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아름답게 쓰이고 우아하게 논증된,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이자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법한 걸작”
★★국제 래넌 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닿지 않은 채로 이미 닿아 있는 세계에 관하여.
마술사와 시인의 영혼을 지닌 생태철학자가
서로를 얽고 지탱하는 감각의 영역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 지적 역작.
“상상되기는 했어도 서술된 적은 없는” 획기적인 사상으로 생태 담론과 인간 삶의 철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데이비드 에이브럼의 대표작 『감각의 주술』이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다. ‘철학자이자 마술사’라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게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그는 대학 시절 내내 클럽과 식당 등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유럽을 떠돌며 거리의 마술사로 활동하기도 한 흥미로운 이력을 지녔다. 이후 민간의학과 마술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작용 등을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 학자이자 마술사로서 발리, 네팔 등의 오지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토착민은 물론 샤먼, 치료사, 예언자 등, ‘경계에 있는 존재들’과 깊이 교류했으며, 이들이 어떻게 살아 있고 생동하는 세계에 참여하고 관여하는지 직접 목도했다. 그는 ‘감각’이야말로 ‘세계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임을, 감각의 망각은 곧 세계의 위기임을 깨닫게 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발리 샤머니즘, 언어의 풍경, 인간-너머 세계의 신화, 마술사들의 이야기, 하이데거의 시간론…. 이 책의 시적이고 유려한 문장들은 겉보기에는 무관해 보이는 여러 사상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기발하게 엮어 근사한 하나의 그림으로 제시하며, 우리 몸과 살로 엮이며 직접 살아지는 세계를 눈앞에 생생히 펼쳐낸다. “분류에 저항하고 틀에 박히지 못하는” 『감각의 주술』은 출간 직후부터 막스 욀슐래거, 제임스 힐먼, 린 마굴리스, 게리 스나이더, 크리스토퍼 메인스, 하워드 노먼 등 세계 유수의 학자들에게서 “시적 열정에 지적 엄밀성과 대담함이 결합한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30년이 넘도록 철학, 환경, 예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계와 수업에서 사랑받았다. 또한 존 버거, 리베카 솔닛, 아룬다티 로이 등 세계적 지성들에게 수여된 권위 있는 상인 국제 래넌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인류가 현재 마주한 크고 복잡한 문제들은 “온통 추상에 사로잡힌 채, 오직 우리 자신만을 되비추는 인위적인 기술들에 주의를 빼앗겨 자신이 인간-너머의 감각과 감성의 매트릭스에 육체적으로 속해 있음을 너무나도 쉽게 잊는 탓”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철학과 마술을 넘나드는 전례 없는 매혹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삶을 변화시킬 새로운 관점의 씨앗을 심어주는 주술을 행한다. 또한 이 책의 진가는 시적이고 유려한 문체가 주는 울림과 명료하고 엄밀한 그의 철학적 논증이 만나 선사하는 기묘하면서도 따뜻한 순간들에 있다. 그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루고 지탱하는 모든 비인간과 접촉하고 감각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는 오직 인간이 아닌 것과 접촉하고 어울릴 때라야 인간이 된다. 기술 발전과 환경 윤리가 날이 갈수록 첨예하게 대척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주의와 감각을 빼앗아가는 수많은 사물에 둘러싸여 있다. 이 책은 주위를 둘러싼 풍경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인류에게 “기운이 들끓는” 마술 같은 순간을 선사할, 이 시대에 가장 널리 읽히고 토론되어야 할 책이다.



이야기는 밤하늘의 별과 반딧불이가 수놓은 눈부신 은하수 속에서 저자가 경험한 황홀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 유독 대자연과의 조우 앞에서 우리는 세계의 실존을, 혹은 삶의 덧없음을 몸서리치게 느끼는 걸까요? 책에서는 바로 그 순간들을 일컬어 “느낌이 오는 이야기”라고 표현하는데요. 저자는 이 ‘느낌적인 느낌’이 대체 무엇인지, 헛된 망상이 아니며 얼마나 오래 우리와 함께 세계를 이뤄왔는지 말해주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가 이 느낌이라는 것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데려오는 학문은 현상학이라는 철학입니다. 이 책만큼 (그 어렵고 난해하기로 소문난) 현상학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온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교정을 하는 내내 꼭 추상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술과 철학에 능통하던 저자가 생태학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우아한 논증을 통해 명료하게 밝혀질 때는 말로 다 표현 못 할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아마 잠시 ‘느낌’이라는 것을 맛보았던 것 같습니다.
발리에서 도심으로 돌아온 저자가 금세 감각의 통로를 잃었듯, 저 역시 환경 보호를 외치다가도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편리함에 기대 고의로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겠고요. 이제는 흔한 뉴에이지스러운 영적 이야기로 치부되는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지겹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현대 사회에서 인간-너머 세계를 살아 있는 상호 주관적 세계로 인식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오랜 세월 감각과 감정이 없는 기계적인 객체로서, 보호해야 하는 타자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말 그대로 ‘무능력한’ 상태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인간이 맞닥뜨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저자의 고군분투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술사의 손에서 동전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작은 찰나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마술을 완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이 시선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순간에 있다는 것이죠. 세계는 나의 참여로 돌아간다는 깨달음이 이토록 쉽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책은 단언컨대 일생에서 몇 번 만나지 못할 거예요.
생태학 책이 삶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뻔한 질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왜 우리가 ‘나’를 넘어선 세계와의 친밀감을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도 합리적인 답변을 기어코 여러분께 안겨줄 것입니다.
주술사란 지상의 다른 힘들과 접하고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자신이 속한 문화를 규정하는 지각적 경계—이는 사회적 관습과 금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공통 화법과 언어를 통해 강화된다—를 쉽게 벗어나는 능력을 지닌 자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술은 인간-너머의 장이 보내는, 의미로 가득한 노래, 울음, 몸짓 등의 부름에 대한 고도의 수용력이다. 그렇다면 아마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마술은, 다중 지성으로 구성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경험일 것이다. 즉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형상—머리 위를 스치는 제비나 풀잎에 앉은 파리, 그 풀잎 자체에 이르기까지—이 스스로 경험하는 하나의 형상, 비록 우리의 것과는 다르지만 각각 고유한 성향과 감각을 지닌 실체라는 직관이다.
내 연구 방향을 전환하게 한 인도네시아와 네팔 농촌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인간적 자연을 서구에서의 일반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미묘하게 지각하고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 너머의 실재에 대한 고도의 감수성, 즉 이러한 많은 문화에서 드러나는, 다른 종들과 대지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또 무엇이 내 인식을 크게 변화시켜 스스로가 속한 문화의 양태에 짓눌리고 결핍된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을까? 아니, 거꾸로, 왜 현대 서구에서는 이러한 배려심이 부재하게 되었을까? 서구 문화도 토착적인 기원을 지녔는데 말이다. 만약 토착문화에서 나타나는 자연과의 긴밀한 연결이 좀 더 원초적이고 참여적인 지각 방식과 관련 있다면, 어떻게 서구 문명은 그런 감각적 상호성에서 이토록 멀어졌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종들의 존재에, 그들이 깃들어 사는 생동하는 풍경에 대해 이토록 눈멀고 귀 먼 상태가 되어 이제는 무심히 그들을 파괴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마치 마술사처럼, 또는 다른 부족 틈에서 살다 보니 더는 원래 속한 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문명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절반은 자기 공동체의 내부에, 절반은 바깥에 머물며, 도시의 매끈한 거울 벽들 너머에서 날고 기는 변화무쌍한 목소리들과 소란한 형상들에 자신을 열어놓는다. 더 나아가 거기서 벽들을 따라 움직이면서 이것이 어떻게 세워졌으며 이 단순한 가림막이 어쩌다 장벽이 되었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 확실한 단서를 찾으리라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기가 잘 맞을 때만. 그가 자주 머무는 그 변두리가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가장자리이며, 그것이 경계 짓는 시간적 구조가 막 해체되려 하거나 또 다른 무엇으로 변신하려는 찰나에만.
예를 들어 내가 오른손으로 은화를 몇 차례 휘두르고 돌리다가 갑자기 손 뒤로 옮겨 두 손가락 사이에 동전을 끼워 숨겼다고 해보자. 그러면 관객들의 눈에는 더 이상 동전이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내가 왼손을 허공으로 뻗어 손에 숨겨두었던 은화를 보여주면 관객들은 무척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길 것이다. 한 손에서 동전이 잠시 숨겨진 사이에 다른 손에 숨겨놓았던 동전이 나타났다는 것이 가장 명백하고 합리적인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렇게 보지 오히려 하나의 동전이 오른손에서 사라졌다가 보이지 않게 허공을 가로질러 왼손에서 다시 나타났다고 볼 것이다! 지각하는 몸은 논리적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물을 더 온전히 보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며 세계의 활동에 사교적으로 참여한다. 동전의 보이지 않는 여정은 감각들의 무분별한 창조성에 의해 상당히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마술사는 물체의 변신을 돕도록 우리를 유도한 다음, 우리 스스로 창조해낸 것에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연구에서 지각은 바로 이와 같은 상호성, 내 몸과 이것을 둘러싼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 이어지는 교류다. 내가 사물들과 이어가는 일종의 고요한 대화, 나의 언어적 인식의 저 아래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대화다. 심지어 나의 언어적 인식과는 펼쳐지는 경우도 많다.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손이 이 원고들과 탁자 저편의 커피잔 사이의 공간을 쉽게 오갈 때라든지, 집 뒤편의 산비탈을 오르는 동안 언어적 의식이 이런저런 경사 변화에 맞춰 걷는 방식을 조정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두 다리가 알아서 대응할 때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나무의 거친 표면을 만지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촉각성을 경험하는 것, 나무 만져지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것 또한 가시적인 자신을 경험하는 것, 보이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정신이 사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건 분명하다. 사실 그 무엇도 경험할 수 없다. 오로지 몸으로서의 우리가 감각될 수 있는 장 안에 속해 고유의 질감, 소리, 맛을 지녔기 때문에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 즉 만지고, 듣고,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이 지각하는 바로 그 감각될 수 있는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장기이며, 그 살로 이루어진 살이며, 세계는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지각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거머리남자가 이쪽저쪽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는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나는 여기서 이것을 하겠다. 좋은 자리니까. 여기에 자리 잡고 영원히 머물겠다.” 물고기를 먹고 있던 나베르그-가이드미가 “넌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머리가 되는 중이고, 한 자리에 머물 것이다. 나는 바위가, 작은 바위가 될 것이며, 납작한 머리, 낮은 머리를 갖고 여기에 머물 것이다. 나는 거머리 드장, 거머리꿈꾸기다!” 그는 “나는 거머리다!”라고 말했고,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앉는다. 흐르는 이 개울은 내 것, 내가 머무는 곳이다. 나는 드장이다. 꿈꾸기다!”>
이처럼 각 조상은 깨어 있는 동안 여기저기 여행하다가 그 과정에서 특정한 사건과 마주침을 겪고 장소나 지각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구불구불 남긴다. 이 여정은 조상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일면으로 완전히 변신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장소에서 막을 내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세 신화와 달리, '꿈꾸기'는 완결된 사건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해석한 ‘빅뱅’처럼 머나먼 과거에 단 한 차례 발생한 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지속되는 과정이다. 막 시작된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충만하고 깨어 있는 실재로, 비가시성에서 가시성으로, 비밀스러운 침묵의 심부에서 또렷한 노래와 말로, 세계가 끝없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호주 토착민들이 이 우주적인 개념의 영어 번역어로 ‘꿈꾸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꿈을 꾸는 일상 행위가 씨족 조상들의 시간에 직접 참여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 시간은 완전히 다른 어딘가에, 지각될 수 있는 현재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오히려 평소 우리가 꿈에서 겪는 삶과 의식적인, 혹은 깨어 있는 경험의 관계처럼, 꿈꾸기도 우리를 둘러싼 대지의 개방된 현존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일종의 모호하면서도 계속 변화하는 깊은 차원이다.
하지만 알파벳계 문자는 추상적, 균질적 ‘공간’만이 아니라 추상적, 선형적 ‘시간’이 부상하는 데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토착적 구전문화에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끊이지 않는 흐름은 지극히 순환적인 성격을 띤다. 구전문화 민족들의 감각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땅에 익숙하며, 여전히 바람과 숲속 새들이 들려주는 표현력 넘치는 발화에 친숙하며, 여전히 감각적인 우주에 참여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시간은 순환하는 해와 달의 생애, 계절의 반복, 동물의 죽음과 재탄생, 즉 되살아나는 지구의 영원회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흥미로운 서술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하이데거가 묘사한 시간의 개념적인 구조와 우리를 둘러싼 풍경의 지각적 구조가 명백히 서로 대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지평 그 자체다! 하이데거는 “지평”이라는 용어를 구조적 은유로 삼아, 시간의 탈자적 본질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다. 시간의 힘이 지각 가능한 현재로 하여금 언제나 열려 있고, 언제나 이미 자신을 넘어 펼쳐져 있게 하듯이, 머나먼 지평도 지각 가능한 풍경을 열어놓으며, 풍경을 언제나 그 너머에 있는 것과 이어놓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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