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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윤병언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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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비오스 : 생명정치와 철학>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아감벤의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은 그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모든 서술 양식과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문헌학적 분석이나 패러다임의 경계를 추적하는 계보학적·고고학적 탐색은 사라지고 그가 항상 은밀하게 추구해온 철학의 시적 세계만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가 철학과 시의 조합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도달한 어떤 경지를 자각하면서, 어떻게 보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 자신이 탐구한 세계 모두에 대한 통찰과 이 모든 것에서 비롯되는 감동이 한데 어우러지는 지경에 도달하면서 이 책을 썼으리라는 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섬광처럼 번뜩이는가하면 폐부를 찌르기도 하는 그의 단상들은 그가 추구해온 시적 산문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글쓰기를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는 것이 저자의 우선적인 목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황혼에 접어든 저자가 자신의 생애와 철학을 되돌아보며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빠르고 간략하게 써 내려간 일종의 철학적 유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단상들은 시나 일기의 한 구절처럼 쉽게 읽히면 서도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교훈이나 가르침을 전해준다. 하지만 이 글들은 철학과 앎에 대한 저자의 기본적인 자세와 입장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데 유용한 단서로도 읽을 수 있고, 저자가 주요 저서에 체계화한 철학 이론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들을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키워드나 비유로도 읽을 수 있다.

왕국과 정원

<역자해제 중에서> 아감벤은 우리가 흔히 ‘에덴동산’이나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장소의 원래 의미가 ‘정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가 추적하는 계보학적 경로에 따르면, ‘정원’은 ‘신의 정원’으로 정립되고 미화되는 과정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지상낙원’의 의미를 잃고 ‘천상의 낙원’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개발한 원죄의 교리에서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미화되는 가운데 인간의 퇴화가 시작된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 전에 활동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낙원 밖으로 쫓겨났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부패한 것도, 정원이 저주받은 것도 아니었던 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 교리를 제시한 이후에는 단순히 인간만 죄를 짓기 전의 무고한 인간과 죄를 지어 본성이 부패한 인간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도 “영원히 잃어버린 ‘지상의 낙원’과 머나먼 미래에나 들어갈 ‘천상의 낙원’으로” 양분된다. 원죄가 원칙인 만큼 낙원보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사건이 더 중시되는 상황은 결국 인간의 본성을 결정지은 요소도 최초의 인간이 살던 낙원이 아니라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이라는 부정적인 견해의 체계화로 이어진다. 낙원은 이제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그의 불완전한 삶을 완전히 소진한 후에야 도달하게 될 천상의 공간으로 변한다. 결과적으로 ‘왕국’의 개념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저자의 표현대로 원래 ‘손이 닿는 곳에’ 있던 신의 왕국은 서서히 ‘가까이 온’, ‘다가올 날이 멀지 않은’, 끝내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나라로 변한다. ‘손이 닿는 곳에’ 있던 나라가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나라로 변한 셈이다. 이처럼 먼 미래로 밀려난 신의 왕국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교회다. 물론 저자처럼 패러다임의 계보학적 차원에서 관찰하면 이는 대변이 아니라 대체에 가깝다. “그리스도는 왕국의 도래를 선포했는데 정작 등장한 것은 교회다”라는 한 신학자의 말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황이다. 한편으로는 아퀴나스가 정식화한 본성과 은총의 관계도 사실은 왕국의 이러한 접근 불가능성과 이에 상응하는 교회의 제도적 필요성을 보다 확실하고 논리적인 형태로 정립하는 데 소용된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원죄는 원칙이 아니라 기초로 기능하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본성과 신의 은총은 불가분한 관계로 결속되어 있지만 이 관계를 밑바다에서부터 지탱하는 것은 원죄 개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는 신이 자연적으로 창조한 인간의 원죄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 신의 은총인 반면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신의 은총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를 지어 무산된 것이 신의 은총이다. 결국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은총이 죄로 인해 무산된 뒤 남는 무언가”에 불과하며 은총의 비-자연적이고 신성한 성격은 “은총이 죄의 결과로 증발하는 순간에만” 부각된다. 이러한 논리의 맹점은 내용을 ‘죄’라는 단어 없이 관찰할 때 확연히 노출된다. 인간의 본성은 신의 은총이 사라진 뒤에야 부각되는 무언가에 불과하고 신의 은총은 인간의 본성이 부각될 때 사라지는 - 비로소 필요해지는 - 무언가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원죄 개념이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왕국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은총이 사라져 전적으로 무능해진 인간만이 왕국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고, 왕국을 완성해야 할 은총도 사라져야만 임무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이러한 논리를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기본적으로 ‘원죄’ 교리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이지만, ‘정원’이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지상낙원’으로 남아 있었다면, 그래서 ‘왕국’이 ‘정원’과 유사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는 ‘정원’과 ‘지상 왕국’을 동일한 실체로 파악했던 에리우게나와 단테를 소환한다. 에리우게나는 에덴동산의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의 가히 충격적인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낙원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낙원에서 자연적으로 창조되었을 뿐 낙원에 머문 적이 없고 어떤 시간의 간극도 발생하기 전에 곧장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성서 기자가 마치 낙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는 모든 것은 원죄 후에, 낙원 바깥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비유에 불과한 ‘낙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에리우게나의 ‘낙원’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다.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원죄’ 개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이 낙원 바깥에서,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 바깥에서 일어났다면 인간의 본성은 오염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인간은 낙원에, 즉 스스로의 자연적 본성에 들어간 적이 없거나 처음부터 밖으로 나와 있다.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외출’에 불과하다. 이는 곧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죄’로 인해 부패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스스로의 본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우게나의 ‘지상낙원’은 – 즉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 “인간이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곳임에도 결코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이며, 동시에 신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천상의 낙원도 실제로는 인간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지상낙원에 불과하다. 신학자들이 ‘낙원’을 언급할 때마다 ‘인간의 본성’을 함께 다루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테도 예외는 아니다. 『신곡』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할 뿐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단테는 이렇게 말한다. “보다시피, 세상이 부패한 것은 나쁜 행위 때문이지 그대들 안에서 부패했다고 하는 자연적 본성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단테는 인간이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자력으로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단테가 인간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사실 낙원을 지상낙원이자 인간 본성의 이상적인 실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상낙원이 인간 본성의 비유라는 점을 단테가 에리우게나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테의 입장에서 지상낙원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복의 한 형상이다. 이 지복에 도달하는 일은, 신학자들이 언제나 양분된 형태로만 이해했던 인간 본성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지성’과 ‘사랑’의 통합을 – ‘정원’의 통합을 - 통해서만 가능하다. 단테가 『신곡』의 서두에서 길을 잃었던 어두운 숲과 나중에 들어가게 될 신성한 숲은 동일한 장소다. 『신곡』의 본질적인 의미는 실제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참여의 건축

이 책의 핵심 주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참여의 미학’이다. 거주자의 입장에서 훌륭한 집을 지으려면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제안하는 집이 아니라 거주자 자신의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참여’ 개념은 단순히 전문화, 산업화, 상품화의 기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축 문화를 거부하고 개선하기 위한 대안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성찰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건축 사용자’들을 건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문화적 접근 방식 자체가 건축 미학의 핵심 문제와 직결되는 복합적이고 역사적인 현상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데 카를로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정의하면서 건축 사용자의 관점과 참여를 중시하고 기존의 건축 정책이나 양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는 곧 서양 건축사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이원론, 즉 생활양식과 생활 공간, 사는 방식과 짓는 방식의 분리 현상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성향과 일치한다. 이러한 분리 현상은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단계에서 이질적인 단계를 거쳐 괴리 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근대를 기점으로 인간이 정치적 동물에서 스스로의 삶 자체를 정치화하는 존재로 발전했다는 미셸 푸코의 진단과 일맥상통하는 과정이 서구의 건축 문화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생활 공간을 만드는 일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거주자가 아닌 건축가의 전유물로 변화하는 과정은 삶의 공간이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시장에 편입됨에 따라 건축 문화가 자본 축적과 이윤 창출을 위한 경제 정치의 대상으로 정착되면서 보다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삶의 기반을 마련해야 할 건축 문화가 삶의 터전과는 거리가 먼 경제 도구로 전락하고 인간의 삶과 주거 환경의 관계 자체가 온갖 종류의 상품 가치 외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는 무의미한 관계로 변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해 정치를 대체하고 삶의 터전을 경제 정치의 제물로 삼는 곳에서 건축은 창조적으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가는 행위와 살아가는 공간의 단절을 조장하고 단절 그 상태를 유지하는 기술로 남는다. (중략) 그의 강연 기록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도 바로 건축적 아이디어의 전시나 외형적 실현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내면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간적 맥락을 창조하는 데 쏟아붓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투쟁 정신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가 모든 유형의 양식적 체제를 거부하면서도 아나키즘을 슬로건이나 방법론으로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아나키즘에 내재하는 거부의 힘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나키스트로서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를 실천적 사회주의자로 정의할 수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그의 사회주의적 관점이 정치적 견해로 쉽게 번지지 않고 오히려 건축이라는 한 전문 분야의 특성을 좌우하며 그의 건축적 표현과 참여의 구도 안에 고스란히 녹아든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데 카를로가 건축 사용자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부각되는 인본주의 사상 역시 유사한 색채와 결을 지닌다. 인본주의 역시, 사회주의적인 형태로든 민주주의적인 형태로든, 추상적 체제나 경제적 효과나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실천과 노력에 의한 열매를 통해서만 설득력을 얻고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이 데 카를로가 이끌었던 참여의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데 카를로는 우리에게 구도자이자 시인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그를 기꺼이 건축의 시인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공간의 이상적인 구도를 발견하기 위해 시도한 집요한 탐구와 투쟁, 대화와 ‘참여’의 흔적을 몇 마디 말과 여백, 긴 호흡과 강렬한 인상 그리고 의미의 뒤틀림이 있는 한 편의 시로 쌓아 올리는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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