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질을 숨기며 살았다. 숨겨야 살 수 있고 들키지 않아야 물어뜯기지 않는 현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발작을 들키면 숨겨 온 게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발작은 현실에서 어김없이 ‘병신’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연민은 얼마 못 가 거부와 경멸로 탈바꿈되니. 무엇보다 동정과 배려 속에 감추어진 친절한 멸시와 다정한 차별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림자가 되어 버리니 말이다.
아무튼 이쯤 되면 나도 숨기는 걸 내려놓고 다른 궁리를 찾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숨길 수만 있으면 최대한으로 숨겼다. 모두가 알아도 내가 모르는 척했고, 발작으로 과녁이 되어도 끝까지 버티며 말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말했지만, 그건 마치 내게 인질극 같은 것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열 명보다 아홉이 나았고 아홉보다는 여덟이 나았으니, 최대한 말하지 않았다. 가끔 나는 ‘언젠가는 말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생각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 ‘간질’에 대해 쓰라고 하셨다. 쓰기 싫었고, 쓸 수 없었다. 내게 현실은 고통, 차별, 멸시일 뿐인데, 무얼 쓴단 말인가. 하나님은 계속 요구하셨다. 그 고통을, 그 차별과 멸시를 쓰라고….
기억하기 싫은 날들이 기억되는 것도 죽을 맛인데, 기억하기 싫은 그날들을 글로 기억하려고 하니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고통은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놈의 고통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쓰기 싫은 걸 이렇게 쓰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상황을 좋게 열어 주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문장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고통들은 간질을 다시 살찌웠다.
그렇게 얼마쯤 썼을까.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리 써 내려가도 문장들이 아프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던 절망이 뿌리를 내려 다시 공포를 피워 올려도 나는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간질을 지독하게도 숨겼다. 그런데 이런 내가 간질을 자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평생 하지 못했고, 평생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그 일을 말이다. 물론 어설프고 어정쩡했지만, 괜찮았다. 아프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날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야말로 내게 ‘불편한 부르심’이었는데, 이 불편한 부르심이 내 오래된 번민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지만, 내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 앞에서, 믿음이라는 신비로운 의지 앞에서 끊임없이…. 설명할 수 없는 긍정을 경험했어도, 여전히 내 앞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정들이 많기에….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떠한가? 나처럼 불편한가? 아니면 희망적인가? 혹시 하나님도 모르겠고, 부르심도 모르겠고, 그냥 다 잘 모르겠는가? 분명한 건,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음으로 결론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당신을 불편하게 할지, 환호하게 할지, 당황하게 할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나의 부정을 지금도 허물고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정도 하나씩 허물어 가실 것이다.
당신의 지금은 어떠한가? 상실에 갇혀서 막막한가? 아니면 더 깊은 절규로 추락하는 중인가? 당신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분명 허무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명료하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