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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리스펙토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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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 엘렌 식수의 조화
    화음처럼 쏟아지는 텍스트의 향연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창안한 뒤 줄곧 그 길에 따른 글쓰기를 추구해 왔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출발하는 글쓰기로, 논리를 비롯해 우리 인간을 둘러싼 구조와 체계를 무너뜨리거나 그 너머로 날아가 낯설고 강렬한 직관들과 직접 연결되겠다는 결의로 다져져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인간이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언어를 그 이해 바깥으로 끌고 나오며, 그러한 과정을 함께하는 독자들 역시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간다.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식수가 오직 리스펙토르만을 다룬 세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짧은 책 속에서 식수는 스스로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꾼다. 그는 리스펙토르를 받들어 찬미하는 자였다가 리스펙토르를 닮은 무엇이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권력에 희생당하는 소수자들과 같은 행성에 살고 있는 현대 지식인임을 계속해 자각하고, 비평 훈련을 받은 학자로서 소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비의에 감화되어 다시금 종교적 열망에 휩싸이고,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환을 거듭하다가 심지어는 ‘우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 책 속에서 식수는 자발적으로 계속 형태를 바꾸며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 혹은 전달자가 되며, 이는 유대인인 그의 정신적 뿌리 가운데 하나인 성경에서 성령이 맡았던 역할과 닮았다. 어떤 텍스트에 얼마나 깊이 감화되어야 그 자신을 ‘말씀을 전하는 자’의 근본적 형태, 즉 성령과도 같은 형태로 변환할 수 있을까?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스스로 자신이 주창하는 글쓰기의 전범으로 변신한 ‘글쓴이’가 세상에 전하는 열렬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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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처럼 쓰게 될 여성들에게"
    심장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창안한 이후, 이러한 글쓰기의 한 예로 <달걀과 닭>, <G.H.에 따른 수난>, <야생의 심장 가까이> 등의 작품으로 국내 독자에게도 깊게 사랑받은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을 집중해 이야기해온 앨렌 식수가 리스펙토르에게 바친 세 편의 글을 엮었다. 알제리 오랑(Oran)에서 태어난 유대계 작가인 식수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브라질에서 활동한 유대계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언어, 라란자(laranja, 오렌지의 포르투갈어)에 닿을 때까지 '오렌지'를 향해 하강한다. 리스펙토르 작가론에 해당하는 첫 수록작 <오렌지 살기>를 통해 식수는 풍성한 감각을 외줄타기하듯 넘나들며 '글을 쓰는 여자의 은은하지만 도취시키는 맛을'(48쪽) 그 풍요로운 체취를 침이 고이게 그려낸다.

    <G.H.에 따른 수난>의 번역자 배수아는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고백과 같은 G.H.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그녀의 여성-정체성과 연관된다.' (<G.H.에 따른 수난>258쪽)고 리스펙토르를 소개한다. '몸통 한 가운데가 꺾인 존재는 암컷일 수밖에' (<G.H.에 따른 수난>125쪽) 없다는 소설의 문장에서 배수아는 소설의 내장을 읽어 낸다. 식수는 도시의 구불구불한 내장을 지나치고 나서 '하나의 집, 하나의 거실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대가로 치르는지'(<리스펙토르의 시간> 57쪽)를 목도한다. 생명과 죽음을 감각하는 리스펙토르의 시간이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글쓰기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출구> 중

    리스펙토르는 오랜 시간 '남미의 여성 카프카'로 소개되었다. 작가론, 작품론으로 이어지는 식수의 리스펙토르론을 드문드문 함께 읽으며 '여성적 글쓰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말하기'에 대한 더 많은 대화가 오고가길 고대한다. '두서없는', '한풀이'로 오해받은 여성 당사자의 글쓰기가 언젠가는 클라리시의 시간과 함께 흐르게 될 것을 이 책은 알고 있다.
    - 소설 MD 김효선 (2025.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