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왕국’과 ‘정원’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천국’과 ‘낙원’의 어원적인 의미이자 용어다. 이 책에서 아감벤은 ‘천국’과 ‘낙원’의 개념들을 계보학적으로 해부해 이 용어들의 원래 의미와 패러다임적인 구도를 복원한다. 우리에게 익숙할 뿐 실제로는 문제적인 구도 속에서, 신이 에덴에 심어놓은 지상낙원은 지상의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의 패러다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추방당한 장소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모든 혁명의 꿈이 인류가 지상낙원의 문지기에게 도전하며 에덴에 다시 들어가려는 끝없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에덴의 정원은 지상에서 행복의 모든 탐색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종의 시원적 상처로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든 – 신학적인 관점에서 - 에덴의 정원은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낙원이며, 인간은 무언가가 본질적으로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아감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원죄 교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단테와 에리우게나의 사유를 재해석함으로써, 지상낙원은 어떤 잃어버린 과거나 도래할 미래가 아니며 오히려 여전히 현재에 실재하는, 인간의 본성과 정의로운 삶의 형상이며 ‘왕국’도 어떤 유토피아의 모형이 아니라 바른 정치의 패러다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스도교적 성선설과 성악설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왕국과 정원>에서 아감벤은 성선설을 지지하고 나선다. 인간은 원래 ‘낙원’에서 살다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낙원’에서 산 적이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낙원’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낙원’이라는 고유의 ‘본성’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원죄’는 아예 이 ‘본성’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이 ‘본성’에서 멀어진 존재, 신이 창조한 ‘본성’을 다 살려보지 못한 존재이며, 원죄를 상속한 죄인이 아니라 신이 창조하고 원했던 대로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존재일 뿐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도 바로 이런 의미로 읽어야 한다. ‘낙원’은 인류가 영원히 잃어버린 장소가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손상되지 않은 땅을 의미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의 원죄 사건에서도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대로의 본성에서 곧장 벗어나 되돌아갈 길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원죄는 이 방황을 의미할 뿐이며, 신이 창조한 대로의 인간 본성은 더럽혀진 적이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진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존재다. 아감벤은 이 가능성의 이름을 ‘정원’이라 부른다.


일러두기: 핵심 용어의 의미와 번역에 관하여
1. 희락의 정원
2. 자연적 죄
3. 인간은 아직 낙원에 간 적이 없다.
4. 신성한 숲
5. 낙원과 인간의 본성
6. 왕국과 정원
참고문헌
교회와 왕국: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강연
역자 해제: 왕국의 말
‘낙원’의 원래 의미는 ‘정원’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인류가 건설해온 다양한 형태의 멋진 정원들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시원적 정원 에덴동산이다. 이 책은 - 고대 말기와 중세의 신학 문헌들을 토대로 -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인물들이 어떻게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의할 목적으로 ‘에덴동산’, 즉 ‘지상낙원’을 중요한 이론적 장치로 활용해왔는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이루어진다. ‘정원’ 혹은 ‘낙원’은 일찍이 그리스도교 태동기의 교부들이 ‘인간의 본성’에 – 즉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 상태의 본성에 - 부여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제도화되면서부터는 우리가 죄 때문에 지상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다. 신학자들이 - 아울러 오늘날 서구문명사회의 지식인들이 - 에덴에 대해 논할 때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나 이 추방령이다. 에덴이 존재한다거나 인간이 그곳에 잠시라도 머물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가 그곳에서 쫓겨난 존재라는 점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서구 문명사회의 원천적인 신화소는 낙원이 아니라 낙원의 상실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일종의 시원적 상처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문화와 근대 문화에 뿌리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 과정에서 결국 지상의 행복을 탐색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감벤은 최초의 인간 아담의 죄를 인류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는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이 다름 아닌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개념에서 유래했다고 진단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정원에서 추방당한 상태로 벌을 받듯 살아야 하는 존재, 스스로가 짓지 않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인간의 본성이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부패했다는 교리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는 사건의 본질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그의 입장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을 부패시킬 줄만 알지 이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사를 통해 배포하는 신성한 은총과 이 은총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구원의 역사 및 경제에 스스로를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론은 곧장 지상낙원이 본질적으로는 텅 빈, 쓸모없는 장소라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견해에 맞서 아감벤은 에리우게나처럼 창세기의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에리우게나와 아감벤의 관점에서 에덴동산은 원죄 이전 상태의 인간 본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비유에 가깝다. 에리우게나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인간의 본성이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다고 보는 관점과 이중적으로 상반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지상낙원도 신에 의해 순수하고 부패될 수 없는 형태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죄에 의한 부패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 행위에서 비롯될 뿐이다. 인간이 죄로 인해 자연적 본성에서, 즉 신이 그에게 부여한 본성에서 벗어난 이유는 그가 본성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의 비유적인 설명이 바로 인간은 처음부터 낙원에서 벗어났다는, 혹은 낙원에 한 번도 머문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에리우게나의 입장에서 부패한 인간 본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언제나 무고하며 무사하다. 단지 우리가 처음부터 이 본성에서 떠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실 단테의 『신곡』을 읽는 저자의 독특하고 예리한 해석 방식이다. 아감벤은 전통-신학적인 단테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단테가 전하는 지상낙원의 이야기를 중세-신학적이고 아퀴나스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읽을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단테의 입장에서도 지상낙원은 지상의 지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곡』의 진정한 의미는 이 작품에서 ‘낙원’이 천사가 가로막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주인공 단테처럼 인류가 아무런 장애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는 단테의 설정에서 발견된다. 아감벤은 지복과 정원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사유했던 단테와 달리 신학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 가능성에 대해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신학자들이 지상낙원을 어떤 식으로든 정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낙원은 살 곳의 크기나 공간을 기준으로는 지상 세계와 구별되지 않으며 오직 살아가는 방식의 상이성과 지복의 차이를 기준으로만 구별된다. 최초의 인간도 죄만 짓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원적 원인들의 차원에서 지상 세계의 기초와 낙원의 기초는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에리우게나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거대하고 행복한 신전에 들어가듯, 모든 인간이 각자의 분량대로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이 신전은 — 즉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지상 세계는 — 인간이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곳임에도 결코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이며, 동시에 신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은 인간과 천사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영역과 다른 곳에서는 살지 않는다.” (p.110)
단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들을 사실상 부정하기 위해 활용하며 그의 교리가 지닌 허점을 여지없이 들춰낸다. “보다시피, 세상이 부패한 것은 나쁜 행위 때문이지 그대들 안에서 부패했다고 하는 자연적 본성 때문이 아니다.” (p.138)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요소로, 즉 순수하게 자연적인 자산과 무상의 은총으로 양분된다. 이 두 요소가 어떤 통합된 형태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이들을 오히려 단번에 결정적으로 분리시킬 뿐 아니라 분리된 상태로만 인식되도록 만드는 장치가 활성화될 때에만 가능하다. 이 장치가 바로 ‘죄’다. 이 장치는 순수한 자연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은총에도 적용된다. 순수한 자연은 은총이 죄로 인해 무산된 뒤 남는 무언가로, 일종의 여분으로 정의되는 반면 은총의 비-자연적인 성격은 은총이 죄의 결과로 증발하는 순간에만 부각된다. (p.175)
“그리스도는 왕국의 도래를 선포했는데 정작 등장한 것은 교회다.” 알프레드 르와지의 이 아이러니한 표현 속에 숨어 있는 문제를 지나치게 껄끄러워한 학자들의 성향은 이에 대한 언급을 아예 회피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왕국이 복음서의 본질적인 내용이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 안에 실재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현실에 비해 왕국의 현실이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라는 문제다. 교회와 왕국의 관계가 지닌 문제적인 성격은, 이레네오 및 초대 교부들이 제시했던 왕국의 신학이 교회가 제도적으로 체계화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p.202)
아우구스티누스는 왕국을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의 시대’, 하지만 실제로는 의인들과 악인들이—최후의 심판 날에 분리되기 전까지는—공존해야 하는 시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식으로는 왕국이라는 용어의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왕국을 다름 아닌 세상이 끝난 뒤에 오게 될 왕국과 “전혀 다르고 대등하지도 않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p.207~208)
발터 벤야민의 의견대로, 마르크스가 계급 없는 사회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메시아적 왕국의 개념을 세속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종말론적 시간을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분분하게 만들던 것과 동일한 모순 및 독설이 여기서[사회체제 논쟁에서] 그대로 재생된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간의 인계 과정, 계급 사회와, 소비에트 혁명의 실패 원인이었던 계급 없는 사회 간의 인계 과정이 무한히 지속되는 문제에는 정확하게 왕국의 도래시기에 대한 전적으로 신학적인 문제가 상응한다. 교회와 왕국의 양립가능성이라는 문제에도 정당과 계급 없는 사회 간의 똑같이 모순적이고 문제적인 양립가능성이 상응한다. (p.213)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미학자, 비평가. 파리 국제철학원, 이탈리아 베로나 대학, 베네치아 건축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95년 푸코의 생명철학과 슈미트의 예외상태를 토대로 로마 시대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현대 정치에 적용해 쓴 『호모 사케르』를 발표하면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반열에 올랐다. 벤야민과 하이데거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고, 비트겐슈타인, 블랑쇼, 데리다, 들뢰즈 같은 현대 사상가들과 플라톤, 스피노자 같은 고대와 중세의 철학자들, 유대-기독교 경전의 이론가와 학자들을 아우르는 사유 탐험을 지속해 왔다. 1995년부터 장장 20년에 걸쳐 집필한 9부작 호모 사케르 프로젝트를 2015년에 완성했다. 이 외에도 『내용 없는 인간』, 『유아기와 역사』, 『행간』, 『도래하는 공동체』를 비롯해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피렌체 국립대학에서 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밀레니엄을 전후로 20여 년 남짓 피렌체에 머무르며 이탈리아의 깊고 넓은 지적 전통을 탐색했다. 귀국 후 이탈리아의 인문학과 철학 저서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조르조 아감벤의 『내용 없는 인간』, 『불과 글』, 『행간』, 움베르토 에코 편저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3』, 잔카를로 데 카를로의 『건축과 자유』, 『참여의 건축』, 필리페 다베리오의 『상상 박물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코무니타스』, 『임무니타스』, 『비오스』 등이 있다.
아감벤은 우리가 흔히 ‘에덴동산’이나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장소의 원래 의미가 ‘정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가 추적하는 계보학적 경로에 따르면, ‘정원’은 ‘신의 정원’으로 정립되고 미화되는 과정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지상낙원’의 의미를 잃고 ‘천상의 낙원’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개발한 원죄의 교리에서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미화되는 가운데 인간의 퇴화가 시작된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하기 전에 활동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낙원 밖으로 쫓겨났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부패한 것도, 정원이 저주받은 것도 아니었던 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 교리를 제시한 이후에는 단순히 인간만 죄를 짓기 전의 무고한 인간과 죄를 지어 본성이 부패한 인간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도 “영원히 잃어버린 ‘지상의 낙원’과 머나먼 미래에나 들어갈 ‘천상의 낙원’으로” 양분된다. 원죄가 원칙인 만큼 낙원보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사건이 더 중시되는 상황은 결국 인간의 본성을 결정지은 요소도 최초의 인간이 살던 낙원이 아니라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이라는 부정적인 견해의 체계화로 이어진다. 낙원은 이제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그의 불완전한 삶을 완전히 소진한 후에야 도달하게 될 천상의 공간으로 변한다. 결과적으로 ‘왕국’의 개념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저자의 표현대로 원래 ‘손이 닿는 곳에’ 있던 신의 왕국은 서서히 ‘가까이 온’, ‘다가올 날이 멀지 않은’, 끝내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나라로 변한다. ‘손이 닿는 곳에’ 있던 나라가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나라로 변한 셈이다. 이처럼 먼 미래로 밀려난 신의 왕국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교회다. 물론 저자처럼 패러다임의 계보학적 차원에서 관찰하면 이는 대변이 아니라 대체에 가깝다. “그리스도는 왕국의 도래를 선포했는데 정작 등장한 것은 교회다”라는 한 신학자의 말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황이다.
한편으로는 아퀴나스가 정식화한 본성과 은총의 관계도 사실은 왕국의 이러한 접근 불가능성과 이에 상응하는 교회의 제도적 필요성을 보다 확실하고 논리적인 형태로 정립하는 데 소용된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원죄는 원칙이 아니라 기초로 기능하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본성과 신의 은총은 불가분한 관계로 결속되어 있지만 이 관계를 밑바다에서부터 지탱하는 것은 원죄 개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는 신이 자연적으로 창조한 인간의 원죄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 신의 은총인 반면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신의 은총으로 창조된 인간이 죄를 지어 무산된 것이 신의 은총이다. 결국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은총이 죄로 인해 무산된 뒤 남는 무언가”에 불과하며 은총의 비-자연적이고 신성한 성격은 “은총이 죄의 결과로 증발하는 순간에만” 부각된다. 이러한 논리의 맹점은 내용을 ‘죄’라는 단어 없이 관찰할 때 확연히 노출된다. 인간의 본성은 신의 은총이 사라진 뒤에야 부각되는 무언가에 불과하고 신의 은총은 인간의 본성이 부각될 때 사라지는 - 비로소 필요해지는 - 무언가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원죄 개념이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왕국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은총이 사라져 전적으로 무능해진 인간만이 왕국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고, 왕국을 완성해야 할 은총도 사라져야만 임무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이러한 논리를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기본적으로 ‘원죄’ 교리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이지만, ‘정원’이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지상낙원’으로 남아 있었다면, 그래서 ‘왕국’이 ‘정원’과 유사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는 ‘정원’과 ‘지상 왕국’을 동일한 실체로 파악했던 에리우게나와 단테를 소환한다. 에리우게나는 에덴동산의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 이해했다. 그의 가히 충격적인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낙원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낙원에서 자연적으로 창조되었을 뿐 낙원에 머문 적이 없고 어떤 시간의 간극도 발생하기 전에 곧장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성서 기자가 마치 낙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는 모든 것은 원죄 후에, 낙원 바깥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비유에 불과한 ‘낙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에리우게나의 ‘낙원’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다.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원죄’ 개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이 낙원 바깥에서,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 바깥에서 일어났다면 인간의 본성은 오염되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에리우게나에 따르면, 인간은 낙원에, 즉 스스로의 자연적 본성에 들어간 적이 없거나 처음부터 밖으로 나와 있다.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외출’에 불과하다. 이는 곧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죄’로 인해 부패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스스로의 본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리우게나의 ‘지상낙원’은 – 즉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 “인간이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곳임에도 결코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이며, 동시에 신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천상의 낙원도 실제로는 인간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지상낙원에 불과하다.
신학자들이 ‘낙원’을 언급할 때마다 ‘인간의 본성’을 함께 다루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테도 예외는 아니다. 『신곡』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할 뿐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단테는 이렇게 말한다. “보다시피, 세상이 부패한 것은 나쁜 행위 때문이지 그대들 안에서 부패했다고 하는 자연적 본성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단테는 인간이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자력으로 다시 일어서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단테가 인간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사실 낙원을 지상낙원이자 인간 본성의 이상적인 실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상낙원이 인간 본성의 비유라는 점을 단테가 에리우게나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테의 입장에서 지상낙원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복의 한 형상이다. 이 지복에 도달하는 일은, 신학자들이 언제나 양분된 형태로만 이해했던 인간 본성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지성’과 ‘사랑’의 통합을 – ‘정원’의 통합을 - 통해서만 가능하다. 단테가 『신곡』의 서두에서 길을 잃었던 어두운 숲과 나중에 들어가게 될 신성한 숲은 동일한 장소다. 『신곡』의 본질적인 의미는 실제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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