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북펀드는 출판사 요청에 따라 출판사 주관하에 진행됩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해방 80주년 기념!
시대의 정신을 잇는 알라딘 단독 리커버 에디션
장준하의 <돌베개> 김구의 <백범일지>
◆ 단독 리커버 에디션 #1 <돌베개>
고난의 길에서 빛의 혁명으로! 희망의 길을 가다
광복군 3대 회고록 중 으뜸으로 꼽히는 <돌베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굳은 신념이 만든 기적의 길
장준하 선생의 신념과 6천 리 항일대장정의 의미를 담은 리커버 에디션은 고난의 길이 희망의 길로,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 된긴 여정을 디자인에 담았다.
1944년 7월 7일, 중국 쉬저우의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가 일본군이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기념 회식을 하느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김영록.윤경빈.홍석훈과 함께 목숨 걸고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돌베개>는 영원한 광복군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고인이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후세에 남긴 뜨겁고도 준엄한 항일수기이다.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 임시정부까지 6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대장정에 굽이굽이 서린 숱한 일화와 1945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직후의 상황까지 2년여의 기간을 다룬 이 책의 무대는 평양에서 쉬저우→린촨→난양→라오허커우→파촉령→충칭→시안→상하이→서울 등지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함석헌 선생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습니다." 라고 한 바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 그대로 자신보다 앞서 죽어간 “불쌍한 선열들 앞에 띄우는 바람의 묘비”이며, 그 내용은 망국과 분단이라는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하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이 무엇인지를 뜨겁게 웅변하는 이 책을 통해 장준하라는 역사의 거목을 추모하며 다시금 오늘을 돌아보자.
◆ 단독 리커버 에디션 #2 <백범일지>
위인의 시대에서 개인의 시대로,
보통사람 김구의 빛나는 기록, <백범일지>
평범한 사람 백범, 사천 년 꿈속에 빠진 동포에게 깨어나라 외친 백범. 백범 선생은 현재의 빛의 혁명을 보며 빛나는 개인들이 이뤄낸 기적이라 할 것이다. 리버커 에디션에는 빛의 혁명을 이끈 개인 한 명 한 명이 빛나는 점이 되어 이 빛들이 모여 백범 선생을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동시에 우리의 도약하는 미래를 보여준다. 분문은 가장 완벽한 판본이라고 인정받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돌베개의 <백범일지>(2022년 출간)의 내용을 담았다.
27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독립운동가이자 자신의 전생애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겨레의 큰스승 백범 김구. 이 책은, 일제 침략 아래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살길을 열고자 해방된 통일조국 건설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끝내 비명에 간 그의 생애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돌베개의 <백범일지>는 백범의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여러 가지 출간본 등 기존에 나온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 대조하여 교감하여, 지금까지 나온 출간본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표준이 되는 <백범일지>로 평가받고 있다.

1. 돌베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장준하 선생의 6천 리 대장정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한강 작가의 이 물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내 후손에게는 잃어버린 조국, 나라 없는 설움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조상의 분투가 오늘의 빛의 혁명을 이뤘다고 한다면, 이런 내 말을 너무 과장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6천 리, 2,400km를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오로지 조국 광복을 이뤄내리라는 신념으로 걷고 또 걸었던 장준하 선생의 7개월간의 이 걸음은 어떤가. 장준하 선생의 이 걸음이 사실이듯, 『돌베개』의 이 기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장준하 선생도 지난겨울과 올봄, 응원봉을 들고 빛의 광장을 지켰다. 광복 80주년, 올해의 광복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빛으로 다가온다. 광복절을 마음으로 기억하고 감사하며, 『돌베개』에 담긴 장준하 선생의 신념을 읽어 보는 소중한 날이 되기를 희망한다.
2. 백범일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님이 바란 문화 강국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K팝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화의 힘, 빛의 혁명으로 이뤄낸 K민주주의, 이 모든 것이 백범 선생이 바라고 또 바란 ‘나의 소원’이 아닐까. 비록 분단된 조국이지만, 땅에 그어진 그 선 또한 문화의 힘으로 지우고 열어젖힐 날을 기다린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광복80주년,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다.
- 이경아 편집자 (돌베개)
<돌베개>
발문—『돌베개』에 부치는 말
탈출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잊히지 않는 얼굴들
광복군훈련반에서 3개월
라오허커우의 공연
파촉령 넘어 태극기
눈물의 바다
자링 청수는 양쯔 탁류로
8·15 전후 I
8·15 전후 II
임시정부의 환국
주요 등장인물 소개
연보
<백범일지>
교감원칙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 상 권 ]
인.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3. 질풍노도의 청년기
4. 방랑과 모색
5. 식민의 시련
6. 망명의 길
[ 하 권 ]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나의 소원
백범 연보
인물 찾아보기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당시 한문 지식뿐만 아니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 태도를 보였는데, 장준하의 회고에 따르면 시골 벽지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 볼 정도로 당대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일제에게 불령 불온자인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장준하의 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항일 저항 의식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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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준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당시 한문 지식뿐만 아니라 신문명을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 태도를 보였는데, 장준하의 회고에 따르면 시골 벽지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받아 볼 정도로 당대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준하의 할아버지는 일제에게 불령 불온자인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장준하의 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항일 저항 의식을 보였다.
이처럼 장준하는 성장 환경 속에서 할아버지의 지식인적 삶으로부터 이후 ≪사상계≫의 잡지를 발간하게 되는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항일 저항 의식과 불의에 맞서 선(善)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민족의식과 인류 보편적 민주주의를 향한 정신을 함양하게 된다. 장준하의 이러한 모습은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그가 다니는 평양의 신성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연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데 대해 석방을 요구하는 수업 거부와 동맹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장준하에게 일제에 맞서 항거한 본격적 투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성중학을 졸업한 이후 장준하는 평북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의 교원이 되는데 바로 이때 스승과 제자로 만난 사람이 장준하의 반려자 김희숙 여사다. 3년간의 신안소학교 교원 생활 후 장준하는 1년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유학에서 그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장준하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1940년대 초 일제의 군국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더니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 피식민지는 일제의 전쟁 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무렵 장준하는 김희숙과 결혼(1943)을 한 후 일본군의 ‘학도지원병’으로 지원한다(1944).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참전하게 된 장준하는 동료 조선인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을 했고 온갖 난경 속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장준하는 그보다 먼저 일본군에서 탈출한 그와 같은 조선인 학병 김준엽을 만난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무려 6000리(24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일본군과 마적의 위협을 뚫고 마침내 임시정부에 들어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 내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해 군사교육을 받는다. 이곳에서 그는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신학, 철학, 사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토론과 학습 자료를 만들며 문무를 겸비해 나간다. 특히 중국 서안에서 미국 OSS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한반도에 기습 침투하는, 오늘날 공수특공대와 같은 게릴라식 전투를 주도면밀히 준비했는데, 이는 안타깝게도 작전 개시 5일 전,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중단된다. 이에 대해 장준하는 체험 수기 ≪돌베개≫에서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 보려던 꿈이 잠들고 말았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일제가 패전한 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온 장준하는 해방 공간의 혼돈 속에서 못다 한 신학 공부를 했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2년 9월 피난지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 창간에 이어 1953년 4월 ≪사상계≫를 발행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발행된 ≪사상계≫는 척박한 한국 언론의 토양을 객토하고, 무엇보다 환멸과 허무에 침잠해 있던 한국 지성사에 신생의 활력을 북돋았다. ≪사상계≫의 역할은 상상 이상 큰 것이었다. ≪사상계≫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중심에 놓고 일체의 타락한 정치사회 세력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장준하와 그의 ≪사상계≫를 탄압하기 위해 온갖 정치적 박해와 음모를 가했다는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암행 기록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사상계≫의 활동은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 부문의 수상자로 장준하가 선정되면서(1962) 국제적 명성과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장준하의 이러한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데, 이에 대해 장준하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친일파, 정치적 무능력, 반민주주의 독재 등)를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재야 민주주의 인사를 통합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박정희의 정치적 탄압으로 옥중에 있을 때 옥중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고(1967), 마침내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현실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유신 체제 아래 장준하는 ‘유신헌법 개헌 청원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1973)을 벌이면서 숨죽이고 있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를 표면으로 솟구치도록 하는 도화선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장준하는 반민주주의를 획책하고 정치사회적 억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박정희 정부를 향한 준열한 비판과 저항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박정희 정부의 눈엣가시였던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에서 등산 도중 실족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1975).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는 데 한계가 있던 터에, 2012년 그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었는데 그의 두개골이 함몰된 것이 드러나면서 두개골 정밀 감식을 거친다. 그에 대해 2013년 3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서울대 의대 법의학자 이정빈 교수의 결과 보고가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두개골 함몰은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니라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고, “장준하 선생은 제3의 장소에서 살해당하고 시신이 옮겨온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로써 장준하의 죽음은 등산 도중 실족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 때문에 장준하를 살해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배후는 누구인가? 이 점은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 있다.
광복군으로서, 재야인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장준하는 한국 현대사에서 그가 말한 대로 ‘민주대도(民主大道)’를 향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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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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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 접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중국 베이징대학교,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 창원 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 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 수상), 『백범일지』, 『정본 백범일지』, 『백범어록』,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강철로 된 무지개: 다시 읽는 이육사』,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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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
3. 19,900원 펀딩
<돌베개> 해방 80주년 기념판 1부
광복 80주년 사각 유리 문진(돌베개) 1개 ※ 사은품 품절
후원자 명단 인쇄 엽서 삽지
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
4. 16,300원 펀딩
<백범일지> 해방 80주년 기념판 1부
광복 80주년 사각 유리 문진(백범일지) 1개 ※ 사은품 품절
후원자 명단 인쇄 엽서 삽지
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
5. 25,200원 펀딩
<돌베개>, <백범일지> 해방 80주년 기념판 각 1부
후원자 명단 인쇄 엽서 삽지
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
6. 36,200원 펀딩
<돌베개>, <백범일지> 해방 80주년 기념판 각 1부
광복 80주년 사각 유리 문진(돌베개, 백범일지) 각 1개 ※ 사은품 품절
후원자 명단 인쇄 엽서 삽지
펀딩 달성 단계별 추가 마일리지 적립
광복 80주년 사각 유리 문진 (돌베개, 백범일지)





※ 알라딘 북펀드 굿즈가 포함된 구성에 펀딩하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광복 80주년 사각 유리 문진 (돌베개, 백범일지)





※ 알라딘 북펀드 굿즈가 포함된 구성에 펀딩하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