 있대요.
정우, 성모의 얼굴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정우 근데 얼굴에 상처가?
마리아 아, 그건 사연이 있어요. 폴란드가 적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적군이 떼어 가려고 갖은 수단을 썼지만 뗄 수가 없었대요. 그래서 화가 난 군인이 창으로 성모얼굴에 상처를 냈는데 그 곳에서 피가 흘러 나왔대요. 믿기 어려운 얘기죠. 그 이후로 많은 미술 복원가들이 성모의 뺨에 난 상처에 덧칠을 했지만 매번 상처는 다시 나타났다네요. 지금도 검은 성모에게 저마다의 기적을 간청하러 쳉스토호바에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들었어요.
마리아의 말을 홀린 듯이 듣고 있는 정우.
마리아의 대사에 나온 것처럼 검은 성모 얼굴에 나타난 상처는 덧칠해도 계속 나타난다. 모든 상처가 계속 모습을 드러내듯이 정우의 상처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눈밭에 누워있던 마리아의 뺨에 검은 성모와 같은 상처가 그려지게 된다.
장면 둘,
마리아는 정우가 운전하는 차에 타서 유리창에 점을 이어 보인다.
마리아, 옆 창에 입김을 분 다음 손가락으로 점을 찍어 보인다.
마리아 그거 아세요? 우린 각자 점처럼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그 점들을 성모님께서 연결해주세요, 이렇게.
점을 손가락으로 연결해서 선을 만든다.
마리아 나랑 원장수녀님도 연결해주시고, 또 원장수녀님과 아저씨도 연결해주시고 그리고 또 나랑 아저씨도 연결해 주시고...
난 그렇게 느껴요. 영혼이 연결되는 거, 그 연결됨을 느낄 때 아름답거든요.
요양원을 떠나 봉쇄수녀원으로 가면서 마리아는 정우에게 노트 하나를 남기고 간다. 그 노트에는 마리아가 그린 점이 선으로 연결된 그림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모두의 손이 따뜻하기를...
이 시나리오집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은 <설행_ 눈길을 걷다>의 시나리오는 이런 판타지의 요소와 함께 슬픔의 정서가 깊게 배어있음을 느끼게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나의 전작에 나오는 주요 모티브는 여기서도 유효하다. 그리고 연민이 있다. 정우의 엄마 세실리아의 수녀원 동기인 테레사 수녀는 정우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원장수녀 이 날, 무척 추웠어요. 봄이었는데도... 세실리아가 이 사진 찍을 때 내 손을 잡았는데 손이 너무 차가웠던 기억이 나요. 그 후로 살면서 세실리아가 아직도 손이 차려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디에 살던 손이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성모님께 기도드렸죠...
이런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시기 모두의 손이 따뜻하기를 빌어본다. - 저자서문
2003년도 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남동생과 이런 대화를 했다. 서른이 넘은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삐뚤어지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농담을 하면서도 나는 내내 아이의 마음에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열세살, 수아> 라고 아버지 제삿날마다 우린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가 내 영화를 보시고 돌아가셨으면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 안타깝게도 우리 아버진 나의 데뷔작을 보실 수 없으셨을 거라는 그런 아이러니한 이야기. 그래서 내게는 데뷔작이면서도 가장 나의 이야기 같은 영화이다. 지금까지 네 편의 장편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골고루 네 편의 영화에 애착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데뷔작은 데뷔작인지라 가장 마음이 가고 지금까지 가장 시간을 오래 나누는 영화가 <열세살, 수아>이다.
이 시나리오는 2005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썼다. 칸영화제가 지원하는 신인감독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서 5개월간 집과 일체의 경비를 지원받아 쓴 운이 좋은 시나리오이다. 당시에 칸영화제 웹사이트에 소개하기 위해 쓴 <열세살, 수아>의 짧은 소개 글을 읽은 레지던스에 함께 선정된 영국감독 마크는 선정된 프로젝트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쉽고 납득이 가는 이야기라고 칭찬을 해줬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남아있는 엄마에게 반항하는 딸은 세상 어디에든 있는 법이다. 그래서 자신의 엄마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며 서울로 가출하는 십대 여자아이 이야기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좋은 이야기였다.
2006년 한국에 돌아와서 제작사를 찾던 중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제작사 수필름과 잘 연결되어서 제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세영, 추상미, 최무성 그리고 자우림의 김윤아까지 캐스팅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자우림의 윤아씨는 시나리오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영화음악을 자우림이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먼저 해주었고, <프리지아>라는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자우림은 좋은 음악들로 함께 해주었다.
<열세살, 수아>는 수아의 얼굴이 너무나 중요한 시나리오이다. 수아가 등장하지 않는 씬은 몇 개 되지 않고 온전히 수아와 함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배우의 캐스팅이 너무나 중요했다. 그래서 만난 배우가 이세영이다. 처음에는 너무 예뻐서 수아에 어울리지 않을 거 같아 캐스팅을 꺼려했었다. 그런데 세영이를 만나보니 아역배우의 예쁜 이미지와 다르게 십대의 쑥쓰러워하고 낯을 가리는 아이여서 수아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몇 번의 만남에서 대화를 해볼수록 더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수아에 캐스팅 하게 되었다. 지금도 세영이의 십대 시절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찍고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족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열세살, 수아> 에는 나의 어머니가 땅콩을 주는 아주머니로, 막내동생이 축구부 김코치로 출연을 했다. 출연하지 않은 둘째 동생 가족까지 모두 나에겐 영화를 찍는 원동력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나의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 작업을 믿고 지지해주는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를 읽는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을 꿈꾸는 미래의 작가들에게 <열세살, 수아> 시나리오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이야기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다, 부디 가까운 곳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내기 바란다. -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