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 글쓰기와 창작이 재정의되는 시대, 다시 주목받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거장 ★
★ 자아와 언어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적 · 자전적 실험 ★
★ 전 세계 지식인들이 찬사한 20세기 문학비평의 고전 ★




바르트적 글쓰기.
종려나무 형상처럼.
솟구치되, 반드시, 정확히, 흘러내릴 것.
철학이나 문학을 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지 말 것.
권태와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쓴다고 차라리 인정할 것.
자신의 이름 앞에‘작가’를 붙이는 작가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 것.
몰골 흉한 네임 카드.
그저 ‘쓸 것’.
바르트가 말한다.
‘자의식’을 녹이고 분해하기 위해
더 반복적으로, 더 병적으로 쓸 것.
명성과 허영, 스노비즘의 늪에 빠진
우리 과도한 책의 범람 속에,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죽비소리다, 돈오돈수다.
글쓰기 열정? 아니, 또는 글쓰기 윤리의 한 전범.
당신은 왜 쓰는가?
그는 승리하는 대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든 굴욕감을 주면 힘든 그는 승리가 보일라치면, 당장 다른 곳에 가 있고 싶어진다(만일 그가 신이었다면, 계속해서 승리를 뒤엎었을 것이다—게다가, 신이 하는 게 그런 거니까!). 대화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가장 올바른 승리조차 언어적으로는 가장 나쁜 승리가 된다. 오만이므로. 이런 단어를, 바타유를 읽다가 만났는데, 어느 책에선가 그는 과학의 오만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한 오만은 승리를 구가하지 못해 안달인 모든 대화들로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따라서 세 가지 오만을 감내한다. 과학의 오만, 독사(Doxa)의 오만, 열혈 투사의 오만. _p. 68, 「오만」 중에서
나는 나의 저 옛 조각을 지치도록 찾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나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다(기념물처럼).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를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텍스트 하나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R. B.라 부른다.” _p. 90, 「우연의 일치」 중에서
나는 발신자들의 사회에 살고 있다(나 자신도 그 한 사람이고). 내가 만나거나 내게 글을 써 오는 사람은 내게 책을, 글을, 명세서를, 안내서를, 항의서를, 연극 및 전시회 초대장을, 또 기타 등등을 보내온다. 성적 쾌감에 가까운 쓰기와 생산의 쾌락이 도처에서 절박하다. 하지만 상업적 회로로 인해 자유로운 생산은 정체되고, 거의 미치고 날뛴다. _p. 139, 「발신자들의 사회」 중에서
글쓰기란 건조한, 금욕적인 쾌락이다. 절대 다 쏟아내서는 안 되는 쾌락이다. _p. 151, 「셀린과 플로라」 중에서
파편들로 글을 쓴다는 것. 파편들은 둥근 원의 둘레에 있는 돌들이다. 나는 그 위에 내 몸을 둥그렇게 펼친다. 내 모든 작은 세계가 부스러기들이다. 그 중심에는 뭐가 있을까?
그의 첫 또는 거의 첫 텍스트(1942)도 파편적 글쓰기다. 이런 선택은 당시 지드적인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질서가 왜곡하는 질서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후 실제로, 그는 짧은 글쓰기를 수행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_pp. 164-165, 「파편들의 순환」 중에서
자신을 타자로 여기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을까—적어도 예전에는 쓸 수 있었다. 근원의 이야기를 형상의 이야기로 대체해야 한다. 작품의 기원, 그것은 작품에 미치는 첫 영향이 아니라, 첫 자세이다. 하나의 역할을 모방한다. 이어 환유적으로 한 예술을 모방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재생산함으로써 생산하기 시작한다. _pp. 177-178, 「압그룬트」 중에서
(자기) 비평보다 더 순수한 상상계는 없다. 결국, 이 책의 실체는 완전히 소설적이다. 에세이 같은 담론에 3인칭이 끼어드는 것은, 어떤 가공적 피조물을 지시하려는 게 아니라 이른바 장르들을 개혁할 필요가 있어서다. 에세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거의 소설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고유명사 없는 소설. _p. 215, 「’나‘의 책」 중에서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내 글은 경쟁하듯 써야 하는 작품에 비해 그저 납작하고, 하찮고, 왠지 죄를 지은 것처럼 초라하다. 작품이라는 집합적 상이 나에게 자꾸 따라붙는데, 이런 함정을 다 거치면서 어떻게 글을 쓸까? 글쎄, 그냥 눈 딱 감고. 작업하는 매 순간, 나는 길을 잃고, 미칠 것처럼 괴롭고, 쫓기면서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속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 나오는 마지막 말. 계속 갑시다(continuons). _pp. 249-250, 「글쓰기에서 작품으로」 중에서
그러니까 각자가 내일, 나, 거기 같은 말만 사용한다면. 굳이 법으로 정한 것 같은 것을 참조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사랑의 액체성과도 유사한 한 집단 내의 유동성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분명한 차이에서 미세함이 나오고, 그 미세함에서 끝없는 반향이 나와 차이가 존중받는 것이긴 하지만) 모호한 차이가 언어의 가장 비싼 가치 아닐까? _p. 302, 「유토피아로서의 시프터」 중에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호학자이자 문학 비평가로 텍스트와 글쓰기의 본질을 탐구한 사상가이다. 1915년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태어나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과 고전학을 공부했다. 바르트에게 글쓰기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의미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역동적 공간이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글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했고,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텍스트성’ 이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며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 독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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