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어떤 가을은 흐르지 않고, 문장이 된다
사소한 날들이 모여 완성하는 가장 구체적인 가을
각자가 통과해 온 계절을 일기에 담는 ‘계절일기’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 가을이라고 하면 흔히 단풍과 독서, 쓸쓸한 낭만을 떠올리지만, 이 책이 들여다보는 가을의 얼굴은 조금 다르다. 떠난 고양이의 사진을 다른 폴더로 옮기고,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고, 사랑했던 시간을 되짚는 사람들. 저자들은 익어 가는 일과 떨어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가을 한가운데서 기억과 상실, 사랑과 슬픔을 ‘일기’라는 가장 솔직한 형식에 담아낸다.
저자들에게 슬픔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을야구와 프로배구를 기다리고, 자몽청을 만들고, 책을 읽고, 산책하고, 음악을 듣는다. 거창한 해답 대신 작고 구체적인 일상으로 슬픔을 방어한다. 떠나보낸 뒤에도 기억하고, 상실한 뒤에도 다시 사랑하며, 나를 나답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가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도 오래 남아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해질 테다. 그리고 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그 기억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마다 심장과 책을 가깝게 두는 것일까.” 책을 엮으며 이 문장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고독과 우울이 한껏 농익어 심장 위로 쿵쿵 떨어질 때, 우리는 책을 가까이한다. 쓰는 이가 저 고독과 우울의 무게로 금이 간 심장을 내어 보이면, 읽는 이는 그 틈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자신을 포개어 본다. 우리는 모두 상실을 겪고도 살아가고, 떠나보낸 뒤에도 다시 사랑하고,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이들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나는 것은 아마도 이런 틈이 있기 때문일 테다.
“우리의 가을이 맘껏 금이 가길. 기도. 균열이 넓어져 길이 된다면, 우린 만날 것이다.” 익고, 떨어지고, 다시 남는 것들과 함께. 그랬으면 좋겠다.
―이현호(시인, 편집자)
그러므로 가을엔 언제나 심장이 최댓값으로 가동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연인 또는 연인으로 엮이고 싶은 자들에 대한 사랑, 이름 모를 자들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까지. 모든 것이 익고 또 떨어지는 계절. 나를 이루는 고독과 우울은 한껏 농익어 내 심장 위로 쿵쿵 떨어진다.
―최시온, 「가을은 심장의 최댓값」에서
가을이 오면 나는 또 뒤늦게 가을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 있을 거야. 특별히 가을다운 일을 하지 않아도 가을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을은 가을이니까.
―차유오, 「모두 지나간 뒤에야」에서
오늘 사진 폴더를 정리했다. 단이의 사진을 [남의 집 고양이 컬렉션] 폴더로 옮겼다. 그리고 애기 사진 또한 [고양이] 폴더에서 [남의 집 고양이 컬렉션] 폴더로 옮겼다. 겨울에 우리 집에 있던 고양이는 가을에 남의 집 고양이가 되었구나. 가을엔 털을 부풀리렴. 가을엔 새로운 식구와 베란다 밖 은행나무를 구경하렴. 가을엔 집 안 구석구석 따뜻한 바닥을 탐색해 두렴. [고양이] 폴더는 비어 있지만 그곳에 있었던 고양이를 여전히 나는, 잘 안다.
―김현아, 「폴더명 [남의 집 고양이 컬렉션]」에서
저녁이 되자 공기가 다시 조금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불쾌한 한기가 아니라, 나를 더 깊은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포근한 기운이다. 나는 창문을 닫고 방 안의 조명을 조금 낮췄다. 이제는 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빠르게 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무들처럼, 제자리에 굳건히 서서 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것.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의 무게를 확인하고 내면의 온도를 높여 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방식이다.
―나수람, 「고요가 머무는 10월의 서재」에서
활자는 빛이 새고 소리가 새는 그릇이다. 그러니 균열이 갸륵하길, 그 균열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그릇 안의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이 되길. 기도. 그러니 쓴다는 것은 맘껏 금이 가는 일. 우리의 가을이 맘껏 금이 가길. 기도. 균열이 넓어져 길이 된다면, 우린 만날 것이다.
―성동혁, 「시인의 말」에서
〈베티블루 37.2〉,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나쁜 피〉, 〈피크닉〉, 〈어둠 속의 댄서〉, 〈천상의 릴리아〉,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앞에 나열한 영화들을 매일매일 번갈아 보며 11월이 끝나면 좋겠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당신들은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 줄 건지 몹시 궁금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덜 구겨져 있을지 아니면 아주 구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을지.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이것도 저것도 해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소멸하는 쪽도 생각해 본다. 어쨌든 내 우울에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지. 오늘은 하필 내가 태어난 날, 삶은 후유증처럼 살아진다.
―김하늘, 「희박해지지 말자고」에서
사랑했던 것들의 흔적은 내 기억 속에만 있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 돌아오면 나는 다시금 선선해진 바람에 기억을 꺼내 놓고 천천히 펼쳐 본다. 색이 바래지는 않았나 지워지지는 않았나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리고 생각한다. ‘아, 그 계절이야. 안에서부터 천천히 익어 가는 계절!’ 그러면 나를 아끼던 마음이 답한다. ‘그래, 너에게 이 계절을 남기고 가길 잘했네’라고.
―김유이, 「유산」에서
여름이 되면 꿉꿉한 슬픔이 아주 느리게 오고, 가을이 오면 밀려온다. 더위에 눌려 있던 것이 단숨에 온다. 아마 가을에만 발권되는 기차표가 있는 것 같다. 가을은 딱 일 년 중 끝자락에 다다르기 직전이라서, 무사히 건너가려면 맨몸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힘들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마다 심장과 책을 가깝게 두는 것일까.
―강예린, 「가을에는 노을 속 바다를 기다린다」에서
아끼는 문장을 하나쯤 가진 사람을 좋아해. 언젠가 이런 대화를 했던 이는 누구였지. 분명 아끼는 사람이어서 이런 얘길 했을 텐데. 오랜 사물이 윤이 나듯 어떤 장면과 시절에도 윤이 난다. 좋아하는 문장들을 나누는 소모임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고. 감동하고 감응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어쩌면 함께 한 문장을 품고 집으로 돌아와 아끼는 밤을 뒤척여 보게 될. 그런 가을. 그런 가을밤. 그럼 슬그머니 살맛도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김용희, 「상강」에서
최시온
소설 쓰는 사람. 그리고 가르치고, 노래하며, 때때로 다른 이를 흉내 내는 사람. 다정을 잃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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