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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이름:이장욱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8년, 대한민국 서울

직업: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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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음악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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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두 번 잃는다. 한 번은 에우리디케의 죽음으로, 다른 한 번은 하데스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다가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이 유명한 이야기는 나에게 글 쓰는 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저 첫번째 상실은 글이 시작되는 곳이 아닌가. 어떤 상실과 결핍, 그리고 그리움의 시간이 시작되는 곳.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을 환하고 명백하고 안전한 지상에서 빼내어 어둠 속으로 몰아넣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두번째 죽음은 글이 끝나는 곳일 터이다. 나는 지상으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뒤돌아본다. 하지만 뒤를 따라오던 그것은 아직 어둠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이다. 우매한 나는, 그것을 잃는다. 뒤돌아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내 눈앞에서 처연히 모래처럼 흩어져버린다. 이미 잃었던 사랑을, 인간의 진실을, 세계의 본모습을, 다시 잃는다. 나는 밤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무엇을 쓴 것인가? 희끗 그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본 것은 정말 무엇인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것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다음 글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허망한 기분에 빠지는 건 그 무렵이다. 나는 가만히 중얼거린다. 응, 자신을 믿어볼 수밖에. 기다릴 수밖에. 다시 걸어갈 수밖에. 그 어둠 속으로. 두 번의 상실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번에도 유혹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겠지.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의 얼굴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내 앞에서 사라져가는 그 캄캄한 진실들은 나를 매혹시킬 것이다. 차갑고 냉정한, 밤의 대기 속에서. * 고맙습니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는 빛깔을 갖지 않는다”는 고대의 문장을 떠올립니다. 글쓰기도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빛과 말과 조명 속에서야, 사물도 글도 사랑도 자신의 빛깔과 화사함을 얻습니다. 오늘 이 상은 제게 분에 넘치는 화사한 빛깔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첫 회라니요. 저는 잠시 그 신선한 느낌에 젖어듭니다. 하지만 다시, 빛깔을 갖기 이전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캄캄한 존재로서, 무엇도 아닌 존재로서,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선후배 작가들께, 독자들께, 친구들에게, 자못 명랑한 표정으로 인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세상은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에서 겨우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한 술집 벽면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이라고 했다. 내가 이 문장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한 페이지’에 온 세상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소설 쓰는 일을 저 문장에 빗대어 말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은 책이다. 소설이란 그 책의 어떤 페이지, 어떤 문장에 그은 밑줄일 뿐이다.” 밑줄의 각도와 두께와 빛깔은 나의 것이지만, 그 밑줄이 기억하는 문장은 이 세상의 것이거나, 이 세상 자체일 것이다. *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생각하면 지금도 의문이 든다. 이건 인도에 대한 이야기일까,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일까? 하루오에게는 전 세계가 고향인 것일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이는 전 세계를 타향으로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하루오에게 매혹을 느끼는 나 자신이 의아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또 하루오라고도 생각하였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을 쓸 때는 왠지 예민해서 자꾸 혼자 중얼거렸다. 환하게 불을 켜도 방은 어두웠고 정신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소설에 나오는 바흐의 칸타타를 틀어놓고 주인공들의 결혼식을 상상했는데, 그게 묘한 위안이 되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얀 반 에이크에게도 감사를. 「올드 맨 리버」의 초고는 꽤 오래전 아이오와에 머물면서 썼다. 그때는 최대한 낙관적으로 소설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묵은 글을 꺼내 마무리할 무렵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이 거칠어졌다.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느 소설보다도 오래 걸렸기 때문일까. 이 글을 생각하면 아직도 강을 건너고 있는 기분이 든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기린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기린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기린이야말로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착시였겠지만, 지금도 거리에서 기린을 만나면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정귀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해 써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다. 그는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무한하게 풍부해지는 것만이 정귀보인지도 모른다. 요즘도 혼자 술을 마실 때면 그를 떠올리고는 자못 골똘해지기도 한다. 「칠레의 세계」가 이 세계의 운명에 가장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잊었다. 지금은 그냥, 언젠가는 쿠바를 거쳐 칠레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처음에는 소설집의 제목을 ‘칠레의 세계’로 하려고 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이 없었더라면. 「어느 날 욕실에서」는 몇 해 전에 출간한 시집 『생년월일』에 실려 있는 「늪」이라는 시와 연관이 있다. 늘 그렇듯이 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밤의 욕실에서 낯선 시신 한 구를 만날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제법 ‘그것’과도 친해진 셈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모 문예지에 ‘자전 소설’의 형식으로 게재되었는데, 원래는 장편의 일부로 떠올린 것이다. 언젠가는 긴 소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안드레이는 오래전에 함께 지냈던 기숙사 룸메이트의 실제 이름이지만, 소설 속의 안드레이와는 관계가 없다. 그가 보고 싶다. * 파우스트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많은 수수께끼가 풀리겠지.”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대꾸했다. “아니, 더 많은 수수께끼들이 연달아 나오게 될 거야.” 세상에 밑줄을 긋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저 수수께끼들 앞에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으로 좋았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수수께끼는 푸는 것이 아니라, 겪고 사랑하고 싸워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장을 하나 덧붙여두고 싶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언제나 홀로이면서 모두인 우리에게. “세상은, 책이 아니다. 삶과 사랑 역시 그러하다.” 창문을 열자 무인칭의 바람이 불어온다. 시제도 없고 이상한 마음도 없다. 2015년 봄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에밀 졸라처럼 인간을 동물과 같은 생물학의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을 자연주의라고 부르지만, 시인의 동물원은 자연주의의 숙명적인 동물원이 아니다. 시인의 동물원은 ‘부정성’이 거세된 (코제브나 아즈마 히로키 식의) 은유적 동물원도 아니다. 동물원은 ‘부정성’으로 충만한 채 인간사 속에서 유전하고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통과한다. 인간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이 17세기 동물원의 구조를 모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의 역사가 동물원에서 흘러간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인의 시는 동물원의 시가 아닐 수 없으며 동물원의 시는 인간사의 시를 뒤집고 누비고 돌려 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에세이 「동물원의 시」 중에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에밀 졸라처럼 인간을 동물과 같은 생물학의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을 자연주의라고 부르지만, 시인의 동물원은 자연주의의 숙명적인 동물원이 아니다. 시인의 동물원은 ‘부정성’이 거세된 (코제브나 아즈마 히로키 식의) 은유적 동물원도 아니다. 동물원은 ‘부정성’으로 충만한 채 인간사 속에서 유전하고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통과한다. 인간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이 17세기 동물원의 구조를 모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의 역사가 동물원에서 흘러간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인의 시는 동물원의 시가 아닐 수 없으며 동물원의 시는 인간사의 시를 뒤집고 누비고 돌려 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에세이 「동물원의 시」 중에서

생년월일

1. 이런 밤, 내가 선호하는 것은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늘은 이 세 개의 부사가 나의 이름이었으면 한다. 3. 벽돌을 쌓듯이 쓰는 문장들. 벽돌을 던지듯이 쓰는 문장들. 벽돌을 깨버리듯 쓰는 문장들. 부서진 벽돌을 껴안듯이 쓰는 문장들. 나는 처음 보는 집으로 들어간다. 주위를 둘러본다. 벽이 사라진 텅 빈 세계다. 캄캄한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들. 고개를 든 나에게 가장 가까운 별자리가 있다. 오늘은 그것이 당신이었으면 한다. 2011년 여름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소설들 한 편 한 편을 가만히 떠올린다. 내가 이 소설들을 쓴 것이 아니라 이 소설들이 나를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 한 편이 나를 다른 펜으로, 다른 스타일로, 다른 인물로, 마침내 다른 세계로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쓰이기를 멈추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쓰이는 것이, 또한 이 세계이기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차라리 영원의 말이었다. 물끄러미 자정의 문장을 썼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2016년 6월

우리 모두의 정귀보

흔히 작가는 신(神)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비록 사소하고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홀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완성하는 자니까요. 물론 이 알량한 작가-신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에게 이 신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지배되는 자로 느껴집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계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자이며, 피조물들의 희로애락에 고통받는 자이며, 깊은 밤에 혼자 통음을 하는 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고, 자신을 확신할 수 없으며, 자신이 만든 세계를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존재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인물들을 혐오하고, 냉소하고, 그러면서도 끝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자. 피조물들의 무관심을 견딜 수 없어서 그 피조물들에게 끊임없이 개입하고, 급기야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자,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세계를 짓는 신-작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작가 김유정은 저를 꾸짖을 듯합니다. 그분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으며, 인물들을 ‘만들지’ 않았으며, 원래 그곳에 그렇게 있는 세상인 듯이, 그 세상의 인물들과 더불어 그저 살아가듯이, 소설을 썼기 때문입니다. 창조니 구원이니 하기 이전에 그분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뒹굴며 울고 웃는 작가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분의 세상에는 여전히 「동백꽃」이 피고 「땡볕」이 내리쬐고 「소낙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웃음과 눈물 속에서 흘러가는 「봄, 봄」의 하루처럼 말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는 것은 저에게 기쁘고 무거운 사건입니다. 무겁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저의 약력에 적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고, 기쁘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저의 약력에 적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과 무거움을 오래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2014년 여름

음악집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디예요? 어디요? 어디라고? 난 홍대입구역이라니까요. 9번 출구 앞에 수평선이 보여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요. 마침내 캄캄하고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데 여보세요? 어디라고요? 어디? 당신, 듣고 있어요?

캐럴

사랑 없는 삶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미래의 어느 날에는. 오늘은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여기서부터 미래의 밤……이라고. 미래의 밤도 밤이므로 밤으로서 어두울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언제나 미래는 지금 여기서부터라는 아주 단순하고 심심한 사실을. 2021년 6월

트로츠키와 야생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다는 경구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만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소설을 쓰는 일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어쩐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소설을 쓰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만…… 어느 밤에는 제 곁에 물끄러미 앉아 있는 죽은 이들을, 곰곰 보듬어보게 됩니다. (…)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일상사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 2022 봄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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