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첫 번째 평전이자 마지막 출간작
수천 통의 편지를 검토해서라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우정
위대한 비평가이자 외면받는 화가, 만인의 친구이자 지독한 외골수
파편을 모아 복원해낸 로저 프라이라는 입체의 인간
한 사람의 모든 면을 이해하기란 몹시 수고스럽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은 대개 한 가지 모습으로 인식된다. 모순되는 이미지는 쉽게 주의를 벗어나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부정당한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집요함, 그리고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필요하다. 『로저 프라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그런 집요함과 애정을 잉크 삼아 집필한 평전이다. 로저 프라이라는 타인을 활자로 재구성하기 위해 그녀는 온갖 기록을 파헤쳤다. 로저 프라이의 비평과 저서는 물론 그가 직접 쓴 편지와 그에게 온 편지, 그의 지인이 다른 지인에게 보내며 로저 프라이를 언급한 편지, 조롱 섞인 신문 기사와 그에 대한 로저 프라이의 반응이 담긴 편지까지.
각고의 노력 속에 로저 프라이는 점점 더 생생한 모습으로 빚어진다. 20세기 초 왕성히 활동한 비평가이자 자신의 재능에 평생 열등감을 느낀 화가로. 모두에게 환영받은 유명 인사이자 모두가 함께 일하기를 기피한 독선가로, 가정적인 아버지이자 아버지에게 근심을 안긴 소년으로, 미술계의 최고 권위자이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해야 했던 노동자로. 객관적인 기록과 주관적인 서술이 한데 모여 살과 피를 구성해내며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독자 앞에 나타난다. 시작은 물론 유년 시절이다.
엄숙한 집안과 자유분방한 정신
로저 프라이는 1866년 12월 14일, 영국의 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만 엄격한 가정이었다. 퀘이커교의 전통에 따라 퀘이커교도끼리 결혼한 그의 부모님은 배우자를 선택한 방식만큼이나 엄격한 윤리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갑자기 윤리적인 죄책감에 빠지게” 하곤 했고, 어머니는 “얼굴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게끔 아이들을 양육했다. 그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아이들이 퀘이커교의 교리에 알맞은 과학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로저 프라이는 이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켜주었다. “폭력에 대해 병적인 공포”를 안긴 서닝힐의 학교에서, 그리고 “방학까지 남은 몇 주, 며칠, 심지어 몇 초까지 시간을 잴 정도로” 지루했던 클리프턴의 학교에서 언제나 1, 2등을 다투었으며 특히 과학에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인생 궤적은 대학교에서 완전히 뒤바뀐다.
케임브리지는 그가 이전에 겪었던 그 어떤 학교와도 다른 곳이었다. 멋진 친구들이 가득했고, 언제라도 흥미로운 토론을 벌일 수 있었으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식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미들턴 교수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동방의 마술사처럼 두툼한 실내복에 스컬캡을” 쓰고, 페르시아 타일이나 렘브란트의 원작처럼 “너무나 놀라운 것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로저 프라이는 그에게 매혹당했고 자극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진정한 소질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고 로저는 아버지의 근심을 부채질한다. “얼마나 실망스러우실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보아도 이것이 제가 진정 해야 하는 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퀘이커교 집안의 가풍이었다면 예술은 “금지 대상”에 가까웠다. 그와 부모님 사이에 끝없는 갈등이 불붙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럼에도 로저는 평생 이 결정을 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예술활동이 시작된다.
위대한 비평가이자 외면받는 화가
로저 프라이는 쉬지 않고 일했다. 원인 모를 내부 통증에 몇 년째 시달린 끝에 고려했다는 것이 “심지어” “일주일쯤 쉬는 일”이었을 정도다. 『아테네움』 지에 비평을 싣는 걸 시작으로 케임브리지 등 대학에서 미술 강연을 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뉴 잉글리시 아트 클럽(NEAC)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작품의 진위를 감정했고 저서를 집필했으며 그 밖에도 벽화, 초상화, 인테리어 작업 등을 닥치는 대로 해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활동은 단연 후기 인상주의의 창시일 테다. 1910년, 그는 자신만의 미학을 바탕으로 ≪마네와 후기 인상파≫ 전시를 개최했다. 세잔과 피카소, 마티스, 쇠라, 반 고흐, 고갱 등을 발굴해낸 전시였다.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그림들이 “터무니없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유치”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드로잉 실력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일고여덟 살 어린이 수준”이고 “기법은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나서 석판에 문질러 닦는 남학생의 짓”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대중과 화가, 비평가를 가리지 않고 비난이 쏟아졌고, 로저 프라이는 졸지에 “세련되고 존경받는 예술 안내자에서 “믿을 수 없이 경박하고 좋게 말해서 머리가 살짝 돈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말을 안다. 전시는 결국 대중을 설득해냈고, 소개된 화가들은 불멸의 거장이 되었다. “당대의 기호가 한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그 변화는 로저 프라이가 이끈 것이다”라는 케네크 클라크의 평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비평가로서 이토록 빛나는 성취를 일궈낸 것과는 달리 그의 그림 작업은 언제나 난항이었다. 미술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회의감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퀘이커적 양육 방식이 무의식을 지나치게 억압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미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는 “토론을 할 때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하다못해 친구의 집에 걸어놓을 만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다른 이들은 그의 그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결국 스케치 몇 점만 겨우 팔린 어느 개인전이 끝난 뒤 로저는 “다시는 개인전을 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림은 계속 그렸으며, 매우 느리지만 조금씩 자신감을 획득한다.
만인의 친구이자 지독한 외골수
로저 프라이의 평전에서 그가 예술사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이다. 그에게는 수준 높은 강의를 즉석에서 펼칠 만큼의 지성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랄한 유머 감각을 갖추고 있었고, 예술가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주기 위해 극심한 노동을 자처할 만큼 마음씨가 따뜻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친구가 되었다. 첫 번째 우정이었던 맥태거트부터 로우스 디킨슨, 조지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 그리고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은 많은 이들까지. 그의 목소리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하길 그에게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어디서 물려받은 재주인지는 몰라도 말할 때 사실과 감정을 동시에 전달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실로 대단해서 “화를 내는 모건을 설득해 (…) 1000파운드를 기부하게” 만들기도 하고, 로저 프라이라면 치를 떨었던 교수조차 그가 “아주 매력적인 남자”라고 인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몹시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생각이 “이성적으로 납득될 때까지” 시험하길 반복했고, 그 때문에 종종 주변인을 괴롭게 했다. 이런 태도는 일을 할 때 더 두드러졌다. “계획을 짜고 실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독선적이고 무자비했다”. “극단적으로 비사업적”이었고 “넓은 의미에서 완전히 사심이 없었다”. 이를테면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데만 몰두해 문서 기록 없이 계약을 체결하곤 했다. 체계적이지 못하고 강압적인 그의 태도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와 일하길 기피했으며, 그중 한 명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솔리니나 히틀러, 스탈린이 죽은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울프는 그런 그의 이면 역시 표백 없이 전달한다. 그로써 로저 프라이에게 빛을 드리우며 그림자가 지게 만든다.

아마 ‘로저 프라이’보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에 이끌려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고를 처음 받아 든 저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당대 최고의 모더니즘 작가가 남긴 마지막 출간작이라니. 심지어 평전으로서는 이것이 유일하다니! 도대체 어떤 우정을 쌓으면 친구의 평전을 500쪽 가까이 집필할 수 있을까요? 로저 프라이는 또 어떤 사람이었기에, 평생 전기라고는 코커스파니엘을 주인공으로 한 『Flush: A Biography』밖에 쓰지 않은 울프에게서 이런 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습니다. 책에서 저는 범상치 않은 소년을 발견했어요.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빙판 위를 걷듯 조심스레 성장한 소년을, 그러면서도 그런 가풍에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던 소년을요. 따분한 학창 시절을 지나 케임브리지를 수석으로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미래는 과학을 향해 열려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로저는 돌연 예술의 길을 택하죠.
평전은 그가 부모님을 떠나 여행을 떠나는 장면으로, 그렇게 방문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정경으로, 영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로저에겐 무엇이든 관심 있게 쳐다보는 호기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어떤 일에든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명랑함이 있었죠. 덕분에 그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모습 때문에 도둑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프라이라는 이름이 너무 짧다며 실제 이름인지 의심”받고, 그래서 “관리를 찾아가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고,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숙박비를 선불로 계산”하기도 해야 했던 고된 여행길에도 “토스카나 농부들의 호의적이고 친절한 태도”에 감탄하며 싱글벙글할 수 있었습니다. 울프는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어조로 그의 활동 하나하나를 주목해요. 예술계에 막 발을 들인 그가 잡지에 비평을 싣기 시작하더니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유명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임명되고, 마침내 “반역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될 때까지요.
‘예술’이 그의 삶의 한 축을 이룬다면 다른 축은 물론 ‘우정’입니다. 로저는 많은 친구를 사귀어요…… 정말 많은 친구들을요. 그처럼 지적이고 반골 기질이던 케임브리지의 친구들은 “좌중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 결정론의 윤리적 한계에 대해 토론”하는 이들이었어요. 로저가 먼 미국으로 일을 하러 간다는 얘기에는 “난 예전부터 악당은 천국에 보내서 끝없는 지루함 속에 갇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자네도 그런 운명을 현세에서 맛보게 될지도 몰라”라며 따뜻한 질투를 전했죠. 한편 대학 바깥에서도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만난 예술가는 물론 그림의 감정을 의뢰한 몰락 귀족, 여행지에서 함께 식사한 커플, 그냥 길에서 마주친 사람까지 누구나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예술계에서 걸어가는 궤적 못지않게,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떻게 친구가 되는지 지켜보는 일도 흥미진진할 거예요. 어쩌면 여러분 역시도 그의 친구 중 하나가 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질지 모르죠.
내친김에 우정을 넘어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볼까요. 예술가가 특유의 시적인 언어와 강렬한 정서로 사랑에 빠져드는 장면은 어느 시대에나 사랑받는 소재죠(어쩌면 예술가의 평전을 읽을 때 독자가 은근히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울프는 그런 소재 역시 면밀히 포착해 그려냅니다. 불행하게 끝난 첫사랑부터 “고양이가 쥐 다루듯” 그를 다룬 아가씨, 그에게 사랑을 알려준 어머니뻘의 여성을 거쳐 마침내 헬렌 쿰까지. 로저에게 가장 큰 행복과 더없는 절망을 안긴 그녀와의 이야기 역시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당대 예술계의 한복판에서 집필된 예술 서적으로도, 일과 사랑이 어우러진 한 사람의 일대기로도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빠져드실 겁니다.
로저 프라이도 이 슬레이드 교수를 찾았고, 스컬캡과 실내복을 입고 방 안을 서성이며 말을 하는 미들턴의 비인습적인 모습에 매혹당했고 자극받았다. 그 방은 “너무나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스파한과 다마스쿠스에서 구한 아주 멋진 페르시아 타일, 초기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그림들, 렘브란트의 에칭화 원작 몇 점, 이 중 일부는 너무 멋지답니다. 그분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정말 즐거워요”라고 말하며 로저는 “어머니께서 교수님을 위험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실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요”라고 덧붙였다. 미들턴 교수는 로저 프라이의 기호를 바꿔놓은 것으로 보인다. 로저는 과학 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진정한 소질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있다고 생각했다. _2장 ‘이해받지 못할 확신’, 87쪽.
그는 걷거나 기차를 타면서 볼테라와 프라토, 산 지미냐노, 피스토이아, 그리고 루카 등지를 여행했다. 그림을 그렸고 꽃을 땄고 기록을 했고 수많은 그림과 프레스코, 세례당, 조각상을 보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묘사가 너무 길어진 것에 대해, 혹은 묘사를 하지 못하고 편지를 끝내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했을 정도다. 끝으로 로저는 “엄청나게 큰 황소 같은 것을 삼킨 보아뱀이 된 것 같아”라고 감탄하며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소화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_3장 ‘런던, 이탈리아, 파리’, 115-116쪽.
로저는 몇 달 동안 충분히 보았고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실험실 안이 아니라 그림들 사이에 놓여야 했다. 그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나머지 대가들의 작품을 잠깐 스치듯 보았을 뿐이지만, 그들 뒤에 거대한 세계가 도사리고 있고 그 세계를 측정하자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또 하나의 갈망이 있었다. (…) 그러나 로저는 시먼즈나 브라운과 토론을 할 때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느낀 반면, 기존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화랑에 걸릴 만한 그림은 차치하고서라도 하다못해 친구의 집에 걸어놓을 만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러웠다. 이 의심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이후로도 놓아주지 않았다. _3장 ‘런던, 이탈리아, 파리’, 122쪽.
로우스 디킨슨과 R. C. 트리벨리언에게 보낸 편지는 작문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엉망이었다. 쉼표가 빠지고 대시가 서로를 삽입하는가 하면 문장들은 시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가끔은 헬렌이 페이지를 덧붙이기도 했다. “결혼이 뭔지 알겠지? 종이 한 장도 혼자 쓸 수 없어, 이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종이인데.” 어쨌든 친구의 결혼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가장 많았던 로우스 디킨슨조차 해외에서 오는 두툼한 편지를 읽으면 로저 프라이가 자신에게 꼭 맞는 아내를 찾았으며,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든 몇 개월간의 신혼여행이 이때까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_4장 ‘온 세상이 우리의 공범’, 157쪽.
로저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작품을 꽤 상세하고 솔직하게 비판했다. 원장인 에드워드 포인터 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저 프라이는 “원장의 경력은 근면함과 특출한 재능, 철저한 사업적 태도가 다소 운 좋게 작용한 평범한 감각과 결합할 때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더불어 어떻게 감상성이 상상력을 점차 대체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이익을 수반하는지를 보여준다”라고 언급했다. 아카데미의 회원인 구달에 대해서는 “사유의 불안도, 예술적 야심도 그의 평온한 마음을 방해한 적이 없다니 실로 흐뭇하다”고 말했다. 명예 회원인 존 콜리어는 “빤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집요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카메라를 능가하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_5장 ‘끈질긴 믿음과 극단적인 망설임’, 171쪽.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들으면 잠시 멈춰 섰다. 최초의 충격과 놀라움이 지나면 그는 눈을 반짝하고 빛냈는데 반대 의견에는 언제나 경청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발언을 받아들이고 탐구했으며 가능한 모든 의심의 여지를 고려한 뒤 발언자에게 돌려주었는데, 그러면 그 의견은 산산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분명 한층 더 밝게 빛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함께 논쟁하는 것은 로저가 자신의 판단을 굳히기까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_5장 ‘끈질긴 믿음과 극단적인 망설임’, 190쪽.
하루하루가 빈틈없이 채워졌다. “아침 8시에 일어나 9시에는 시내로 그림을 보러 가고, 5시까지 미술관에 머물고, 그러다가 전화를 받고, 매일 저녁 새로운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즐긴 다음 잠자리에 든다.” 저녁 모임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미국인들’에서 곧 개별적인 친구가 되었으며 그중 일부와는 지속적으로 우정을 나누었다. _6장 ‘삶은 너무도 절박해’, 212쪽.
그는 시선을 그림 속으로 깊숙이 꽂아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꽃 위에 정지한 채 미세하게 떨고 있는 꼬리박각시(나방) 같았다. 이어 만족의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누구든 곁에 있는 사람을 찾아 공감을 구하곤 했다. “당혹스러운가요? 왜 그럴까요?” 이어 로저는 와츠에서 피카소로 이어지는 전환은 전혀 어렵지 않으며,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같은 방향으로 조금 더 밀고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보여주었고, 설득했고, 논증했다. 논증은 고조되어 새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 그림을 향했다. _7장 ‘회화의 위대한 시대’, 239쪽.
1910년 당시의 관중은 분노와 웃음의 발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들은 세잔에서 고갱으로, 고갱에서 반 고흐로, 피카소에서 시냐크로, 드랭에서 프리에스로 옮겨다녔고, 그럴수록 분노는 커져갔다. 그 그림들은 농담이었고 그들 자신을 조롱하는 농담이었다. (…) 그림들은 터무니없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유치했다. 그것은 영국 관중에 대한 모독이었으며, 그 모독의 책임자는 바보이거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악당이라는 것이었다. 신문에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지저분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신사를 묘사한 만화가 등장했다. 부모들은 유치한 낙서를 보내며 그것이 세잔의 작품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맥카시의 말에 따르면 이 비난 폭풍은 로저를 실제로 두려움에 빠뜨릴 정도로 강렬했다. _7장 ‘회화의 위대한 시대’, 241-242쪽.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20세기 영국의 작가.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나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식 학위는 받지 못했다. 훗날 ‘블룸즈버리 그룹’으로 불리는 지적 공동체에서 로저 프라이, 리턴 스트레이치, 클라이브 벨,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당대의 권위와 제약에 저항하는 예술 실험을 이어갔다. 1912년 그룹의 일원이자 작가인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 뒤 1915년 첫 소설 『항해』를 시작으로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등의 역작을 발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자기만의 방』과 『세월』 등의 작품에서 여성 해방 문제를 다루며 현재까지도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의 일원으로 평가받는다. 장편 소설 아홉 편을 비롯해 평론, 희곡, 에세이 등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 정신 질환의 악화를 우려해 1941년 3월 28일, 59세의 나이로 우즈강에 투신해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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