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편소설 『푸른 눈의 무녀』의 창작 과정을 밝히는 창작 방법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작 배경, 모티프, 인물, 서사, 사건 그리고 주제구현을 위한 소설적 장치들의 결합과 해체를 면밀하게 살펴봄으로써 소
설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임을 말하고자 하였다.
인간에게 죽음은 생과 더불어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사건이다. 굳이 실존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생과 죽음은 인간을 늘 경이와 불안에 빠지도록 만드는 두 가지 양태임이 분명하다. 소설 속 죽음은 끊임없이 생의 무게를 확인하게 하고 이후에 대한 두려움을 생래적으로 인지하게 한다.
죽음과 생을 겹쳐보면서 그 경계를 주목하는 작품들을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최종적으로 『푸른 눈의 무녀』를 통해 추적해보고자 했다.
『푸른 눈의 무녀』는 단편소설에 천착하다 더 넓은 길로 나서기 위해 매달린 최초의 장편 소설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배 위에서 노도 돛대도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었
다. 파도가 미는 대로, 때로는 손을 노 삼아 겨우 육지에 도달했다. 제대로 왔는지, 내려도 되는지 자신은 없지만 있는 힘을 다 했노라고 고백한다. 이 작품을 토대로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리라, 다짐해 본다.
글과 동행하는 작가의 길을 걷게 된지 거의 십년이 다 되어 간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또 한참 뒤늦게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그림과 사진을 익히다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글의 씨앗과 만난 결과였다. 열정과 방황은 어쩌면 동일한 것의 다른 현현(顯現)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열병을 앓았고, 때로는 방황을 했다.
첫 창작집을 내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 안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길이 산이기도 했고, 섬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시작해, 남해의 섬을 찾아 나섰다. 해풍을 맞으며 길 위에 섰을 때, 뭐랄까, 노트북을 켜면 모니터 제일 위쪽에서 깜박거리는 커서가 된 기분이었다. 길 위에 선 내가 체험해야 할, 깨달아야 할 것들이 광활한 여백으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한 그 해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훌쩍 떠났다. 내 안의 틈이 더 벌어졌지만 나는 걷는 동안 그것과 대면할 용기가 생겼다. 끊임없이 물었다. 틈의 정체는 무엇일까.
첫 출간한 창작집이 한국도서관협회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전국 도서관에 비치되었다. 작가로서 경험을 넓히기 위해 광주작가회의에 들어갔다. 주로 혼자 글을 쓰고, 혼자 활동하던 내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선배 작가들을 만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의 내밀한 속내에 대해 더 고민할 수 있었다. 역사의 도시 광주에 살면서도, 속앓이만 했지 먼저 나서서 길을 찾으려는 행동은 늘 굼떴다.
그러다 문학인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그 작은 행위가 ‘블랙리스트’란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영향력 있는 작가여서 문화당국의 지원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배제와 차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글은 역사의 칼’이어야 한다는 말을 간혹 듣곤 한다. 글이 역사의 칼이어야 한다는 리얼리즘을 내가 따라가진 않더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냉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자각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과 희생의 역사 현장이 있는 광주를 깊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탑, 금남로, 충장로, 전남도청, 전일빌딩, 5·18 묘역까지.
나는 지난해 촛불이 타올랐던 시간에 틈틈이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역사의 흔적이 스며있는 거리를 다시 걸어보았다. 작가로서 내가 채워야 할 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글을 낳고, 어떤 글로 독자와 만나야 할지를 더 고민해야 했다. 이번 체코와 헝가리 여행 또한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의 연장선이었다.
한때는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남보다 북과 가까웠던 나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던 나라.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했던 두 나라. 설익은 몇 가지 지식만으로도 두 나라는 광주와 비견할 만한 곳이었다.
나는 배낭을 꾸렸다. 방학을 맞아 체코(프라하)와 헝가리(부다페스트)에 머무르면서 광주에서 일상을 보내듯 사십여 일을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곳의 길을 걸으며 내 안의 나,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나, 작가로서의 나와 조우하고 싶었다.
나는 떠났다. 두 도시를 넘나들면서 여행자로서의 자유와 아픔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과거에서 현재를 봤고 지리적으로 떨어진 여행지에서 한국의 정치 변화를 느꼈다. 운 좋게 두 청년을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겪은 조상을 둔 이스라엘 청년 모어와 작년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부다페스트공과대 학생인 데이비드. 모어는 법률가였고 여행 중이었다. 그 나이 때에 누릴 수 있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Ph.D 과정을 밟아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기를 바랐다. 아픔을 겪어낸 두 나라의 청년들. 둘은 상이한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 모두 일상의 ‘틈’을 느끼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럴수록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삶.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장소든 시간의 궤적이 있고 그 궤적은 다양한 이야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아픔보다는 즐거운 추억이 많아야 하지만 대부분 아픈 기억을 오래 품는 듯했다. 강한 사람(국가) 사이에 끼었을 때는 더욱 더. 예민하면 그보다 더욱. 나는 아픈 궤적을 예민하게 체코와 헝가리에서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고 그렇게 했다.
다녀온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 ‘광주in’에 23회에 걸쳐 연재를 했다. 연재한 글을 정리하여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에 담았다. 그리고 여기, 소박한 여행기를 내놓는다.
책을 내놓기까지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다. 그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2018년 5월
이 소설의 시작은 그림 한 장에서부터였다.
잔물결도 파도소리도 갯내음도 없을 듯한 바다. 불안한 군청색 하늘. 달빛에 물든 수면. 수면 위로 떠 있는 조각배. 뱃머리에는 관이 실렸고 그 뒤에는 키 큰 사제(정확히 사제인지, 죽은 자인지, 산 자인지도 모르겠다)가 기도하듯 서 있다. 사제 뒤로 뱃사공이 앉아서 노를 젓는다.
조각배는 미끄러지듯 바위섬으로 흘러간다. 암벽을 병풍처럼 두른 섬은 사이프러스 몇 그루를 품고 있다. 사이프러스 바깥쪽에는 묘혈이 있다. 묘혈은 황금빛으로 환하다. 황금빛은 사이프러스의 음산한 그림자도, 타르처럼 검고 깊은 바다도, 적막과 고독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을 듯한 그림 분위기에도 잔잔한 안식을 선사한다.
이 이미지는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가슴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내 욕망은 이미지를 글로 묘사하라고 했다. 소설 말미에는 조각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사신이 그려지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울리는 황금빛 축제를 예견한다.
마지막을 써놓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글쓰기였다.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메인 스토리를 짜고 리얼리티를 살린 소설이었다.
2013년 여름부터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다. 출판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때가 아닌 듯했다. 내가 거절하거나 거절당했다. 출판 기금 신청에서 매번 떨어졌다. 모 교수는 이 소설을 읽고 며칠 앓았다고 했다. 그만큼 기가 셌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기가 센 ‘이 녀석’은 나만큼이나 방황을 했다. 나는 박사 논문을 통과시켰지만 일상에서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했다. 제주도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완주하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프랑스길(900㎞)과 포르투갈길(700㎞)을 걸었다. 물 공포증이 있던 내가 이집트 다합에서 스쿠버 다이빙 다이브 마스터(DM)를 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죽음의 섬』과 마주했다.
일 년에 고작해야 네 번 정도 비가 온다는 다합에 비바람이 성난 듯 쳤을 때였다. 파도는 해안가 비치의자를 훔쳐갔다. 길거리는 온통 바닷가에 내놓은 소파나 테이블이 차지했다. 그 날은 카페 영업도 다이빙도 쉬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나는 호텔 루프에서 번화가를 내려다보았다. 두 달여 동안 다이빙 훈련으로 지쳐 가는 나와 달리 아치형 해안가는 활기가 돌았다. 어둠을 밝히는 황금빛이 낮 동안 지친 기운들을 쓰다듬으면서 생기를 돋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생각 한 줄기가 내 정수리를 치고 간 것이.
‘아, 소설을 쓰고 싶다, 그것도 장편 소설을…….’
그동안 나는 ‘소설 불감증’을 앓고 있었다.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배낭 하나 짊어지고 그 낯선 곳을 떠돌아다녔던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왔다. 메마른 육지와 달리 풍요로운 바다를 품고 있는 이 머나먼 타국에서 내 민낯과 진솔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를 품기 위해서는 한 녀석을 내보내야 했다. 서운할 것은 없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제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가.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중심을 잡을 거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방황한 만큼 속이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깐.
험난한 길 제대로 가라고 든든한 장비 챙겨준 청어출판사 관계자 분께 감사드린다. 내가 하는 일에 묵묵히 기다려주고 응원해준 가족에게는 늘 미안하다.
2019년 5월 무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