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들은 망각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자라버린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집어버리고 만 거짓말, 오랜 사랑에게 버림받았던 어느 밤, 서울역 한복판에서 어렸던 내가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의 손을 놓쳤던 시간, 몹시 배고파 시장 빵집에서 빵을 훔쳤던 일, 나보다 먼저 떠날 줄 몰랐던 동생에게 악담을 늘어놓았던 그런 기억들……. 잊어버리고 싶고 잊어버려도 좋을 만한 기억들은 질기고도 질겼다.
아프게도 기억은 고통, 쓸쓸함 그리고 슬픔 같은 것들만 먹고 자라는 듯하다. 즐거운 기억들도, 행복한 순간들도 수없이 많았을 텐데 그런 기억들은 희미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프고 슬픈 기억들만 선명해졌다. 기억을 뒤져보면 깊은 곳 어딘가에 기뻤던 순간들도 자작하게 깔려있으련만 그런 기억들은 꽁꽁 숨어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슬퍼하지 않는 건, 그런 기억들이 있기에 앞으론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나무에 힘이 있을까? 한 자리에서 길게는 수백 년을 앉아 있었으니 세상의 도쯤은 깨치고도 남을 세월이다. 붙박인 채 수백 년을 살았다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무는 사람들에게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나게 해주고 상처는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나무들 속에서 여러 계절을 살았다.
가끔 나무들이 말한다. 세상은 보기보다 넓다고,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좁쌀보다 작다고, 내게 의지하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의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시작이라고. 그렇게 바람에 실린 나무의 말을 듣다 보면 여럿에게 미안했다.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모든 억울한 영혼들에게 미안하다. 세상은 연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고 우연의 연속이기도 하니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어떤 순간 그들 모두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