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농담과 진지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사무원 문학의 기이한 조각들
독일 출판사 주어캄프의 문학 브랜드 인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로베르트 발저의 사무원 문학 선집이 미간행본의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된다. 『사무실에서』에는 발저의 초기작부터, 베를린 3부작이라 불리는 장편 『타너가의 남매들』 『조수』 『벤야멘타 하인학교』와 후기 베른 시절 작품들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스무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비좁고 초라한 공간인 사무실과 그 안에서 노동하는 평범한 사무원들은 발저가 생애 전반에 걸쳐 끈질기게 주목한 소재였다. 사소한 존재들을 관조했던 발저의 시선이 낯선 장소와 비근한 집단을 향하면서 발저 문학의 중요한 축이 형성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은행, 운송회사, 공장, 보험회사, 문서 작업실 등을 전전한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작품 속에 유머러스하게 녹여낸 발저의 문학 세계를 다채로이 조망할 수 있다.
시와 희곡과 단편 분량의 산문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대체로 각 글의 분량이 짧은 한편, 주제의 밀도나 선명성은 확연히 두드러진다. 발저의 기량이 단편, 특히 「툰의 클라이스트」와 「헬블링 이야기」 같은 작품에서 “눈부신 정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던 J. M. 쿳시의 평가와 맞아떨어지는 소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발저가 유희와 풍자 이면에 숨긴 사뭇 진지한 통찰들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컨대 발저는 부와 가난, 노동과 쾌락, 사무실과 자연, 복종과 명령 등 대립하는 요소들을 과장된 화법과 아이러니가 뒤섞인 문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마찰시켜 동시대성을 잃지 않는 신선한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시답잖은 농담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가도 금세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몰입하게 될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고 울림을 안겨주는 미미한 인물들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펼치는 몽상 같은 이야기
발저를 사랑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상찬에는 그가 창조한 인물에 관한 언급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만큼 발저의 인물들이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혹적인 유형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반(反)영웅적이고, 작고, 보잘것없고,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고, 광적이고 현란한. 그러나 이들 각각의 특성은 너무나 다층적이고 기묘해서 규정하려 드는 순간 재빨리 모습을 바꾸며 포획망을 빠져나간다. W. G. 제발트는 『타너가의 남매들』 영문판 서문에서 이들의 “익명적이고 덧없는 특성을 명확히 짚어내려 한 유일한 비평가”로 발터 벤야민을 언급한다. 벤야민은 1929년에 공개한 에세이 「로베르트 발저」에서 발저의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들은 광기를 지나온 인물들이며,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그토록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표피성이 각인되어 있다.” 발저의 인물들은 특출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사회나 집단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못 미치는 그야말로 무용한 인간에 가깝지만, 독자의 마음 구석구석을 헤집어놓는다. 여기 그려진 사무원 인물들은 그런 발저스러운 인물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발저의 표현에 따르면 20세기 초 사무원은 “우리 삶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좀처럼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 존재였다. 발저는 열네 살 때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은행에서 견습 사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사무원이라는 직군에 속한 이들의 특성을 예리하게 포착했고, 그들을 작품 안에서 해학적이고도 광기 어린 인물로 소묘해내는 데 성공했다. 과장된 행동과 제스처, 우스꽝스러운 대사 같은 발저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사무실의 엄격한 질서를 흩뜨리고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발저가 구현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헬블링 이야기」의 화자이자 「오전」과 「헬블링」의 주인공인 헬블링일 것이다. 헬블링은 지각을 일삼는 나태한 인물로 상사에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뻔뻔한 태도로 반항하는 데다 틈만 나면 몽상에 잠긴다. 그와 비슷한 유형으로는 시니컬한 태도로 고통을 해소하는 게르머가 있다. 게르머는 동료들에게 시달려 괴로워하고, 그 반응으로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 밖에도 걸핏하면 상사에게 대들고 질책받는 젠, 사무실의 작동 원리에 자신을 완전히 동화시킨 교활한 글라우저 등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러운 짓만 골라 하는 이들로 인해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가 일종의 몽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발저 인물들의 모습이 마냥 괴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연을 동경하고, 순진무구하고 어린아이 같은 면을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 가령 「조수」의 주인공 요제프 마르티도 주인인 토블러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거듭 자책한다. 그뿐 아니라 이 작품집에 나오는 화자나 인물들은 자신의 미미함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오히려 더 작아지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 하는 이 인물들은 ‘작음’의 미덕을 넌지시 드러낸다. 발저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무위와 쓸모없음의 가치를 입증해 보인다. 그것이 발저의 미학이자 문학적 본령이다. 권력과 쓸모를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는 인물과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저는 자신만의 기이한 문학 세계를 구축한다.
“발저 예술의 윤리적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거부다.” ― 수전 손택


오늘 만난 사람 중에 사무원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나에게 사무실이 있고 그곳에 책상이 있다면 나는 사무원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구인지 떠올릴 수 없지만 길을 걷다 스쳐간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의 사람을 모든 성격과 특징이 적당한 어떤 사무원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없고 평범한 듯하지만 부족함도 넘침도 없는 사무원들은 찾으려 들면 찾을 수 없고 연필을 들고 그 사람을 그려보려 하면 그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로베르트 발저의 인물들은 보잘것없지만 어디에도 없는 이 희귀한 영혼들은 언젠가 쓰고 버렸던 어느샌가 잊어버렸던 장갑이나 양말처럼 존재한다. 이들은 언젠가의 나의 한구석을 감싸고 있었으며 결국에는 나의 일부처럼 느껴지고야 마는 것이다.
― 박솔뫼(소설가)
여기 실린 사무원 문학은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을 통틀어 작가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텍스트들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품 활동 초기부터 후기 베른 시절까지 관통하는 사무원이라는 주제는 어느 면에서는 작가의 개인적인 삶과 가장 밀착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얻은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이 텍스트들 안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 번역을 마치고 나니 먼 길을 돌아 마침내 발저 작품의 정수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이전에 옮긴 작품집들에서는 여러 주제가 다양하게 뒤섞여 발저 문학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이 선집은 사무원이라는 특정 주제에 해당하는 텍스트들을 선별한 것이기에 짧은 분량 속에서도 주제적, 문체적 밀도나 선명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 안미현
사무원은 일자리가 있는 한 반쯤 신사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일자리를 잃는 순간 서투르고, 불필요하고, 성가시기만 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다.
― 사무원
설령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풍요롭게 산 셈이다. 그런 삶을 원했으니까!
― 애송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그에게는 지나치게 대담한 일이었다. 그는 가난할 운명이었고 낮은 것을 위해 태어났다.
― 가난한 남자
나는 아이든, 남자든, 가난한 여자든, 개든, 아니면 불쌍한 짐승이든, 병든 고양이든 의기소침하고 수줍어하는 존재들을 늘 사랑해왔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존재들에게 가장 깊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유대감을 느껴왔다.
― 가난한 남자
따라서 이 소박하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시인의 삶에서는 주로 온갖 사무실과 문서 작업실에서의 노동, 숱한 이직, 말하자면 대단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 다뤄진다. 여기서는 실제로 상반되는 것들이 중요하다. 사무실 업무와 풍경,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리를 내던지는 것, 따스하고 자유로운 자연 속을 유랑하는 일과 작업대라 불리는 사무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글을 쓰는 일, 자유와 구속, 해방과 속박, 궁핍과 필요와 절약뿐만 아니라 사치스럽고 뻔뻔하고 즐거운 낭비와 호화롭고 방탕한 향락, 고되고 씁쓸한 노동과 허송세월하며 그저 되는 대로, 편한 대로 살아 숨 쉬는 쾌락, 엄격한 의무 수행과 붉고 푸른 혹은 초록빛으로 물든 풍경 속을 유유자적 거닐고 산책하고 방랑하는 일 말이다.
― 시인의 삶
자기 자신과 타인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착각한다. 즐거운 사람은 즐거움에 대해 그리 크게 개의치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어디서나 행복을 만날 것이라 믿기 때문에 많은 행복을 기꺼이 마다할 수 있는 법이다.
― 에리히
복종과 명령은 서로 뒤섞이고, 예의범절은 주인과 고용인 모두를 지배한다. 나는 지금 이 글을 고용인의 자세로 내놓으며, 이것을 고려할 줄 아는 사람을 주인으로 간주한다. 내가 제공하는 것에 가치가 있을 가능성, 그걸 알아보는 안목을 그가 스스로 확인하고 만족해하기를 바란다.
― 주인과 고용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연모하는 대상을 높임으로써 품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이상을 우러러볼 수 없는 법이다.
― 판매원
고골, 멜빌, 디킨스, 스베보, 라베, 톨스토이, 카프카의 대표작들과 마찬가지로, 발저가 창작 시기 전반에 걸쳐 집필한 사무원에 관한 텍스트들 역시 근대 노동 세계의 규율화와 합리화를 선명하게 조명한다.
― 후기
그의 문학이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삼았던 만큼, 사무원으로서의 존재 방식은 그의 핵심 주제로 자리 잡는다. 발저의 초기 텍스트 중 하나인 짧은 시 「사무실에서」는 이미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이중성을 품고 있다. 사무실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삶의 전형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시인의 환상과 꿈이 시작되어 현실을 전유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 후기
사무실에서
사무원
오전
애송이
조수
게르머
헬블링 이야기
가난한 남자
시인의 삶
헬블링
비서
젊은 시인
에리히
8시
사무실은 무대다
주인과 고용인
어느 점원의 삶에서
병적인 것
판매원
이력서
후기(레토 조르크·루카스 마르코 기지)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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