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에 있어 문명의 혜택은 축복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삶이 가장 반짝반짝 빛났을 때가 언제였냐고. 그것은 자연과 함께 뛰놀았던 유년의 시간입니다. 그때의 시간처럼 순수의 울림 같은 기쁨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오지, 그곳에는 내 유년의 시간대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돌아와 현상해보니 알 수 없는 빛에 의해 필름 사십 통의 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녀온 외국 사진기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모아이 석상 사진을 찍으면 카메라 고장이 잦고 찍은 필름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신성이 깃든 곳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힘은 그 장소를 지키고 그곳 사람들을 수호합니다. 사십 통의 필름을 잃고, 나머지 필름만으로 이스터섬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빛으로 사라진 내 풍경들이 많이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