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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기억에 남는 여자아이의 나날이 있다. 허름한 아파트 단지를 넘어서면 동네 어른들이 고구마 농사를 짓곤 하는 밭이 있었는데, 그 밭을 가르며 난 좁다란 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면 녹이 슨 새빨간 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저 다리를 끝까지 건너면 죽는다는(우리는 '토요 미스테리'를 주말마다 챙겨보고 '오싹오싹 괴담' 같은 책을 통해 홍콩할매 괴담을 공유하던 어린이들이었다.) 소문을 만들었고, 우리는 꼭 위태롭게 선 빨간 다리 앞까지만 행진을 했다. 한 번도 건너지 못한 그 다리를 앞에 두고 우리는 손보미의 소설처럼, "흉곽이 조이는 느낌, 토할 것 같은 기분, 수치심과 굴욕감"(127쪽, <불장난>)을 느꼈다. 공통의 비밀을 가진 여자아이들은 입을 닫은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여자아이들은 어떤 것이 가능한지를 알 수 없기에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꾸준히 따라 걸으며, 작가의 변모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폭우>로 2012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소설 읽는 독자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 손보미는 그간 네 번이나 젊은작가상을 수상했고, 2022년 <불장난>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0년 출간한 장편소설 <작은 동네> 이후 이제 손보미의 세계는 일인칭 여자아이의 머릿속을 번역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울려오는 '오싹오싹'한 경고음. 동네의 유명한 미친 여자, 불법 시술을 하는 고모, 불륜을 저질러 엄마를 버린 아빠, 친구들이 중학생 오빠와 뽀뽀를 하는 장소라는 소문이 도는 숙직실, 납치를 당한 후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도는 어린 아이...
책만 보는 여자아이의 머릿속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손보미의 소설집을 읽으면 그때의 와글거림이 들려오는 듯하다. '함께 고무줄놀이를 하고, 다투고, 질투하고, 눈물을 흘리고, 억지를 부리는'(54쪽, <밤이 지나면>) 친구들을 낮추어 보면서도 그 세계에 속하고 싶은 욕망이 내는 소리. 그 수치스러움, 난처함, 배앓이. 기꺼이 '진짜 배신자'(246쪽, <해변의 피크닉>)가 된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그 여자아이 역시 우리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