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하릴없이, 무람없이, 감히,
때로 운명의 선택이 나를 빗겨 가도. 때로 이유 모를 모멸과 슬픔을 견뎌야 해도. 그래도 이야기가 있어서 괜찮기를 바란다. 이야기가 한때를 밝히기를. 이야기가 생채기 하나 남기기를. 기억 저편으로 밀려가기를. 그래도 괜찮기를. 더 나아지지 않아도 살아가기를. 우습거나 보잘것없거나 그저 그렇거나 시시하거나 나약한 모든 순간마다 그 곁에 있기를. 그림자 같기를. 발자국 같기를.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하릴없이, 무람없이, 감히, 나는 내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이야기이길 바라 마지않는다. 그냥 이야기이기를.
덧없이 함께. 다정하기를.
정확하게 절망하고, 눈부시게 부서진다 하더라도 삶은 삶이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지나가더라도, 찰나의 눈부심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허락하는 다정한 지옥 같은 마음이, 때로는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이 모든 얄팍함과 부서지기 쉬운 결의 속에서도, 누군가는 무언가를 아끼고 세상은 대체로 아름다우며 삶은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끝내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설프지만, 그것이 어렸던 나와 지금의 내가 똑같이 긍정하고 싶은 것이다.
(…)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쉽게 겁을 먹고, 멀리서만 바라보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싸우는 사람들을 오래 동경한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을. 그리고 이 세상이 좀 더 모두에게 관대하기를, 부서지고 깨질 때 누구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기를 소망한다. 별것 아닌 순간에 태어나는 애정이나, 무작정 오래 남는 미련 같은 것들이 무수히 이야기되기를 원한다. 약점투성이의 우리들이 이 먼지와 진흙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기어이 서로를 위해 곁을 내어주는 것. 기꺼이 찰나의 다정함을 발명해 내는 것. 그렇게 살아 나가는 것. 그것을 바란다.
덧없이 함께.
다정하기를.
― 2026년 봄, 김인정
이 책의 이야기들은 결국 여자 이야기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결국 여자 이야기다. 제도와 불합리한 숙명과 혹은 삶 그 자체에 휩쓸려 흔들거리는 여자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람이 살고 죽고 사랑하고 욕망하고 그 갈피마다 두 발 걸려 넘어지는 그런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이 책은 그러한 내 마음 기울임의, 바꿔 말하자면 애정의 산물이다. 바쁜 일상 중에 굳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행간에 발 걸려 넘어지길 즐기기 때문이리라 믿는다.
온몸을 이야기에 부딪히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자주 뒤를 돌아보고, 이야기를 사랑하기에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너그러운 독자에게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