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어느 밤에 있었던 일들이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어떤 이는 잊고 있었던 과거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며, 어떤 이는 너무도 당연하게 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던 것이 실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순간에 무너져 없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음을 새롭게 깨달았다. 설마는 사실이 되었고, 의혹은 확신이 되었으며, 근거 없는 낙관은 실체를 가진 공포가 되었다. 그리고 음악의 본질과 심미적 경험에 관한 글을 쓸 계획이었던 한 사회학자는 심리적 당혹감과 지적 무력감에 빠졌다. 복합위기의 시대, 정치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어떻게 고립된 삶들을 연결해 마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학자는 요동치는 정국을 이해하고 그 이면을 파악하고자 광장과 연구실을 분주히 오갔다. 동료 시민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며 배웠고, 다양한 참고문헌을 참조해 맥을 잡아갔다. 그리고 속도감 있는 저널리즘이나 팬덤을 의식한 정치평론이 담아내지 못하는 공감과 사유로 정치의 본질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성찰한 기록을 내놓았다.
<모멸감>의 사회학자 김찬호 교수의 첫 정치 에세이. 구성원 내면의 동심원을 섬세하게 관찰해온 사회학자답게 숙고의 시작은 정치와 마음의 관계다. 정치와 치유에 공통적으로 ‘다스릴 치治’자가 들어 있다는 데 착안해 저자는 정치의 존재 이유는 마음의 치유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는데, 새로운 대화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고립된 마음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보았듯 상처받은 민주주의는 공공선으로 모인 마음과 마음이 보살핀다. 민주주의와 마음은 서로 돌보는 관계인 것이다. 책의 제목이 <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인 이유다. 불안과 갈등이 도처에 만연한 지금,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정치 문해력의 기초를 다지는 데 유용한 첫걸음이 될 책.
삼국지의 내용은 필독서를 넘어 상식으로 통용된다.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여포는 비슷한 성격이나 외모적 특성을 가진 이들의 대명사처럼 통용되기도 하고, 삼고초려, 계륵, 백미와 같은 단어들은 삼국지에서 나와 현실에서 널리 쓰인다. 칼럼이나 책에서 삼국지의 내용을 비유로 드는 문장을 마주치는 일은 예사다. 그러다 보니 삼국지의 내용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책을 펴봐도 내용이 딱히 취향은 아니고, 줄줄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머리가 어지럽기만 하여 다시 덮어버린 이들은 이런 생각에 가닿게 된다. '최태성 선생님 같은 분이 그냥 내가 알아야 되는 내용만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정리해 주시면 좋겠다.'
그 바람을 귀신같이 듣고 최태성이 출동했다. <삼국지연의>의 핵심 사건과 인물 설명을 맛깔나게 요약해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 그는 이 책에서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3대 대전을 중심으로 삼국지의 흐름을 깔끔하게 잡아낸다. 이 한 권으로 삼국지에 관한 모든 상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그는 유명한 용어, 표현과 인물들에 형광펜을 칠하고 도식화를 하여 모든 내용을 떠먹여준다. 일타강사의 정리는 역시 다르다. 걸리는 곳 하나 없이 단숨에 읽힌다.
자타공인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배구선수이자, 대한민국 여자 배구를 다시 인기 스포츠로 끌어올린 주역. 소속팀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고 지난 4월 은퇴한 뒤에도 ‘신인감독 김연경’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역량을 증명한 유일무이한 인물, 김연경이 화려한 성공과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왔는지,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연경은 이번 책에서 승패의 순간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던 고민들, 스스로를 단단하게 세워 온 과정, 그리고 ‘우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자신의 철학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뛰어온 한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흔들림 없는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건네고 싶은지를 고요하고 강한 문장으로 전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다시 집중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김연경이 확인해온 성장의 원칙은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단단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몬스터 차일드>로 제1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재문 작가는, 이후 <마이 가디언>, <드래곤 히어로>를 통해 더욱 넓고 다채로운 이야기 세계를 펼쳐 보였다. 신작 <환상통증전문 삼신병원>에서 아이들 곁을 지키는 의사 ‘삼신’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켜 판타지의 매력을 다시 선보인다.
개구리로 변하는 병, 덧니가 돋아 자꾸만 누군가 물고 싶어지는 병, 투명 인간이 되는 병, 손에 칼날이 돋는 병.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병을 앓는 다섯 아이의 이야기가 차례로 펼쳐진다. 삼신이 내리는 독특한 처방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마음과 상처를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치유의 길을 발견한다.
현직 교사로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지켜본 작가는 초등 고학년 아이들이 겪는 고충과 흔들림을 정확히 포착해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녹여낸다.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버무린 이 작품은, 아이들이 부담 없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드는 흥미진진함과, 읽는 이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 공감대를 동시에 갖췄다.
해결하기 복잡하고, 생각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문제 앞에 섰을 때였다. 가까운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고, 친구는 단숨에 내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유튜브를 한 번 꼭 보라고 말했다. 종교도, 이념도 크게 상관없다며, 스님의 명쾌한 답을 듣고 있으면 속을 어지럽히던 것들이 잠시 가라앉는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나운 감정과 헤쳐 나가기 힘든 풍파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드는 법륜 스님의 강의가 이 책에 그대로 담겼다. 보다 짧게, 그러나 보다 명쾌하게.
선문답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책은 질문 하나, 답 하나가 각각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디부터 펼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삶, 관계, 욕망, 고통과 같은 익숙하지만 늘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스님은 군더더기 없는 한마디로 방향을 짚어 준다. 긴 설명 대신 단번에 들어오는 말, 위로보다 먼저 도착하는 이해가 이 책의 힘이다. 복잡한 생각이 엉켜 더 이상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책은 의외로 가장 단순한 곳에서 출구를 가리킨다. 그렇게 우리는 해답을 ‘듣는’ 대신, 스스로 ‘깨닫는’ 자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메리식당>은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외로운 고슴도치 씨가 다시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을 따뜻하게 담은 그림책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 고슴도치 씨는 빨간 풍선을 따라 낯선 '메리식당'에 들어간다. 식당 할아버지가 눈사람 그릇에 담은 오므라이스를 가져온다. '마음을 안아 주는 오므라이스'라고 설명한다. 고슴도치 씨는 조심스레 한 입 먹었다. 그러자 잊고 지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과연 어떤 기억이었을까?
따뜻한 한 끼가 마음을 위로하듯 메리식당은 고심도치 씨에게 작은 휴식을 건넨다. 메리식당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정한 이야기의 무대이다. 책장을 넘기면 음식처럼 따듯한 위로가 차려지고, 작은 공감들이 선물처럼 다가온다. 메리식당, 이 곳에서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더욱 포근해진다.
설마하니 <종이 동물원>의 그 켄 리우가 맞다. 이 무슨 의아한 조합인가 물음표를 띄운 독자들을 위해 그는 자신이 도덕경에 빠지게 된 계기를 먼저 설명한다. 켄 리우는 스스로 인간의 노력을 통해 도래할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기,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뭉치기보단 증오와 폭력을 더 많이 선택했고, 그런 세계의 정치 앞에서 그는 더 이상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길을 잃은 그는 손에 잡히는 일들을 마구잡이로 하다 도덕경을 만나 읽기 시작했다. 이 어둠을 벗어날 수 있길 바라며.
도덕경에 들어있는 노자의 말은 "날카롭되 베지 않았고, 정의롭되 판단하지 않았으며, 희망을 품되 달콤하지 않았다." 도덕경은 어느새 그에게 위안과 다시금 걸을 힘을 주고 있었다. 이 책은 그가 도덕경과 나눈 대화다. 책은 도덕경의 내용이 한 페이지 나오고 그에 대한 켄 리우의 해석이 뒤따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젠가는 도덕경을 읽어 봐야지 생각했던 이나, 차마 읽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이에겐 이 책이 뜻밖의 일독을 할 좋은 기회다. "읽다 보면 나도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소설가 김연수가 추천했다.
참혹했던 내전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2018년 알제리에서 한 여인이 고민에 빠졌다. 다섯 살 때 내전 중이던 이슬람 무장단체의 습격을 받아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자기 자신은 후두와 성대가 손상된 채 기적적으로 홀로 살아남았던 오브. ‘평화와 화해를 위한 헌장’을 통해 정부가 내전 관련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그 시절의 비극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하며 자신이 겪은 일이 이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역사’가 되어버린?현실 앞에서, 오브는 과연 아이를 낳아도 되는지 자문한다. 그리고 침묵을 강요하는 국가에 맞서 뱃속 아이에게 자신이 겪은 진실을 들려주겠다고 결심하고, 과거를 마주하기 위해 고향이자 학살의 현장이었던 마을로 떠난다. 고향 마을로 향하는 여정에서 만난, 내전의 상처를 각자의 방식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소설은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국가가 지운 기억을 되살리고, 이제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은 말할 권리를 되찾는다.
2015년 알베르 카뮈 <이방인> 속 살해당한 ‘아랍인’에게 이름을 되찾아 준 <뫼르소 살인 사건>으로 공쿠르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던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의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알제리 내전 동안 일어났던 참혹한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약 2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낳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내전이 끝난 뒤, 알제리 정부는 사회 통합을 명분으로 내전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제하였다. 이러한 ‘제도화된 망각’ 속에서 내전은 공식적 언어에서 지워졌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은 법적, 사회적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 되었다. 그 가운데 내전의 폭력과 국가 정책적으로 강요한 침묵을 정면으로 다룬 이 소설은 당연하게도 알제리 정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 문학을 통해 강요된 망각을 거부하고 역사를 복원하려는 작가의 확고한 의지가 담긴 작품이며, 지난 세기 같은 아픔을 겪었던 한국인에게도 큰 울림을 줄 소설.
팽나무의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겹겹의 층이었다. (47쪽)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에밀 기메 아시아문학상 수상. 2025년 문화예술 분야 정부 포상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황석영의 2025년 최신작. '끝까지 현역으로 글을 쓰다 죽겠다'는 소감을 밝힌 거장은 북방 대륙의 개똥지빠귀 한 마리의 날개짓으로 금강 하구에 뿌리내려 이 땅과 연을 맺은 팽나무 '할매'의 600년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톺아본다.
생명은 제각기 주어진 시간대로 삶을 산다. '지상의 시간으로 빠르게는 두시간에서 길게는 하루 반쯤' (40쪽) 사는 하루살이의 시간, 한해살이인 풀꽃의 시간, 길어야 수십 년인 인간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팽나무는 제 자리에서 나이테가 쌓이는 것을 겪는다. 승려 '몽각', 당골네 '고창댁', 순교자 '유분도', 동학농민군 '배경순'의 시간을 지나고 일제 강점기에 군산 비행장 활주로가 닦이고, 해방 후 미군기지가 확장하고,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조개가 말라죽는 모든 시간을 팽나무는 견딘다.
군산에 정착한 소설가 황석영은 팽나무를 지키는 문정현 신부의 사업과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라> 등의 도움으로 이 이야기를 완성했노라 밝힌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문다. 이 새삼스러운 시간성을 인식하면서 세계를 둘러볼 것을 촉구하는 명상적인 소설과 함께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해도 좋겠다.
같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 어떤 물체를 흥미롭단 듯이 찍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돌이라거나 버려진 의자 혹은 낯선 이의 집 대문 같은 걸 한참을 찍었고 몇 달 후엔 그게 그의 작품이 되어 있었다. 그만의 시각이 그의 예술 작품이 된 것이다. 내가 보는 것과 그가 보는 것은 어떻게 달랐던 걸까?
전 영국 테이트 갤러리 관장이자 BBC 예술 담당 기자로서 대중에게 예술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온 미술평론가 윌 곰퍼츠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예술을 완성한 31명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유명한 작가부터 처음 듣는 작가까지 다양하다. 유명세를 떠나서 그들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술 작품을 창조했는지는 또 다른 관점이고 새롭다. 곰퍼츠는 이 책을 조각가 마크 하비의 편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기술한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보는 아버지의 능력에 매료되었고 가장 멋진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기 위해 아버지보다 1미터 앞서서 해변가를 걷겠다고 고집을 피우곤 했습니다." 앞서 걷는다고 가장 멋진 것을 발견하진 않지만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힘은 지나친 것들도 아름답게 보이게 할 테다. 예술은 소위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일상 곁에 사금 조각처럼 번쩍이고 있다.
여기 약혼으로 맺어진 두 왕국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정해진 결혼 언약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나 15살이 된 공주 툴리아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을 몰래 지켜 주기 위해 꾀를 내는 궁정 마법사까지….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궁정 마법사 '아나톨'의 시선으로 풀어진다. 이 세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청소년 필독서인 <구덩이>의 작가 루이스 새커의 신작인 이 소설은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500년이 지났음에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궁정 마법사 아나톨은 호랑이성의 가이드처럼 자신이 겪은 일들을 풀어낸다. <해리 포터>를 읽는 것 같은 아득한 마법의 느낌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가 더해져 읽는 맛이 배가 되니 만족스러운 읽기가 될 것이다.
한때 잘나가는 잡지사 기자였지만 지금은 매체의 변화에 고전하고 있는 편집자 고바야시, 적당한 유명세의 오컬트 전문 유튜버지만 그 자신은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케다, 독특한 내력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자라온 프리랜서 작가 호조. 세 사람은 이케다가 촬영했던 심령 명소들을 비즈니스 대상으로 분석하여 그곳에 얽힌 소문을 각색하고 괴담을 날조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자 한다. 정체불명의 인물 사진이 가득한 의문의 폐가,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 폐업한 병원, 한 때 영아 유기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호텔까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취재 내용들을 날조하는 가운데, 버려진 공간에 얽힌 음습하고 불온한 악의가 세 사람의 어두운 과거와 얽혀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에서 실험적 모큐멘터리 기법으로 호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세스지 작가의 신작. 작품의 중심 배경이 되는 일본의 ‘로쿠부 살해’ 민담(피해자가 가해자의 자식으로 환생해 응보를 되돌린다는 이야기)은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이야기 - 대표적으로는 율곡 이이의 요절한 아들들에 얽힌 이야기 - 가 전해질 정도로 보편성을 띤다. 작가는 이러한 보편적인 민담을 바탕으로 인간의 탐욕과 악의로 오염된 공간과 그곳에 층층이 쌓인 저주와 죄업이 지금도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섬뜩하고 불길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번 작품은 인터넷 연재 기반이었던 전작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와는 달리 처음부터 단행본 출간을 전제로 새롭게 쓴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긴 호흡으로 천천히 조금씩 드러나는 공포의 실체가 서서히 죄어오는 올가미처럼 서늘하고 섬뜩하다.
1920년 여름 아이다호 인근에 큰 산불이 났을 때 그레이니어는 아내 글래디스와 딸 케이트를, 그가 직접 일군 숲속 삶의 터전을, 사랑하던 존재를 모두 잃었다. 집을 떠나 철로 공사장에서 일하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불길이 계곡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았다. 집을 잃고 마을로 피난 온 사람들 사이에서 아내와 딸을 찾아 헤맸지만, 살아 나온 사람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에 무심했다. 불길이 잦아들고 그의 오두막이 있던 숲에는 회색빛 재만 남아있었다.
다음 해, 그레이니어는 그의 오두막이 있던 빈터에 야영지를 세웠다. 송어를 낚고 버섯을 채취해 요리해 먹고, 어디서 온 지 모를 개 한 마리와 함께 염소와 닭을 기르며 지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읍내로 떠났다. 그다음 해에는 말과 수레를 빌려 생필품을 가득 싣고 돌아와 새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의 하루는 평범한 장면들로 채워졌다. 도끼질하는 소리, 불타는 냄새, 강물 흐르는 소리. 수레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멀리서 늑대들이 우는 소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전미도서상, 미국 의회도서관 소설상 수상작가 데니스 존슨의 그리 길지 않은 소설. 2002년 발표 이후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아가칸상과 오헨리상을 연달아 수상했고, 2012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소설은 한순간의 산불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사람의 계속되는 삶을 미화하지도, 비극으로 포장하지도 않은 채 담담한 시선으로 비춘다. 극적인 반전도, 갑작스러운 행운도, 뒤늦게 찾아온 위안도 없다. 그가 숲속 오두막에 머물기로 스스로 서약한 계기가 되었던 찰나의 기적 같은 순간을 비출 때조차도 작품의 조명은 밝기를 달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인간의 고독과 회복력을 조용히 그려낼 뿐이다.
새해를 기다리며 2026년을 이르게 만날 수 있는 현대문학상의 71회 수상작가가 발표되었다. 시 부문은 <쥐의 시절>의 김상혁, 소설 부문은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의 임솔아가 수상했다. 연인 윤미의 사망진단서와 같이 놓인 이목구비가 날아간 폴라로이드 사진. '안 보이는 얼굴은 안 보이는 채로도 잘 보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250쪽)는 수상소감을 적은 임솔아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 보이는 얼굴을, 흐릿한 이목구비여도 감지되는 후광 같은 사랑의 기척을 스케치한 작품을 내놓았다. 가까운 미래의 후대 연구자들은 그들의 사랑을 '아카이빙 프로젝트 : 사랑 편'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사랑은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나 하는 기이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의 사람들에게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50년을 변함없이 사랑하느라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욕망하지 않기로'(37쪽) 한 이들의 구시대적 피로는 연구할 만한 것이 된다.
사는 게 괴괴할수록 소설이 할 말이 많아진다. 임솔아의 자선작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 '자신이 타인을 외롭게 만든다고 늘 생각'하는 (65쪽) 그는 회전하는 세탁기, 팽이, 나사, 오르골에서 평화를 느낀다. 다름이 자폐검사지의 점수로 측정되는 세계를 표준 바깥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독자에게 질문이 남는다. 김혜진의 <관종들>의 '간섭하고 참견하면서 잃은 것들이 너무 많'(79쪽)으면서도 기어이 '작은 의혹도 무시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을 응원할지 말지 소설이 떠난 자리에 질문이 남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솔뫼의 인물들의 이동성, 서장원의 인물들의 아이러니, 이미상의 인물들의 신랄함, 임현의 인물들의 윤리성 등 자신의 작품세계를 갱신하며 한발짝 더 나간 작품들 역시 읽는 사람에게 대답을 요구할 것이다. 잘 읽고, 잘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설이 멈춘 자리에서 새해가 질문한다.
수많은 선택 앞에서 우리는 늘 논리부터 꺼낸다. 장단점을 비교하고, 주변 조언을 모으고, 미래의 변수를 일일이 계산하며 '정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해 보이는 선택을 했음에도 마음 한켠이 이상하게 불안하거나 답답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선택은 근거도 확신도 없었지만, 설명되지 않는 강한 끌림 하나로 뛰어들어 결국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결국 우리를 앞으로 이끄는 건 완벽한 계획표가 아니라, 때로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가장 정확하게 자신을 향해 울리는 '내면의 목소리' 아닐까?
이 책은 그 목소리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안내서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외부의 기준과 성공 공식을 따르느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심어진 고유한 재능과 감각을 잊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직관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정교한 GPS이며, 삶은 억지로 계획을 맞추는 고행이 아니라 내면의 리듬에 조율될 때 비로소 열리는 탐험과 배움의 흐름이라는 것을. 직관을 따를 때 진짜 기회와 기쁨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필요한 사람과 상황도 마치 자석처럼 끌려온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복잡한 세상이 아니라, 결핍과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장벽이다. 이제는 그 두려움을 조용히 내려놓고, 당신 안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왔던 나침반의 방향을 믿어도 된다. 삶의 주도권은 언제나, 그리고 온전히 당신에게 있다.
곧 또 한 살을 먹는다. 고유명사들이 생각나지 않고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자꾸만 잊어버리고 왠지 전보다 덜 총명해진 기분, 나이 탓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데일 브레드슨은 이 지점에서 나이의 편을 든다. 당신의 뇌가 낡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나이 탓이 아니라 '생물학적 스트레스 요인' 때문이라고. 나이와 인지 기능의 반비례는 당연하지 않다고.
50여 년간 알츠하이머병과 신경퇴행질환을 연구해온 저자는 뇌의 노화는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알츠하이머가 발병되기 전에 대비만 제대로 한다면 우리는 늙지 않는 뇌를 가질 수 있다. 책에서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이 '대비책'들을 알려준다. 뇌 건강의 명확한 목표, 자신의 현재 상태 파악부터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습관들까지 거창하지 않고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연말 연초, 바삐 흘러가는 시간이 두려운 모든 이들을 위한 책.
지구와 삼체 세계 사이의 전쟁에서 삼체 세계의 포로이자 전쟁의 최전선이었던 원톈밍. 지구와 삼체 세계가 멸망하고 외딴 소행성에서 긴 망명 생활을 한 끝에 노쇠해진 그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임무를 부여받고 회생한다. 스스로를 ‘주재자’라 부르는 우주 10차원의 전지전능한 힘이 그에게 자신의 적인 ‘매복자’와 싸우도록 종용한 것이다. 하지만 윈톈밍은 또다시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한 자신만의 계획을, 납작해진 우주의 차원을 되돌려 멸망한 지구 성계를 회복하기 위한 우주 역사상 전례 없는 모험이자 도박을 시작한다.
소설은 윈톈밍이 사실상 유일한 인류로서 참전한 전쟁을 통해 태초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차원 전쟁이 남긴 잔해와 신비롭고도 잔혹한 존재론적 의미를 그려 나간다. 우주의 차원 전쟁에 얽힌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저차원 우주에서 결국 소멸하더라도 ‘흘러가는 시간’과 흥망성쇠를 경험하려는 자와, 시간 개념이 부재하더라도 모든 지능체가 합일되는 이상적 사고체계의 10차원 우주에서 영원불멸을 누리려는 자 사이의 전쟁 속에서 영겁의 세월을 견뎌 맞이하는 결말은 무엇일까. 작가는 작품이 거둔 성공에 대하여 ‘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릿길을 갈 수 있다’며 겸양을 보이지만, 이는 원작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바오수는 이 소설을 통해 <삼체>의 이야기를 우리 우주의 창조 신화 만들며 완벽한 원작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헌사를 보내는데, 청신에게 별을, 우주를, 세계를 선물한 원톈밍을 떠올리게 한다. <삼체> 시리즈의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소설.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천장은 거대한 스크린이 된다. 낮에 있었던 미묘한 표정, 스치듯 나눈 대화의 공기, 혹시나 묻어났을지 모를 나의 미숙함이 슬로모션으로 재생되는 시간이다. 타인의 시선에 유독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대에 세우곤 한다. 이 막막한 불안의 원인을 사회의 구조적 압박으로 볼 것인지, 개인의 기질 탓으로 돌릴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지만,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 무게를 견디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살아내지만 속으로는 타인과의 비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서서히 소진되어 가는 것이다. 바로 이 위태로운 지점에서 이 책은 우리 내면의 고통을 직시하게 만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마음이 무너질 때 더 단단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존감을 '지켜야 할 무엇'이나 '높여야 할 상태'로 생각하지만, 이 책은 그 전제를 조용히 뒤집는다. 나를 평가하는 목소리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연습, 불편한 감정을 서둘러 없애려 하지 않고 잠시 곁에 두는 태도, 특별해지지 않아도 삶이 충분히 성립한다는 인식이 반복해서 환기된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긍정하라는 구호도,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라는 주문도 없다. 대신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알아차릴 때, 불안은 더 이상 절대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는 통찰이 놓여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다그치지 않고, 이미 무거운 마음에서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라고 책은 말한다.
완보동물은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공간 탈출'이 불가할 때, '시간 탈출'을 한다. 몸속의 물기를 98%까지 제거해 바싹 마른 상태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가 먼 미래에 몸에 물이 닿으면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소설 <삼체>를 읽은 독자라면 게임 속 인간들의 충격적인 '탈수'와 '입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류츠신이 완보동물을 참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어떤 생명체는 실제로 그 '탈수'와 '입수'를 하고 있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이 책엔 인간이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극한의 환경에서 제 나름의 방식대로 생존하는 동물들이 잔뜩 나온다. 영하 18도의 겨울에 몸 안의 물을 얼려 거의 죽은 상태가 되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해동되며 살아나는 송장 개구리, 극고온의 사막에서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면서 몸이 땅 위로 잠시 떠오르는 순간 열기를 덜 받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사하라은개미... 상상하지 못한 생존 방식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입을 떡떡 벌리게 된다.
저자 알렉스 라일리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시기를 헤쳐 나오는 데" 이 책을 쓰며 만난 생명체들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강인한 생명력이 지닌 에너지는 전염되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 또한 제 각자의 존재론적 위기를 돌파하는 데에 모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감히 단언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로부터. "탈수 상태의 작은 몸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완보동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견딜 뿐이다." 경이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써낸 책이다.
올해 어린이 분야 도서 출간 경향 중 눈에 띄는 부분은, '말하기'에 관한 책이 다종 출간된 점이다. 예쁜 말, 단단한 말, 당당한 말, 다정한 말, 빛나는 말.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잘 전하는 법을 담은 책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해였다.
21년 차 초등 교사이자, 아동심리상담사 최현주의 첫 책 <내 친구는 왜 그럴까?>는, 학교 안에서 아이들이 실제로 마주하는 39가지 상황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이 책은 '이럴 땐 이렇게 말해'라는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 스스로 상황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이끈다. '친구가 왜 그랬을까?'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친구의 행동 속 숨은 마음을 살펴볼 뿐 아니라, 내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야 하는지, 어떻게 해보면 좋을지 짚어 준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수전 손택의 대표작 <해석에 반하여>가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됐다. <흰고래의 흼에 대하여>로 단단한 팬층을 모은 베테랑 번역가 홍한별의 번역에 힘입어 알라딘 북펀딩을 크게 달성 시키며 세상에 나왔다.
책엔 '해석에 반하여', '스타일에 관하여', ''캠프'에 관한 노트' 등 손택의 지성을 널리 알린 대표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파베세, 카뮈, 레비스트로스 등 작가나 고다르, 브레송 등 감독들에 대한 리뷰 및 논평이 들어있다. 여전히 우리의 뇌를 자극하는 문장들. 손택 읽기엔 희열이 있다. '언젠가 읽게 되겠지' 미뤄온 이들에게, 때가 왔다.
학창 시절, 성적을 가장 크게 끌어올렸던 방법은 단권화와 오답노트였다. 흩어진 교재와 문제집을 한 권으로 압축하고, 틀린 문제를 다시 붙잡는 과정에서 공부는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다만 단권화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답노트는 대부분 권하지만, 단권화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린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누군가 이미 체계적으로 단권화해둔 결과물로 공부한다면 어떨까? 더 이상 족보를 찾을 필요도, 핵심을 헤맬 필요도 없지 않을까? <부에 이르는 가장 단순한 길>은 바로 그런 책이다. 투자라는 방대한 세계를 저자가 직접 겪은 시행착오와 통찰로 압축해, 한 권의 '완성된 단권화 노트'로 건네준다. 독자는 복잡한 금융 이론을 헤쳐 나갈 필요 없이, 가장 중요한 것만 붙잡으면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방법'보다 '틀'에 가깝다. 이미 잘 정리된 단권화 노트를 손에 쥐었을 때 공부의 방향이 또렷해지듯, 저자는 독자가 이 책을 통해 더 이상 헤매지 않도록 '부의 구조'를 먼저 이해하길 바란다. 무엇을 사고팔지보다 먼저, 돈을 어떤 순서로 다루어야 하는지, 시장의 변동 앞에서 어떤 판단은 내려놓아도 되는지를 분명히 짚어준다. 이 책에서 독자가 배워가야 할 것은 요령이 아니라 원칙이다. 빚을 대하는 태도, 저축과 투자의 우선순위, 전 시장의 흐름을 담아내는 단순한 투자 도구의 활용, 그리고 폭락기에도 계획을 수정하지 않는 심리적 안정까지. 저자는 독자가 '시장을 이기는 사람'이 되기보다, 시장과 공존하며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학창 시절 단권화된 한 권을 곁에 두고 반복해서 확인했듯, 이 책이 투자 인생 전반에 걸쳐 다시 펼쳐보게 될 기준서가 되길 기대해 본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자신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떠났다가 위험에 처한다. 세기가 바뀌기 바로 전 날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갔던 여자는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난다. 아일랜드 농부의 고통받던 아내가 잔혹할 만큼 지배적이었던 남편에게 마침내 반항한다. 이야기 속 여성들에게는 불행이 찾아온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미쳐버린다. 차가운 세계이자 유독한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 20대 젊은 작가 클레어 키건은 분노와 결의에 찬 채로 언어로써 그것을 날카롭게 깎고, 눈이 시리게 벼려냈다.
2024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래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클레어 키건의 국내 다섯 번째 번역작이자 데뷔작. 이로써 27년 동안 활동해 오며 출간한 다섯 권의 책이 모두 완간되었다. 키건은 이 책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 마틴 힐리 상, 프랜시스 맥마너스 상, 윌리엄 트레버 상 등 4개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아일랜드 문학계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작가의 데뷔작을 가장 마지막에 마주하게 된 국내 독자라면 이미 먼저 만나보았던 후기작들과 비교하며 26년 전 이미 예고된 작가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원석을 들여다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중학교 3학년 동계 체전을 앞두고 사고로 시력을 잃은 남우희와, 가난한 형편과 슬럼프로 선수 생활의 끝에 내몰린 강예리는 가장 빛나던 순간 깊은 추락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스키만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은 과거 라이벌이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존재였지만, 운명처럼 파트너가 되어 다시 설원에 선다.
이 소설은 장애 극복을 넘어 실패와 좌절을 겪은 두 인물이 서로의 상처와 두려움을 이해하며 연대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끊임없이 부딪치던 우희와 예리는 함께 훈련하며 진심을 나누고, 다시 찾아온 고난 앞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 혼자가 아닌 ‘함께’ 나아가는 선택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를 전하는 이 이야기는 올겨울 가장 따뜻한 응원으로 독자 곁에 남을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흔한남매> 시리즈가 유튜버 IP 도서 최초로 누적 판매 1,000만 부를 돌파했다. 어린이 분야 전체로 보아도 손에 꼽을 만한 기록이다. 흔한남매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신간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다 부모님 '찬스'로 책을 손에 쥔 아이들은 박장대소하며 단숨에 읽어낸다.
화제의 영상이 책이라는 물성으로 만들어진다고 인기 바통이 저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한남매는 영상과 책, 두 가지를 모두 대성공시킨 특별한 사례다. 책 읽기 싫어하는 아이마저도 매료시키는 흔한남매의 강점은, 어린 시절 직접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일상과 밀접한 에피소드로 아이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있다. 공감이 순수한 웃음으로 이어지는 <흔한남매> 시리즈는, 천만 돌파 시점에 맞춰 동시 출간된 21권과 한정 수량의 특별판으로 그 인기를 다시 증명한다.
"내가 주식을 팔기만 하면 오른다." 투자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이 기묘한 머피의 법칙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시장이 저점이라고 '인식'하고 공포에 질려 매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집단적인 투매 행위가 실제 가격을 바닥으로 밀어 넣으며 반등의 토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인지는 단순히 현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그 자체를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비단 주식시장뿐만이 아니다. 누군가 '품절 임박'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멀쩡하던 물건이 정말로 귀해지고, 대중이 특정 브랜드를 '힙하다'고 정의하는 순간 그 브랜드의 가치는 실체와 상관없이 치솟는다. 세상은 객관적인 수치보다 인간의 요동치는 심리에 의해 더 자주, 더 격렬하게 재구성된다. 부동산, 소비, 정책 기대, 유행의 확산까지 경제 전반은 언제나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있는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변동성은 구조적인 조건이지만, 그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심리이며, 시장은 이 심리가 집단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금융의 연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조지 소로스는 시장을 균형으로 수렴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아니라, 생각하는 참여자들의 인식과 행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왜곡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가 말하는 '재귀성 이론'은 예측의 기술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이해하는 사고의 틀이다. 이 책은 무엇을 사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왜 인간의 판단은 반복해서 흔들리는지, 그리고 그 흔들림이 어떻게 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변동성 앞에서 감정이 앞섰던 투자자, 숫자 너머의 인간 행동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금융의 연금술>은 여전히 가장 설득력 있는 고전이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다시 읽혀야 할 이유가 분명한 책이다.
돌이켜보면 조직 안에서도 사람들의 기대와 해석이 분위기를 만들고, 그 분위기가 다시 선택과 결과를 바꿔왔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초등 신문 책이 꾸준히 출간되었다. 작년과 달라진 점은, 종수가 늘어난 것은 물론, 다루는 주제가 경제, 과학, 정치 등으로 한층 더 세분화되고 깊어졌다는 것이다. 여러 권의 초등 신문 책을 읽은 뒤, 배경지식을 한 단계 더 확장하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오랜 기간 교사로 근무했고, 현재는 독서 교육과 문해력을 연구하는 전문가 이다희 작가가 <초등 첫 문해력 신문> 시리즈 이후 선보인 이 책은, 수능 비문학과 논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핵심 토픽들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빅데이터, 탄소 중립, 제로 웨이스트, 가성비처럼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개념을 쉽게 풀어내고, 사진과 그림 자료를 충분히 활용해 이해를 돕는다. 수록된 토픽은 무려 131가지. 환경, 사회, 경제, 라이프, 문화, 과학 기술 등 초등 교과 내용과 긴밀하게 연계된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권으로 단어와 개념, 연관 키워드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신문 읽기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은 어린이에게 든든한 지식의 토대를 마련해 줄 책이다.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소멸하는 밤> 정현우 시집. 사랑하는 어머니의 부재를 통과하며 남은 빛과 형상의 세계를 더듬는다.
2024년7월 14일
결국 애도의 시를 쓴다는 건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시적인 방식으로 대답하는 일이다. (190쪽)
라고 시인은 메모한다.
'당신을 더 이상 부르짖을 필요가 없는 십이월' (15쪽)에 시의 화자는 '십이월의 캐롤은 즐겁습니다.'(22쪽)라고 적는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이전 계절의 향, 오이 비누의 냄새 같은 생의 냄새다. '엄마, 당신은 흰 눈으로 오는지 /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이 쌓인 거리 위로 / 혼자 듣는 밤의 캐롤.'(139쪽) 애도가 이어지는 창밖. '아, 엄마는 여름에 이미 죽었지'(140쪽) 깨달음과 함께 눈 내리는 창밖에 겨울 이미지가 성실한 슬픔의 밤 위로 차곡차곡 쌓인다.
후한 말 군웅이 할거하여 천하를 다투던 난세를 평정한 것은 사마씨의 진나라였다. 진의 삼국 통일 이후 진수가 <삼국지>를 지었는데, 간결하고 진중한 필치와 엄격한 평가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촉한 출신으로 진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했던 진수가 자의든 타의든 삼국 역사의 진실한 면모와 다양한 자료를 누락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남조 유송 문제가 중서시랑 배송지로 하여금 삼국의 서로 다른 기록을 채록하여 진수의 <삼국지>에 주를 달라고 명을 내리니, 배송지는 당대 전해지던 200여 종의 서적을 인용하여 방대한 주석을 남겼다. 이에 진수가 지은 <삼국지> 36만 자에 배송지가 붙인 주석 32만 자가 더해져 ‘진수가 짓고 배송지가 주를 단’ <삼국지>의 원형이 완성되었고, 훗날 <삼국지연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다시 창작되고 널리 읽히며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영감, 교훈을 주는 고전이 되었다.
<삼국지>의 방대한 ‘배송지 주’를 완역해 온전히 읽을 수 있게 한 전 8권 완역본이 드디어 국내에도 출간되었다. <위지> 4권, <촉지> 1권, <오지> 2권에 더하여 지도와 진수, 배송지의 전(傳), 주요 인물들의 계보도, 연표, 관직과 지명 등을 정리한 <사전>을 더하여 총 8권이다. 본문에서는 <흠정사고전서회요> 본을 저본으로 삼아 원문과 주를 구분 배치하고, 배송지가 교감이나 비평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대목은 별도의 단락으로 구별하고 전체 문장을 고딕체로 처리하여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진수의 간결한 서술을 배송지의 방대한 사료가 보완한 완전한 형태의 <삼국지>에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번역자와 편집자를 비롯하여 이 책의 출간을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에게 독자의 한 사람으로 감사를 표할 뿐이다.
사람들은 성공한 이름 앞에서 숫자를 먼저 본다. 손흥민의 주급이 수억 원이라거나, 일론 머스크의 자산 규모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수치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보며 "대단하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 숫자가 도출된 과정, 즉 결과 이면의 지독한 원인에는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달콤한 열매만 부러워할 뿐, 그 결실을 위해 투입된 피와 땀, 눈물, 그리고 절대적인 인내의 시간은 망각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세상의 법칙은 부의 세계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손에 잡히는 수익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재정렬이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요행을 바라는 이들에게 결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삶의 궤적을 바꾸고 싶다면, 타인이 이뤄놓은 결과물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부터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스스로를 하나의 기업으로 여기며 역량에 투자하고, 경제학의 냉혹한 법칙들을 삶의 근간으로 삼을 때 비로소 경제적 자유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일의 수확을 위해 오늘의 안락을 기꺼이 유보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자산으로 길러내겠다는 단단한 약속, 그것이야말로 새해를 맞이하며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아닐까?
학교 과학실 앞, 이정모 관장의 과학 책 <얘들아, 루카를 아니?> 포스터 앞에 서 있던 경이와 로운은 어느 순간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포스터 속 불바다에서 두 아이가 마주친 이는 다름 아닌 이정모 관장. 그는 책과 포스터, 그림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지만, 정작 현실로 돌아오는 방법은 알지 못해 늘 길을 헤맨다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 기묘한 만남을 계기로 세 사람은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시간을 따라가는 신비로운 탐험에 나선다.
약 138억 년 전 우주와 별의 탄생, 약 38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 '루카', 약 24억 년 전 산소 대폭발, 원핵 세포와 진핵 세포, 그리고 캄브리아기 생명 대폭발까지. 교과서로 만나면 어렵고 딱딱할 이야기들이 이정모 관장과 '경이', '로운'이 함께하는 '경이로운' 모험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살아난다.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을 생동감 넘치게 살린 유쾌한 그림들이 이야기에 활력을 더하며, 책장을 넘기는 내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진화생물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특별한 SF 동화다.
우리가 같은 상식의 대지 위에 서 있다면, 오늘날 지구의 위기는 인간의 오만으로부터 왔다는 데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 오만은 세계의 작동 방식 구석구석에 그늘을 드리웠는데 이 책은 그중 ‘동물의 세계’에 집중한다. 인간은 동물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어떻게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물들의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까지 망가뜨리게 되었나?
책은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죽 훑으며 동물과 인간이 때마다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들여다본다. 인간이 동물과 얽히며 살았던 이야기들은 경이롭고 신비한 자연의 기본 법칙을 알려준다. 인간의 삶을 구할 열쇠는 바로 동물 생태계에 있다는 사실.
저자 케기 커루는 오만한 인간들이 스스로 쓴 눈가리개를 벗겨내기 위해 무려 5년간 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써냈다. 인간이 동물을 구하고 동물이 인간이 구한다는 이 당연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는 아름다움과 절박함을 섞어 담은 이 책을 건넨다.
제임스 우드는 한국의 대중에겐 아직 낯설지만 미국에선 이미 '현존하는 최고의 비평가'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큼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신형철은 이 책에 쓴 해제에서 "그냥 잘 쓰고 싶은 게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는 찬사를 보냈다. 수전 손택도, 엘레나 페란테도 극찬하는 평론가. 그는 대체 어떤 글을 쓰는가?
이 책은 그가 각기 다른 강연을 위해 쓴 원고의 묶음이다. 본격적인 비평이라기보다는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문학의 이야기가 적당히 범벅된 것이라 우드의 글맛을 서서히 느낄 입문용으로 적당하다. 이 책에서 그는 삶과 죽음, 문학과 디테일, 비평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이어간다.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매끄럽게 뻗어 나가다가 여러 문학 작품들을 꿰고, 뚫고, 감아낸다. 지적이고 따뜻한 통찰의 문장들이 삶과 문학에 동시에 답한다.
유머가 굳이 깃들지 않아도, 잘 쓴 문장은 언제나 웃음보다 깊은 재미를 준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일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실패 없는 독서를 위한 책을 고르고자 방황 중인 이들에게 주저 없이 추천할 만한 책이다.
투자 시장의 소음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확신'이다. 남들의 추천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닌, 기술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근거한 확신 말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로 꼽히는 김학주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단순한 종목 나열을 넘어, 거대 자본이 움직이는 '돈의 물길'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단순히 AI가 유망하다는 식의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 학습에서 추론으로 넘어가는 기술적 변곡점이 어떻게 반도체와 에너지 산업의 판도를 뒤흔드는지 그 구조적 인과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기술의 작동 원리를 투자의 맥락으로 치환해내는 저자의 독보적인 시선은, 독자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투자의 기준점을 선사한다.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독자로 하여금 '산업의 전이'를 읽는 통찰의 근육을 기르게 한다는 점에 있다. 하나의 혁신이 발생했을 때 그 파동이 어디로 흘러가 누구의 주머니를 채울지, 전후방으로 산업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눈에 보이듯 그려준다. 지금 당장 고점인 종목을 뒤쫓는 '추격자'의 삶을 끝내고, 3년 뒤 엔비디아를 위협할 미래의 대장주를 선점하는 '설계자'의 안목을 제안한다. 텐배거(10배 수익)는 운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한 사색과 분석이 빚어낸 필연의 결과임을 증명하는 이 책은, 불확실한 시대에 자신의 부를 지키고 키우려는 투자자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피아노 조율사가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짬짬이 즐긴 음식 이야기, <중국집> <경양식 집에서>에 이어 <국수의 맛>이 출간됐다. 우리 식문화 3부작 시리즈의 완결이다. 자극적이고 신뢰하기 어려운 맛집 콘텐츠가 넘쳐나는 지금, 조영권 작가가 꾸준히 쌓아온 글들은 오히려 가장 정석에 가까운 음식과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수의 맛>에서도 작가는 변함없이 피아노 조율을 마친 뒤, 조용히 한 그릇의 국수를 마주한다.
그 국수 한 그릇에는 ‘맛집을 찾았다’는 성취보다, 하루의 일을 끝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한 만족이 담겨 있다. 조율사로서의 시간과 여행자로서의 발걸음, 그리고 식탁 앞에서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국수는 기록의 대상이기보다 삶의 리듬을 확인하는 매개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보다는, 어떻게 먹고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할 것인가를 조용히 되묻는다. 우리 식문화 3부작의 끝에서 <국수의 맛>은 가장 담백한 방식으로, 결국 가장 오래 남는 이야기 하나를 남긴다.
무리 가운데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희미하고 투명한 배경처럼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무리 사이를 배회하며 곁을 떠도는 ‘유령’ 같은 사람. 한국계 미국인 학자 그레이스 M. 조는 어린 시절 가족 식사 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요리한 음식을 먹을 때,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어머니를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의 희미한 존재감과 그의 과거에 대한 집안의 침묵, 저자의 십 대 시절 발병한 어머니의 조현병, 그리고 스물세 살에 처음으로 알게 된 ‘양공주’라는 단어. 그 순간 “나라는 사람을 있게 한 폭력의 역사와 난데없이 마주”친 저자는 “가족에 관한,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나를 받아준 나라, 그리고 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적 여정을 시작했다.
<전쟁 같은 맛>의 저자 그레이스 M. 조의 첫 번째 책. 저자는 저자의 어머니가 한때 미군 기지촌에서 일했고, 상선 선원으로 미군 기지촌 클럽 출입이 가능했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고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정체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재구성하여, 한국전쟁과 기지촌, 미국 이주 속에서 생성된 양공주의 트라우마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유령’으로 확장한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양공주가 한국전쟁, 기지촌 생활, 미국 이주를 거치며 어떻게 등장해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어떻게 삭제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삭제가 어떻게 유령을 생성했는지, 유령이 어떻게 산 자들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밝힌다. 아시아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동화가 잘 된 ‘모범 소수 인종’으로 평가받는 미국 내 한인 사회의 기저에 배회하고 있는, 누구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세상에 풀어놓는 책. 그 유령을 마주하는 일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