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와 같은 예술가들이 감상자와 예술 작품의 관계를 얼마나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알로이스 리글의 이 탁월한 연구는 20세기 예술 해석의 다양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알로이스 리글은 홀란트의 단체초상화 화가들이 감상자와 예술 작품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인물들 사이의 명확한 위계가 설정된 내적 통일성에 기반한 이탈리아 미술은 민주적 홀란트 예술가들의 Kunstwollen(예술의욕)과는 상충했습니다. 초상 인물들 간의 평등을 유지하고자 한 홀란트 화가들은 외적 통일성을 도입했는데, 이는 화면 안의 인물들이 액자 밖의 관람자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뜻합니다. 리글은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감상자의 새로운 역할, 그리고 내적·외적 통일성의 점점 더 정교해지는 상호작용을 탐구하며, 소통 이론·수용 미학·역사적 심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옮긴이 해제
편집자 머리말
알로이스 리글의 서문
I. 전단계
종교적인 역사화와 관련된 최초의 단체초상: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헤르트헨 판 하를럼의 세례자 설화 그림에 등장하는 요한 기사수도회원들
종교 단체의 독립적 단체초상 가운데 최초의 예루살렘 순례자 초상화
얀 판 스코럴이 그린 하를럼의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얀 판 스코럴이 그린 세 점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안토니스 모르의 위트레흐트 예루살렘 순례자 단체초상화
베네치아의 단체초상화
플란데런의 단체초상화
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1기 (1529~1566)
디르크 야콥스의 1529년 사수단 그림
작자 미상의 1531년 사수단 그림
코르넬리스 토이니센의 1533년 사수단그림
디르크 야콥스의 1532년 작 사수단 그림
작자 미상(알라르트 클라스?)의 1534년 사수단 그림
1554~1566년 사이, 상징주의적인 첫 번째 시기 단체초상화의 두 번째 계열
디르크 야콥스의 1563년 작 사수단 그림
디르크 바렌츠
디르크 바렌츠의 1562년 작 사수단 그림
디르크 바렌츠의 1566년 작 사수단 그림
홀란트 미술에서 풍속화적인 것의 도래와 의미
III.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2기 (1580~1624)
코르넬리스 케텔이 그린 디르크 야콥스 로제크란스 대장의 분대
피터르 이삭스의 1596년 작 사수단 그림
아르트 피터르스
아르트 피터르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해부학 교실과 간부진 그림의 등장
아르트 피터르스의 <세바스티안 에그베르츠 박사의 해부학 수업
피터르 피터르스 (I)의 1599년 작 간부진 그림
하를럼 단체초상화의 시초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83년 작 사수단 그림
코르넬리스 코르넬리스의 1599년 작 사수단 그림
프란스 피터르스 드 흐레버가 1619년에 그린 사수단 그림
암스테르담 단체초상화에서 공간과 시간의 외적 통일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
코르넬리스 판 데르 포르트의 1618년 작 간부진 그림
일명 피터르 하설라르 소위의 분대
랜스의 숲이 보이는 사수단 그림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4년 작 간부진 그림
베르너 판 덴 발커르트의 1625년 사수단 그림
니콜라스 엘리아스의 1628년 작 간부진 그림
IV. 홀란트 단체초상화의 제3기 (1624~1662)
토마스 드 케이저
1619년 작 <세바스티안 에흐베르츠 브레이 박사의 골학 강의>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2년 작 사수단 그림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3년 작 사수단 그림
토마스 드 케이저의 1638년 작 암스테르담 시장들
렘브란트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의 음영법
<야경>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직물 견본 검사관들>
바르톨로메우스 판 데르 헬스트
대장 룰로프 비커르와 부관 얀 미힐스 블라위의 중대
1648년 작 <사수단 만찬>
1653년 작 성 세바스티아누스 길드 간부진 그림
관학적 경향의 출현
호베르트 플링크
페르디난트 볼
니콜라스 마스
1616~1667년 하를럼의 단체초상화
프란스 할스
1616년의 성 게오르기우스 사수단 그림
하를럼 성 하드리아노 사수단 조합을 그린 1627년 작
1627년 작 하를럼의 성 게오르기우스 사수단 그림
1633년 작 하를럼의 성 하드리아노 사수단 그림
<빈약한 중대>
1639년의 하를럼 성 게오르기우스 길드 사수단 그림
하를럼에서 간부진 그림의 등장. 하를럼 성 엘리사벳 병원의 간부들
1664년 작 <하를럼 양로원의 남성 운영자들>과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운영자들>
헨드리크 폿의 하를럼 성 하드리아노 길드 사수단 그림
하를럼 사수단 그림 말기. 피터르 사우트만
하를럼 단체초상화의 마지막 시기
이 시기 단체초상화에서 나타나는 노벨라적 성격의 본질
얀 드 브레이
회고
후기
참고문헌
도판 목차
인명 찾아보기
용어 찾아보기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리글이 당대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긴 유아론에 대한 비판이다. ... 이 책은 재현적 미술조차도 재현의 문제를 어떻게 초월할 수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단순히 세계를 재현하는 데 기여하는 대신 미술은 관람자와 더불어 세계를 공유하기를 열망할 수 있었다.
_매거릿 올린, 『알로이스 리글의 미술 이론에서 재현의 형식』
『홀란트 단체초상화』 전반에 걸쳐 리글은 관람자와 묘사의 권력 관계를 주제화한다. 그는 지배와 종속, 능동성과 수동성, 자기중심적인 권력의 주장과 그에 복종하는 이들의 관계들을 관찰한다. ...... 리글의 우리[관람자]에 대한 관심은 상당 부분 그가 관람자/묘사 관계에 부여한 정교한 역학에 기대고 있다. 근년에 문학 이론에서는 독자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고, 약간 지체되었을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관심이 미술 이론에서 관람자의 역할에 주어졌다. 미술사의 최근 문헌 중에는 리글이 제공한 토대 위에 구축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_매거릿 아이버슨, 『알로이스 리글, 미술사와 이론』
전후 독일의 왕성한 마르크스주의 공동체에서 리글의 작업과 교전한 인물은 발터 벤야민만이 아니다. ..... 그러나 벤야민과 리글 미술사의 조우는 20세기 문화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부침이 심했던 경력 내내 벤야민은 리글의 관념들을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맞추고, 그 안에서 변형시켰다. 벤야민은 리글을 “역사적 조건들을 너무도 멀리 관통하여 그 조건들의 심박 곡선을 그들의 형태의 선으로써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인”(GS 3, 50) 학자로 평가했다. 벤야민의 전체 저술 전반에 걸쳐서, 이 오스트리아 미술사가의 저작에 대한 명확한 참조가 나타난다. 그는 리글이 주변부의 역사적 현상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대상과 시기의 기념비적 의미에 집중함으로써 미술사 연구에서 무차별한 절충주의와 보편사로부터의 벗어남을 예견했다고 선언했다. 더욱 중요한, 개별 예술 작품들에 의해 드러난 문화적 지적 의미-체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리글은 미술사에 새로운 방법과 지향을 제공했다. 『로마 말기의 미술 산업』과 『홀란트 단체초상화』는 “[예술 작품의] 의미-내용은 그 재료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리글의 기본적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_마이클 굽저, 『시간의 가시적 표면』








오늘날 홀란트의 옛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박물관에서, 나아가 시청사, 병원, 구빈원, 조합 회관에서도 종종 다른 지역에서는 본 적 없는 거대한 그림들에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전신상 또는 반신상을 대부분 등신대로 재현한 그림으로, 인물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거나 느슨하게만 관련되도록 그려져 있어서 초상화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단체초상화Gruppenporträt라고 부르는 이러한 그림은 홀란트에서도 거의 16~17세기에 한해 그려졌고, 심지어 홀란트 전역으로 고루 확산하지도 않았다. 북부와 남부에서는 홀란트 민족 회화의 중심지에서만 단체초상화가 제작되었는데, 무엇보다 암스테르담, 그다음으로 하를럼을 그러한 예로 꼽을 수 있다. 덴 하흐, 델프트, 레이던과 같은 다른 도시들, 심지어 하우다, 알크마르, 호른처럼 작은 지역 거점의 시민들 역시 단체초상화를 향유했다. 반면 이전에 네덜란드 공화국Generalstaaten에 속했던 나머지 지역에서 단체초상화란 고립적이고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예외에 불과했으며, 홀란트 외부에서라면 전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접한 남부 네덜란드만 해도 15세기 중반까지 모든 문화적 요소에서 홀란트와 통일성을 구축했으나, 그곳에서조차 진정한 단체초상화는 나온 적이 없다. 플란데런과 브라반트의 도시들과 항상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 옛 홀란트의 문화도시 위트레흐트에서 역시 개별적인 시도는 간간이 있었을지언정 이 장르가 제대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화가가 단체초상화를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대중이 여기에 관심을 보인 것 자체도 처음부터 홀란트 지역에서나 있던 일이다. 홀란트의 개인초상화와 풍경화, 풍속화와 정물화는 18~19세기에 해외로 어찌나 많이 팔려나갔는지 오늘날에는 많은 홀란트 화가가 자국에서 아예 연구 대상으로 취급되지도 못할 지경인 반면, 단체초상화는 예외적으로 소실된 작품을 제외하면 타국으로 유통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 대다수를 개인이 아닌 단체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서는 이러한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외국에서 이 작품들은 단호하게 거부당했고, 이를 소비하는 어떤 취향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단체초상화를 거부하는 태도가 어디에 근거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현대의 관람자가 피상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단체초상화의 인물들은 서사적 행위Handlung 를 하지 않고, 설령 서사적 행위가 나타나더라도 중도에 멈춘 듯 단편적일 뿐이다. 그런 그림은 종종 반쯤 지루하고 동기가 없어 보이며 따라서 솔직히 천한 그림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또 지난 2백 년간 로만 미술의 영향권 안에 있던 유럽의 대중 역시 이러한 그림에서 그보다 나은 인상을 받았을 리 없다. 그리하여 단체초상화는 늘 홀란트만의 명물이었다는 미술사적 사실이 남았다. 그렇다면 단체초상화라는 미술 장르는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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