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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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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를 타인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신분증, 신용카드 혹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게 해줄 또 다른 타인과 연결해주는 전화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만일 신분증도 없고 전화도 할 수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이런 설정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기억 상실이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소설 속 주인공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도 알 수 없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지은이는 이런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부분을 짚어나간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정말 나의 기억인가. 누군가 슬쩍, 정말 감쪽같이 다른 이의 기억을 주입해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끔 한다.

'존재', '정체성',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 등 다소 무거운 느낌의 주제를 담고 있지만 각종 음악과, 음식을 비롯한 문화적인 기호들은 읽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사뿐사뿐 옮겨준다. 뿐만 아니라 마치 SF 영화 같은 이야기 전개는 짜릿한 반전을 기대하게 하며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런 이야기가 어디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매일매일 움직이고 살아가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소설 속에는 광화문, 씨네 하우스, 코아 아트홀(반쥴 레스토랑), 2호선 시청역, 안국동 등 서울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친숙한 곳들이 배경으로 즐겨 쓰인다. 그리고, 도올 김용옥이나 이계진 아나운서를 주인공이 찾아간 장소에 우연히 등장하게 함으로써 마치 영화에서의 카메오 출연 같은 효과도 준다.

하지만 '디지털'이 주는 느낌, '사이보그'의 이미지 등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 내느라 넘쳐 난다. 그래서 그런 느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정보의 나열이 조금 절제되었다면 더 매끄러웠을 듯하다.

그리고 전반적인 구성에 있어서 자신의 기억을 찾게 되는 부분과 사슴벌레 문신에 얽힌 이야기 전개부분은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탄력이 떨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 김수진(2001-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