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유배지에서 서로를
숨 쉬듯 그리워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거센 파도도 깊은 수심도 막을 수 없었던
마음이 있었습니다.
검은 바다보다 더 깊었던 형제애,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편지들
혹독한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하다
특유의 깊이 있는 감성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 고정순 작가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모티브로, 편지글 형식의 그림책 《흑산》을 선보인다. 이 책은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옥으로 인해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멀리 떨어져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애틋한 소통과 우애를 다룬다. 거센 파도와 깊은 바다조차 막을 수 없었던 형제애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인 《자산어보》가 탄생하기까지의 정약전의 외롭고도 찬란했던 여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검은 바다 ‘흑산’에서 피어난 당대 최고 학문적 동반자들의 소통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총명했다. 반대파의 거센 상소와 천주교 관련 의혹 속에서도 정조는 이들 형제를 깊이 신임하고 보호했다.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로 서양 학문과 천주교를 탐구했던 형제는 ‘세상에 쓸모 있는 학문’을 갈망했다.
비극적인 운명으로 서로 다른 유배지에 갇혔지만, 이들의 소통은 끊이지 않았다. 편지를 통해 일상의 정감에서부터 학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담았다. 정약용은 둘째 형 정약전을 자신보다 학문적 깊이가 훨씬 뛰어난 인물로 존경했고, 두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 실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걸작들을 남겼다. 정약전이 끝내 동생을 다시 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정약용은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유일한 지기이자 형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흑산》은 정약전이 자신을 걱정하는 정약용의 편지에 화답하는 한 통의 편지 형식으로 짜여졌다. 편지 안에는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 가난하지만 순박한 섬사람들에 대한 애정, 비록 유배지에 갇혀 있더라도 배움에 대한 자세를 잃지 말자는 당부가 담겨 있다. 정약전은 우리에게 정약용의 형이나 《자산어보》의 저자로만 알려졌지만 이 책을 통해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동반자였던 정약전에 대해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가장 신뢰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그리워했던 형제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흑산의 바다를 가장 큰 책으로 삼은 정약전, 구원의 손길이 되어 준 형제애
정약전에게 흑산(黑山)은 두려움의 이름이었다. 섬의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이 두려워 흑산 대신 ‘자산’이라는 이름을 책에 썼을 정도다. 동생은 형의 두려움을 이해했고, 형은 동생을 걱정시킨 것이 미안했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동생은 늘 곁에 있는 것만 같았고, 신기한 것을 보면 가장 먼저 불러보고 싶은 것도 동생이었다. 바닷가에서 느리게 헤엄치는 치어를 보며 도성을 빠져나와 동생과 놀던 어릴 적 일을 떠올리고, 때론 사무치는 그리움에 유배의 억울함과 원망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동생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정약전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글을 동생에게 부탁한다. 정약전은 슬픔에 빠지는 대신, 흑산의 바다를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삼아 바다 생물들을 묵묵히 배우고 익혀 나갔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자산어보》다. 이 책은 정약전의 시간을 감동적으로 풀어낸다.
그림 없는 《자산어보》에 생명을 불어넣은 흑백 연필화
정약전이 남긴 《자산어보》는 총 226종의 해양 생물을 망라한 뛰어난 기록물이지만, 해당 생물의 그림은 없다. 고정순 작가는 《자산어보》에 담긴 정약전의 뛰어난 관찰력, 섬사람들과의 소탈한 교류가 담긴 문장에 주목하여, 이를 자신만의 깊이 있는 흑백 연필화로 채워 넣었다. 오적어(오징어), 상어, 날치, 치어 등 바다 생명체들은 작가의 연필 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정약전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흑산의 검은 바다와 그 바다 안에서 분투하며 살아가는 뱃사람들의 모습을 흑백의 선과 명암으로 담아낸 그림들은 이 책만의 묵직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완성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 다른 유배지에서
유배되지 않은 시간을 살고자 했던 두 예술가
고정순 작가는 다발성 통증 증후군을 오래 앓고 있다. 여행은커녕 간단한 외출조차 쉽지 않다. 그에게는 책이 곧 세상이고, 글과 그림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이다. 현실이 주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작가가 정약전의 이야기에 매료된 것은 필연이었다. 작가는 처음에 《자산어보》를 단순히 물고기에 관한 책이라 생각했으나, 작업을 거듭하며 이것이 유배지 안에서도 유배되지 않은 시간을 살고자 했던 한 학자의 치열한 노력임을 깨달았다. 정약전이 바다라는 공간에 갇혔다면, 작가 자신은 아픈 몸이라는 유배지에 갇힌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고난을 극복해 나갔다. 정약전은 뛰어난 관찰력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조선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을 펴냈다. 고정순 작가는 수만 번의 연필 터치로 정약전이 보았을 흑산의 세계를 재현해 냈다. 정약전이 사촌서당을 열어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듯이 작가 또한 파주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다양한 이웃들과 함께 배우고 소통하며 “자연의 흐름과 세상의 이치가 무관하지 않다.”는 연대의 가치를 몸소 배웠다.
고립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이 책은 저마다의 척박한 환경이나 한계에 부딪혀 고군분투하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하지만 강력한 위로를 건넨다. 비록 몸은 묶여 있어도 정신만큼은 하늘을 나는 새나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경계가 없다고 믿었던 두 형제의 삶을 통해, 우리가 보고 배우겠다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만의 멋진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수백 년 전 두 형제가 남긴 길은 이제 고정순 작가의 붓끝을 거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로 길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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