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만히 그 검은 물들과 물속의 썩지 않는 문장들을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수구는 내게 한 권의 경전이다. 내 안에 들끓던 언어들을 비워 가라앉히는 곳, 세상에 춤추던 온갖 욕망들이 바로 내 것이었음을 남김없이 확인하는 곳. 수건공장 굴뚝 위에 걸려있던 한 장의 잿빛 노을이 내려와 어깨를 덮을 때까지 나는 이 깊고 무거운 책 앞을 떠나지 못한다. 어린 저녁별들이 하나 둘 물 위로 태어나기 시작할 때, 붉은 십자가들이 하나 둘 어두운 하늘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
헝클어진 말들이 빠져나간 몸속은 가벼운 만큼 허전하지만 그 안에 어린 별 몇 개가 여전히 떠 있다면 오늘 저녁 나는 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길 위에서 태어난 저녁은 다시 길 위에서 저무는 어둠이 되어 스러진다. 돌아보면 낯익은 의자 하나가 여전히 하수구에 발을 담근 채 어둠 속에 앉아 있다.
산중턱에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려면 비가 와야 한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은 어느 새벽에
산은 말없이 저수지에 물을 채워놓곤 했다.
제 속 어디에 그런 맑은 물을 숨겨놓았는지
슬그머니 물을 꺼내 흘려놓아서
감자, 깨, 고추, 호박 따위
제 등에 기대어 시들어가는 목숨들을
먹여 살리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또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시고
이른 새벽의 이슬바심으로 산을 오르시곤 했다.
나는 왜 시를 쓰고자 하는가.
내 언어는 과연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에서 어떤 쓸모를 가질 것인가.
끝나지 않는 이 진부한 질문의 끝에는
늘 스스로 차오르는
산중턱의 저수지 하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