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고려인 이주 정책은 스탈린의 야심 정책이었다. 연해주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을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하루아침에 기습적으로 생판 들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조선인들은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한 달이 넘는 긴 시간을 달려 뙤약볕 내려쬐는 곳에 부려졌던, 어둡고 야만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의 역사 속에 이런 얼룩진 사건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한인이주 정책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시린다. 그때, 얼마나 많은 고려인들의 영혼이 파괴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인간은 늘 슬픔을 안고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알마타,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등지에서 그들의 삶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생존권마저도 박탈당한 채 죽지 못해 살았지만 또다시 강인하게 일어서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나는 이 사건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기 시작한 소설은 중편 분량으로 한 달 만에 써내려갔다. 어쩌면 나도 어떤 광기에 사로잡혔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어서 그 사막의 나라를 다녀오라고…….
그리고 다시 호흡이 긴 이야기를 써보라고.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진정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거냐고.
내가 만나지 못했던, 모래사막에 붉은 피를 꽃송이처럼 뿌렸던 그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바친다.
왠지 나는 묘지를 찾았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마흔에서 쉰일곱까지 모스크바에 살았는데 그때도 가끔 단스코예 국립묘지를 찾았다. 한국의 묘지와는 달리 모스크바나 베니스, 파리에서의 묘지는 꽃과 나무가 있었고 죽은 자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대지 중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항상 고요했다. 작년 여름 하늘 높은 곳의 정오에, 나는 큰딸과 함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그곳, 베니스의 산-미켈레 섬의 공동묘지에서 붉은 장미 두 송이를 딸아이가 사랑하는 러시아 예술가 앞에 헌화하고 산책했다. 새들은 노래했으나 참으로 적막했고 심연의 깊은 동굴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죽은자들은 말이 없기에-
묘지를 나오자 넘실대는 하얀 파도와 온갖 사람들의 왁자지껄함, 세상의 베니스는 에너지가 충만하고 넘쳐났다. 어느새 우리는 욕망의 시조에 밀려다니고 있었다.
소설을 쓴다고 했을 적, 나의 순수는 오만했었다. 나 자신을 사유한다며…….
그러나 곧 날개를 꺾고 죽어 버렸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알지 못하고 묘지에 안착한 사람처럼 그렇게 모스크바에서 17년을 살면서 마른 가지를 가지고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