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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탄생 100주년 기념, 미발표 유고시 47편을 엮은 유고 시집 최초 출간!
살아 있으므로 쓸 수밖에 없었던 말들
너무 솔직해 세상에 내보이기 어려웠던 고백의 기록
1990년대, 대하소설 『토지』의 최종장인 5부를 집필하던 시기다. 원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박경리는 노트와 원고지 위에 하루하루의 삶을 적어 내려갔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문단의 평가나 독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에 가깝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작품은 생전에는 세상에 내보이지 못했다. 그중 47편의 시들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세상에 내놓는다.
시대와 역사, 가족과 고통, 자연과 생명에 대한 박경리의 시선은 담담하고 솔직하다.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며 토해내듯 적어 내려간 고백이 있는가 하면, 원주에서의 시골살이에서 느낀 소소한 기쁨과 무료함, 시대를 향한 분노와 체념, 그리고 그가 살아오며 스쳐 지나온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짧고 간결한 시의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거대한 서사를 쌓아 올리던 작가의 저력은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매일의 삶을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해온 성실함, 날것의 언어를 끝까지 붙잡아 시로 제련해온 끈기가 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박경리를 사랑하고 그의 문학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해 박경리 작가의 말맛과 숨결이 담긴 향토어와 구어체를 오롯이 살려 세상에 내놓는다. 더불어 저자의 육필 원고를 함께 실어 집필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사진으로 받아든 노트의 상단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1996년 9월 10일 새벽. 어떤 페이지에는 날짜가 있고, 어떤 페이지에는 없었습니다. 단번에 써 내려간 듯 고요한 장이 있는가 하면, 줄과 동그라미, 교정 부호로 수정 흔적이 많은 장도 있었습니다.
작가의 노트를 읽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거기에는 아직 식지 않은 마음의 온기와 숨의 흔적이 있습니다. 기분, 몸의 상태,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 글씨들이 한 사람의 하루와 하루가 어떻게 문장이 되었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생애 동안 수많은 소설을 쓰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으로 이미 자신의 시 세계를 남겼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들이 오랫동안 노트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 조용한 언어들을 세상으로 불러냅니다.
선생님은 지난한 한국 근현대를 소설로 그려왔고, 수없이 많은 인물과 서사를 통해 시대와 인간을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러한 서사의 뒤편에서, 끝내 밖으로 꺼내놓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인 말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적어 내려간 기록에 가깝습니다. 반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급해지는 필체, 지우고 다시 쓴 흔적들 속에서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상태로 남고, 삶은 끝내 꾸며지지 않은 채 자신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 얼굴과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강한 생명력으로 아픔을 감수하는 대지 같은 작가의 거친 단어들 속에서 우리 안으로 스미는 생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다산북스 편집부 최찬미
할머니(박경리)는 언제나 시를 쓰며 그 무엇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셨습니다.
그 표현에는 어떠한 성역도 없기에 가장 인간적이며 거룩합니다.
저는 이 슬픔을 나누는 것이 할머니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이 작가 박경리가 한 인간으로서 어떤 시간을 지나고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_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서문
1부 동춘
사람 / 가엾은 것들 / 고향 항구 / 동춘 / 개미 / 찰나의 별 / 노을로 물든 강가 / 삼가람길 / 봄
2부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태풍 / 물망초 /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 길 / 예감 / 서둘지 말게 / 문학 / 돌깔기
3부 어찌 이다지도 말씀이 없으시오
사물이 된 마음 / 자유 / 비밀의 독 / 기다리는 자의 승리 / 산다는 슬픔 / 어찌 이다지도 말씀이 없으시오 / 혼자 밥 먹기 / 꼴불견 / 취하는 것
4부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한 속의 무한 / 적대 관계 / 불안 / 현실 사용법 / 무신론자 / 노동의 이유 / 옷 / 무게 / 욕망 / 새벽 / 문명 /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5부 내 가까이 있는 사람
밤새 / 자연의 영 / 우리 집 고양이 / 양식 / 기다리는 어둠 / 발걸음 / 검정고양이 / 내 가까이 있는 사람 / 속살
푸른 가스등이 소리를 내며 탄다
소금끼 먹음은 바닷바람
방천을 치는 물결 소리
입항하는 뱃고동은 길게 길게 작별인 양 만만인 양
상봉인 양 꼬리를 물고
아아 그게 언제였더라
갯내음 실은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입던 시절
순사가 샤벨을 절거덕거리며 지나가던 시절
_「동춘」 중에서
은빛 섬광으로 휘번득이며
고기가 노닐고
해초 나른하게 꿈꾸듯 춤추었다
환하게 드려다보이던 남쪽 바다
내가 태어난 항구
조그마한 통통배 타고
섬으로 갈 때
물살에 손 담가보고
바다의 바닥을 내려다보고
하얀 등대 떠 있는 곳
용궁 생각을 했었지
멀리 가까이
연인같이 오누이같이
다가서고 물러나는 섬,
순박한 사공 아저씨
환하게 웃던 얼굴
지금은 모두 전설이다
_「고향 항구」 중에서
오랜 세월
혼자 밥 먹으며 살았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누구랑 함께
밥 먹는 것이 불편하다
쓸쓸한 것이 나의 밥맛이기 때문이다
_「혼자 밥 먹기」 중에서
창가에 앉아
해 지는 것을 보며 문득
먹물 같은 안개가
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황혼보다 한발 앞서서
스며든다
아득한 날들이
소리 죽이며 다가온다
그리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_「어둠을 기다리며」 중에서
박경리 탄생 100주년 프로젝트. 한국 문학사의 거장이 삶으로 오다
미발표 유고시 47편을 엮은 유고 시집 최초 출간!
“문학은 아득한 하늘, 별과 같은 곳을 향해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하고
땅 위에서 곡식을 심어 먹는 일이다.”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데뷔해, 26년에 걸친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사의 거대한 이정표를 세운 작가 박경리.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수많은 작품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 박경리’의 마지막 언어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번 시집은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미발표 유고시 47편을 엮은 유고 시집이다.
박경리는 우리에게 소설가로 익숙하지만, 생애 동안 2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소설가 등단보다 1년 앞선 1954년, 상업은행 행우회 사보 《천일》에 발표한 「바다와 하늘」이 그의 첫 발표작이었다. 이후 『못 떠나는 배』를 시작으로 『도시의 고양이들』, 『자유』,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까지 총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문학의 시작과 끝이 모두‘시’였다는 점에서, 박경리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읽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
“홍수같이 눈물 쏟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슬픔이 우주만 한들”
살아 있으므로 쓸 수밖에 없었던 말들
시로 남긴 삶의 기록
그는 소설을 발표하며 언제나 시를 썼다. 『산다는 슬픔』에 수록된 유고시들은 『토지』의 최종장인 5부를 집필하던 1990년대에 주로 쓰였다. 고향 원주에서 박경리는 노트와 원고지에 하루하루의 노래를 적어 내려갔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문단의 평가나 독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에 가깝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시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 조용한 기록들 가운데 47편을 추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침내 독자앞에 내놓는다. 제목이 없는 시에는 작가의 외손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세희 씨가 할머니의 생과 작품 세계를 다시금 숙고하며 가제를 붙였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시대와 역사, 가족과 고통, 자연과 생명에 대한 박경리의 시선을 담담하게, 그러나 숨김없이 드러낸다. 삶을 되돌아보며 토해내듯 적어 내려간 고백이 있는가 하면, 원주에서의 시골살이 속 소소한 기쁨과 무료함, 시대를 향한 분노와 체념,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짧고 간결한 시의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홍수같이 눈물 쏟을 수 없는 일 아닌가 / 슬픔이 우주만 한들 / 떠들고 웃고 춤을 추어도 / 마냥 그럴 수만은 없지 / 강변에서 불덩이 같은 해가 솟고 / 또 쓸쓸히 달이 떠오르는데
― 「사람」 중에서
은빛 섬광으로 휘번득이며 / 고기가 노닐고 / 해초 나른하게 꿈꾸듯 춤추었다 / 환하게 드려다보이던 남쪽 바다 / 내가 태어난 항구 / (…) / 멀리 가까이 / 연인같이 오누이같이 / 다가서고 물러나는 섬, / (…) / 지금은 모두 전설이다
― 「고향 항구」 중에서
인생살이 험난한 속에서도 / 쉬어갈 때가 있다고들 한다 / (…) / 때로는 순간이 / 편안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것은 / 암흑 속에서 타는 촛불이거나 / 칠흑 같은 밤 / 빛나는 별 하나이기 때문이리라
― 「찰나의 별」 중에서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일본산고』 『Q씨에게』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약이 되는 세월』 『생명의 아픔』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등과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 신인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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