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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의 음악적 자서전
구구절절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이 시대의 독보적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일찌감치 신동으로 주목 받으며 구소련에서 서방세계로 건너와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에 자리매김하기까지, 키신은 구소련 출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남다른 천재성에 관한 사적 호기심에 둘러 싸였다.
청중은 단숨에 클래식 음악계의 슈퍼스타로 등극한 키신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뒷이야기를 낱낱이 알고 싶어했다. 오로지 음악 밖에는 모를 것 같은 순진무구한 피아니스트와 이따금 거침 없이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사회운동가적 면모 사이의 간극을 파고들고 싶어했다. 지극히 제한된 인간관계와 고도로 정제된 음악세계는 그에 대한 신비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그러나 키신은 음악이 아닌 것으로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편이었다.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침잠하던 그는 지천명을 앞두고서야 지금껏 쏟아진 수많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글로써 내놓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종종 같은 종류의 질문들을 받곤 했다. 그래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한 권의 책을 쓰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흥미 있어 할지 모를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자서전 은 이러한 서문으로 시작된다.
■ 동화 같은 유년 시절, 폭풍 같은 청년 시절
키신의 자서전 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여러 가지 것들’이라는 부제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필됐다. 첫 부분 ‘어린 시절’은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된 가족과 스승의 이야기이다. 키신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물려주고 유별난 헌신으로 키워낸 어머니, 직접 그린 그림으로 아들의 첫 독주회 포스터를 만들 만큼 세심했던 아버지, 남동생보다 먼저 피아노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동생의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은 누이 알로치카, 평생의 스승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 사사로이 언급하고 지나칠 수 없어 쉽사리 꺼내 놓지 못했을 법한 이야기들이 온기 가득한 필치로 적혔다.
인종차별을 피해 아버지의 성에 드러난 유대인 혈통을 숨기고 어머니의 성 ‘키신’을 따랐던 사연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깃거리들도 담겼다. ‘너무 일찍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유년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주위의 염려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두 번째 부분 ‘청년 시절’에서 키신은 전문연주자로서의 진로을 위한 서방세계로의 귀화 과정 및 각종 난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거장들과의 특별한 일화 등 홀로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독자는 어린 나이에 큰 무대에 발탁돼 좌절 없이 승승장구한 것으로만 비춰지던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절박함과 고뇌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가 몰랐던 키신
세 번째 부분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서는 음악 외적으로 키신이 가꿔온 다방면의 관심사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유대문학 낭송을 즐기는 예민한 감수성과 사회과학서와 역사서를 탐독하는 냉철한 지성을 동시에 지닌 모습이라든지, 여린 성정 이면에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자기 견해를 펼쳐내는 모습은 우리가 잘 모르던 키신의 면면이다.
키신의 글에 몰입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그가 글을 써내려 간 시간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오랜 시간 자신의 곁을 지켜준 음악팬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기 위해, 연주 여행 틈틈이 적잖은 시간과 공을 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공연장 밖 어딘가에서 키신과 마주 앉아 길고 내밀한 대화를 나눈 듯하다. 이제는 다시 책장을 뒤적여가며 그가 언급했던 연주들을 찾아서 듣고 싶어진다.
음악칼럼니스트 김소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