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가 날리는 거리에 기념비처럼 서 있는 건물, 황폐해진 채 버려진 건물 ‘팰리스’에 살고 있는 노인 후안 죽어가고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 청년이 찾아왔다. 후안은 방문자에게 자신이 죽으면 이곳에 남아 자신의 방을 넘겨받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때는 그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프로젝트까지. 거기에는 종이 조각, 신문에서 잘라 낸 기사들, 사진들, 손으로 쓴 메모들이 들어 있는 파일 폴더, 그리고 페이지 대부분을 시커멓게 칠해 지운 두꺼운 책 두 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적 변종들 : 동성애 패턴 연구>라는 이름의, 검은 마커로 덧칠해진 문장으로 가득 찬 책. 후안과 청년은 지워진 텍스트 사이로, 암전된 역사 위로,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오가며 삭제된 역사와 조각난 기억을 이어 가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잊힌 이름들이 드러난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퀴어 작가 저스틴 토레스의 2023년 전미도서상 수상작.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검열된 퀴어들의 목소리에 관한 아카이브 자료를 독특하게 재구성하고 있는 소설로, 실존하는 연구서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구는 20세기 초 퀴어 사회학자 잰 게이가 실제 퀴어들로부터 수집한 인터뷰를 담고 있었지만, 왜곡되어 퀴어들의 증언은 병리학적 진단으로, 욕망은 장애로 번역되었다. 암전된 사실, 강요당한 침묵을 대변하듯 이야기는 군데군데 비어 있고, 끊어지지만,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 청년과 후안의 삶이, 검게 덧칠해진 ‘연구’와 그 뒤에 숨겨진 한 이름이 되살아난다. 첫눈에 들어온 표지부터 손으로 느껴지는 질감, 본문 곳곳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덧칠해진 이미지들까지, 책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