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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에포크(Belle Epoque) 시대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사라 베르나르를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사랑’이었고 장 콕토에게는 ‘신성한 괴물’이었다. 오대륙을 누비며 활동한 그녀는 당대 최고의 뮤즈로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우리시대에도 줄리언 반스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사라 베르나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1844년 10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유대계의 고급창부였다. 그녀가 살아 있었을 때 아버지가 누군지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사라 베르나르는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등장했다. 1860년대부터 대중은 자신들의 우상이 찍힌 사진을 신문가판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세밀한 일상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사라 베르나르의 하루가 공개되었고 대중은 열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와 사회면보다는 가십에 사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 주인공인 사라 베르나르라면 더욱 그랬다. 일간 신문은 187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연극이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형태였기 때문에 연극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연극배우가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연간 1,200만 명의 사람들이 런던이나 파리, 뉴욕의 극장을 찾았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연극 무대를 관람했다.
오늘날 유명스타들이 전세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순회공연했듯이 사라 베르나르는 증기기관선을 타고 한 달 보름 만에 프랑스에서 미국까지 갈 수 있었다. 그녀가 생애 다섯 번이나 미국과 프랑스를 오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당시에 새로 발명된 증기기관선의 도움이었다. 또한 1860년대에 이미 철도는 미국 곳곳에 뻗어나가 있었고 사라 베르나르는 기차를 타고 시카고와 뉴욕 그리고 필라델피아 등의 대도시에서 공연했다. 루이빌이나 멤피스 같은 지방 소도시까지 투어목록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촘촘하게 연결된 미국의 철도 네크워크에 힘입었다.
20세기는 에드몽 로스탕의 신작(L'Aiglon)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1900년 3월 15일에 초연되어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타이틀롤로 250회 공연했고 그 후에도 미국 투어를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00년에 그녀는 햄릿 역을 맡아서 영화(Le Duel d'Hamlet)를 촬영했다. 1906년에 그녀는 당시 연인(Lou Tellegen)과 함께 아르망 뒤발 역을 맡아 또다른 영화(La Dame aux Camélias)를 촬영했다. 또한 루이 메르캉통이 감독한 영화(Elisabeth, reine d'Anglaterre)와 1913년에는 트리스탄 베르나르 감독의 잔느 도레(Jeanne Doré)를 촬영했다. 이 영화는 사라 베르나르 최고의 영화로 평가된다.
1905년 남미 투어 중 토스카의 마지막 장면인, 난간에서 뛰어내리다가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1915년에는 이 부분이 썩어들어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1916년에 마지막 미국 투어를 시작했고, 1년 6개월 동안 순회공연했다. 1918년 11월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곧 유럽 투어를 떠났고, 앉아서도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극작가 기트리의 새로운 작품인 <소설을 위한 주제>의 드레스 리허설 도중 그녀가 쓰러졌지만, 서서히 회복됐다. 1923년 3월 26일 파리의 자신의 집에서 아들의 품에 안겨 사망했다. 사인은 신부전으로 인한 요독증. 장례식에는 15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에 묻혔다.
회고록 출판
1907년 사라 베르나르가 회고록을 파리에서 출판했을 때 연극배우로서 그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이 회고록은 사실 1898년에 쓰여진 것이다. 그녀의 유년 시절부터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1881년 첫 미국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원래 그녀는 회고록으로 두 권으로 생각했다. 물론 두 번째 권은 쓰여지지 않았다. 이 책을 출판하고도 그녀는 42년을 더 살았다.
사라 베르나르가 회고록을 쓴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신문 같은 왜곡된 매체가 아닌 자신이 직접 대중을 향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고록에는 그동안 자신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한 신문기사나 공연평을 재수록하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회고록은 전체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쓰여져 있는데 보불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놓고, 100년 후에도 명성을 유지할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특히 작가 빅토르 위고와의 관계를 강조했는데, 그의 진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빅토르 위고가 그녀의 연극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 모양의 다이아몬드를 사라 베르나르에게 선물했기에 가능했다.
연극배우로서 사라 베르나르는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렸는데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그녀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를 지지했고, 페미니스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루이즈 미셸을 변호했으며 사형제도에 맞서 싸웠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알폰스 무하와의 인연
성 스테판의 날(12월 26일)에 무하는 르메르시에 인쇄소에서 친구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때 사라 베르나르의 지스몬다 포스터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르메르시에의 직원들은 크리스마스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무하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포스터는 1895년 1월 1일 아침 파리 전역에 게시되었다. 길고 좁은 모양, 은은한 파스텔 색상, 실물 크기에 가까운 인물의 고요함은 위엄과 절제의 느낌을 주었다. 포스터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는 알폰스 무하가 도맡아 작업했다.
사라 베르나르에 대한 찬사
“여성 연기자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나쁜 여배우, 좋은 여배우, 더 좋은 여배우, 위대한 여배우 그리고 사라 베르나르가 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가장 존경했던 세 여성은 사라 베르나르, 릴리 랭트리, 빅토리아 여왕이다.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기꺼이 결혼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사라 베르나르는 이상적인 삶의 비전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오, 야생 동물, 아름다운 표범의 매혹과 분노에 찬 가젤, 상처를 입은 채 흐느끼는 사슴처럼 한숨을 쉬는 그녀를 보고 듣는 것은… 사라 베르나르의 연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디.에이치 로렌스(D.H Lawrence)
사라 베르나라의 장례식 필름
1. 어린 시절 9
2. 기숙학교에서 17
3. 수녀원 생활 33
4. 새로운 시작 51
5. 새로운 시련 67
6. 나의 첫 극장 방문 79
7. 첫 번째 수업 99
8. 음악원 시험 107
9. 콩쿠르의 날 121
10. 코메디 프랑세즈에서의 첫 만남 147
11. 몰리에르의 집에서의 데뷔 165
12. 스페인 여행 181
13. 마르탱 극장에서 오데옹까지 201
14. 튈르리에서 229
15. 보불 전쟁 255
16. 오데옹 극장에서: 사라 베르나르의 구급차 269
17. 파리 포격 289
18. 대담한 여정 319
19. 파리로의 귀환 359
20. 빅토르 위고 377
21. 기억에 남는 만찬 385
22. 다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409
23. 페드르로서의 첫 등장 435
24. 알렉상드르 뒤마 457
25. ‘에르나니’, 풍선 여행 471
26. 코메디 프랑세즈가 런던으로 갑니다 491
27. 게이어티 극장에서의 첫 공연 515
28. 런던에서의 공연 525
29. 다시 코메디 프랑세즈 553
30. 첫 번째 미국 여행을 위한 준비 561
31. 덴마크 여행 579
32. 르아브르에서 뉴욕으로 597
33. 뉴욕 도착 613
34. 보스턴에서 645
35. 몬트리올의 그랜드 리셉션 657
36. 스프링필드/볼티모어/필라델피아/시카고 673
37. 뉴올리언스, 나이아가라 폭포 방문 701
38. 프랑스로의 귀환, 르아브르에서의 환영 735
사라 베르나르(1844년 10월 23일 ~ 1923년 3월 26일)는 벨에포크 시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의 연극 배우이다. 1870년대부터 유럽 무대에서 명성을 쌓았다.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여자 배우로 평가되었다. 그녀는 아르누보의 화신으로 군림했으며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알폰스 무하도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그리면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공군사관학교에서 불어 교관을 지냈으며, 이후로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셀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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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중생활, 사라 베르나르의 회고록 > 도서 1부
투자자 기명 엽서 삽지 (출판사 사정으로 사양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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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x225mm / 양장 / 720쪽 / 2023년 11월 28일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