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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구효서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7년, 경기도 강화

직업:소설가

기타: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데뷔작
1987년 마디

최근작
2024년 8월 <소설, 한국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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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름

미지의 세계, 우연의 세계, 저 바깥의 세계를 부정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낯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낯선 세계는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엄연히 개입하며 한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가장 극적이고 격정적이며 어떤 인간도 피해갈 수 없는 낯선 세계가 사랑의 세계다. 사랑은 인류가 구축해 놓은 가치와 제도와 문화와 규범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병적인 증상을 빼곤 이런 경우가 없다. 우리는 사랑을 병이라 일컫지 않음으로써 가까스로 낯선 세계를 긍정한다.

노을은 다시 뜨는가

새 책으로 출간되어서 서점에 깔린다고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지는 거예요. 물론 나만 그러는 건 아니겠죠. 누구나 등단 초기의 작품들을 보면 그러겠죠. 엊그제 발표했던 소설들을 금방 묶어 쓴다는 게 매우 곤혹스럽게 느껴졌어요. 문법적 오류는 차치하고라도 어설픈 비유로 가득한 미숙 찬란한 문장들을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책을 내기로 이미 약속을 했으니 돌이킬수도 없어요.

늪을 건너는 법

1990년에 썼고 이듬해 책으로 나왔다. 24년 만에 다시 읽었다. 부끄럽지만 돌이킬 수 없다. 다행일까. 돌이킬 수 있다면 이 소설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때가 등단 3년, 직장생활 3년, 결혼 3년째였고 아이가 세 살이었다. 모든 게 세 살인 시절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이 소설을 쓰고, 부천 역곡동에서 광화문으로 출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녁엔 글을 쓰지 못한다. 이 소설을 끝내고 직장을 그만둔 뒤 다시 가진 적이 없다. 세 살적 치기를 떠올리며 조마조마 읽었다. 마지막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맘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참혹했으나, 다시는 이처럼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고 미숙한 열정이, 조금은 그리웠다는 말이다. 세월이 가면서 열기는 식고 말만 늘었다. 그토록 혐의를 두었던 말에 붙들려 24년을 휘둘렸다. 늪을 건넌다 건넌다 하면서, 서른 권이 넘는 말의 늪을 만들고 그곳에 빠져 지냈다. 건너려 하는 한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게 늪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건너려 하지 않고 스스로 늪이 될 때 비로소 건너게 되는 게 늪이라는 이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늪이 나를 건너게 했어야 했다. 24년 전 ‘그해 여름’ 혼돈의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해 여직 미망의 세월을 보냈다. 늪을 건너든 늪이 되든, 정작은 늪을 볼 줄 알아야 하거늘, 징후에만 휩싸여 휘갈기는 청맹이라 나는 아직도 말만 많고 남들처럼 깔끔한 작가의 말조차 못 쓰는가보다. 2014년 5월 - 개정판 작가의 말

도라지꽃 누님

엉뚱한 데 가서 되지도 않을 일에 애를 쓰느니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평범한 질리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처음 소설이라는 걸 썼을 때처럼, 쓴 것에 대한 결과보다 쓰는 일에 재미를 다시 붙이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열심히 많이 쓰면서도 내내 위기의식 같은 걸 떨쳐내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느리고 적게 쓰면서도 안정과 평온을 얻게 되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비로소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새록새록 생긴다. 만용과 물욕에 물들지 않은만큼 소설 또한 순명한 생명력을 가질 터이니,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터이니, 그걸 생각하면 신까지 난다.

랩소디 인 베를린

저는 이 소설이 작중 화자, 하나코의 소설이 되길 바랐습니다. 국가 자본 민족 인종 종교 등으로 에둘러진, 추상의 공동체에 가두거나 갇혔던 근현대사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지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코는 이 소설에서 종종 공간적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세계는 몇 개의 블록으로 재편되고 관세 장벽이 없어지며 통화(通貨)와 언어가 통일되어 갑니다. 세상은 좁아지고, 지구 반대편 이웃을 만나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졌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던 과거의 경계들은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과연 가둠으로써 갇히는 시절이 끝났는지를, 돌이켜 묻고 싶었습니다. 피부로 느꼈던 물리적 장벽은 없어졌습니다만, 우리를 더 크게 가두려는 전지구적 화폐의 움직임은 마침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미래의 불행한 디아스포라로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명두

흥행에 성공한 작품에 주는 상ㅡ대종상. 대종상의 존재 이유. 굉장히 영화적이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작품에도 주는 상ㅡ문학상. 문학상의 존재 이유. 굉장히 문학적이다. 그리고 한 칸 떼고 적힌 글, 전 세계 수백만, 혹은 수천만의 하루키 애독자들을 향해 허드레 작품이라고 일갈하는 일ㅡ문학상과 더불어 굉장히 문학적이다. 세 번 쓴 '굉장히'라는 단어 위에 세 번 다 진한 방점이 찍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오늘 그 메모 밑에 한 줄을 덧붙여야겠다. "나는 이런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사랑하여 문학상을 타나 보다." - 수상 소감 '터널에도 여백이 있었다' 중에서

비밀의 문 1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내 방은 저 비하르 주의 파트나와 바라나시에 떠돌던 특이한 인도 냄새로 가득 찼었다. 소설을 쓰는 순간만큼은 소설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소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세속적인 기대들을 하나하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쓸 때의 내 모습, 내가 거듭나고 싶은 모양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이란,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닐 것이다. 글쓰는 이에게 있어선 글을 쓰는 순간 이외의 시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내가 죽어 문학사에 내 이름이 남은들 그것이 나와 내 소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름지기 글을 쓰는 자란 글 쓰는 현재로서만 존재의 전부를 삼을 터.

비밀의 문 2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내 방은 저 비하르 주의 파트나와 바라나시에 떠돌던 특이한 인도 냄새로 가득 찼었다. 소설을 쓰는 순간만큼은 소설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소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세속적인 기대들을 하나하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쓸 때의 내 모습, 내가 거듭나고 싶은 모양이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이란, 호랑이가 죽어 가죽을 남기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닐 것이다. 글쓰는 이에게 있어선 글을 쓰는 순간 이외의 시간이 전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내가 죽어 문학사에 내 이름이 남은들 그것이 나와 내 소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름지기 글을 쓰는 자란 글 쓰는 현재로서만 존재의 전부를 삼을 터.

소년은 지나간다

엄혹한 시절을 관통해 왔으면서도 나이가 어렸던 탓에, 그리고 어른들이 끝내 말 안 하고 묻어둔 무서운 비밀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그저 애들은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는 이야기입니다. (……) 저는 그들의 얘기를 들은 거지요. 그리하여 제가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는지를 조금 더 알게 되었고요. 제 부름에 정겹게 응답해 이 땅의 그늘진 한 시절을 이야기해준 된소리 홑글자들. 고마워요.

시계가 걸렸던 자리

나는 그동안 쉼없이, 다만 소설을 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 소설에 가해지는 영과 욕을 생명체의 존재증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한때는 소설 쓰는 일을 분석과 탐구로 여긴 적도 있었다. 어줍잖은 질문의 늪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기 위해, 혹은 알리거나 최소한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소설을 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삶 자체의 눈물겨운 풍경들에 무작정 발끝을 채여 덩달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을망정, 생의 비의를 파헤치려는 치열성 따위에는 점차 미련이 없어졌다.

악당 임꺽정 1

<악당 임꺽정>의 출발은 이미 박제가 되었거나 괴물이 되어버린 임꺽정에 대한 이미지 해체, 이미지 모반을 통해 <임꺽정>에 대한 벽초의 정치성을 새삼스러이 환기시키고 반성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철저히 정치적이다. 벽초가 <임꺽정>을 통해 문학 실천을 도모했다면 나 또한 <악당 임꺽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문화 연구와 문학 실천을 도모한 것이라고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임꺽정의 이미지를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기 위해 나는 작품 속에다 여러 이야기들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분단된 조국의 한쪽에서 정치적 혼돈과 격랑의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실제적 경험과 의식이 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는 정치 권력의 양상이 과연 사백 년 전의 그것과 본질적인 면에서 유사성이 있을 것인지, 그 판단은 말할 것도 없이 독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악당 임꺽정 2

<악당 임꺽정>의 출발은 이미 박제가 되었거나 괴물이 되어버린 임꺽정에 대한 이미지 해체, 이미지 모반을 통해 <임꺽정>에 대한 벽초의 정치성을 새삼스러이 환기시키고 반성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철저히 정치적이다. 벽초가 <임꺽정>을 통해 문학 실천을 도모했다면 나 또한 <악당 임꺽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문화 연구와 문학 실천을 도모한 것이라고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임꺽정의 이미지를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기 위해 나는 작품 속에다 여러 이야기들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분단된 조국의 한쪽에서 정치적 혼돈과 격랑의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실제적 경험과 의식이 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는 정치 권력의 양상이 과연 사백 년 전의 그것과 본질적인 면에서 유사성이 있을 것인지, 그 판단은 말할 것도 없이 독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모쪼록 요요하시길!” 제목이 ‘요’로 끝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여튼 순해 보일 것 같아서. 열 권 정도 쓰고 싶었다. 요요거리며 자꾸 나올 것 같아서. 계속 이어 쓸 수 있다면 요요소설이라고 해야겠다. 마침 그런 한자도 있으니까. 樂樂. 어쨌거나 특별시나 광역시 같은 큰 도시는 이야기에서 빼기로 했다. 어수선해질 것 같아서. 한갓진 곳에는 꼭 맛있는 것과 예쁜 것이 숨어 있기 마련이어서 음식과 꽃 이름을 부제로 달기로 했다

인생은 깊어간다

떠오르는 이런저런 추억들은 모두 얼마간의 슬픔과 설움이 섞여 있었다. 명장면이 되려면 그런 부위를 깔금하게 발라내 버려야 했다.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외려 그런 부분들을 포함해야 비로소 정말로 아름다운 장면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치달았다. 지난 세월의 가난과 설움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가. 손가락이 자꾸 자꾸 접혔다. 당시로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만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큰 행복의 씨앗은 작은 눈물들이 키우는 것이라고. 다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파노라마라는 것도 지나가는 현상이다. 지나가지 않으면 떠올릴 수도, 그래서 아름답지도 못했을 얘기들이다. 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많은 얼굴들. 시간의 권력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지만 기억의 힘은 과거를 현재에 되살려놓고, 오래 전에 떠난 사람들을 초청해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게 한다. 나는 안다. 내가 때로 꽃과 나무와 물과 산이듯, 나란 나 아닌 사람들의 집합일 뿐이라는걸. 오늘 그이들의 이름을, 꽃이름 나무이름 물이름 산이름과 함께 하나하나 불러본다. 그리고 멀리 있는 그이들 속에 내가 살아 있음을 가만히 느낀다.

저녁이 아름다운 집

여전히 존재했고 존재할 것들은 인간이 그걸 무어라 이름하든, 부르든, 형용하고 감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의 명명과 요구와 느낌대로 변신하거나 둔갑해줄 수 없다. 인간이 멋대로 명명하고 부르고 감각할 뿐이며, 부르고 감각한 대로 믿고 착각할 뿐이다. 배발톱꽃은 평화롭지도 안 평화롭지도 않다. 매발톱꽃은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말하는 인간은 배발톱꽃이 평화롭거나 안 평화롭다고 말한다. 글 쓰는 인간은 배발톱꽃이 평화롭거나 안 평화롭다고 쓴다. 나는 말을 하는 인간이고 글을 쓰는 작가다.

타락

소설을 내버려두고 나는 그것들과 거기서 도대체 뭘 한 걸까. 그런데도 소설은 써졌고, 써졌다는 게 경이로웠다.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쓰는 버릇이 달라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장편을 쓴 뒤로 단편도 다르게 써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 얻은 작업실 밖으로는 산자락이 보인다. 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려는가. 오늘도 자주, 너무도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니 말이다. 일어나 산자락을 바라본다. 날마다 다르고 시시각각 다르다. 돌아와 앉아 또 몇 자 적는ㄷ나. 나는 내가 전에 어떤 작가였는지 잊고 싶은가 보다. 잊고 싶은 마음이 자꾸 또 다른 소설을 쓰게 한다. 자꾸자꾸. 나는 그것이 시방 고맙다.

통영이에요, 지금

“먼 이야기는 저 먼바다로부터 오는가 봐요” 동피랑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산양유 셔벗에 에스프레소를 부어 먹다가 김필의 <청춘>을 듣게 되었지요. 그 노래에 붙들려, 앉은 자리에서 이 소설의 첫 챕터를 썼어요. 아는 사람은 알지요. 김창완이 1981년에 부른 노래라는 걸.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정말로 많은 청춘들이 다 피기도 전에 푸르게 푸르게 스러져갔던 엄혹한 시절이었어요. 그래요. 먼 이야기는 저 먼바다로부터 오는가 봐요. 푸르지만 시리고 못내 아팠던 청춘의 빛깔이니까요. 깊게 사무쳐 좀처럼 바랠 줄 모르는. 다시 봄이 오고, 올해도 남쪽 바다 그 도시엔 길 따라 벚꽃이 피겠지요. 소설 속 박희린은 저와 같은 해 태어났어요. 그해 발표된 노래가 있어요. 박재란 선생의 <산 너머 남촌에는>이죠. 해마다 봄바람은 남에서 오고, 어느 것 한 가지도 실어오지 않는 게 없다는 노랫말이 참 좋네요.

풍경소리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쓴다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명분도 없다는 사실을 무섭게 깨닫습니다. 내가 깨닫는다기보다는 깨달음이 나를 무찌르듯 육박해옵니다. 이 전율 앞에서 저는 한없이 졸아든 채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듯 한 줄 한 줄 적습니다. 한 번 쓰고 열 번 읽던 것을 한 번 쓰고 백 번을 읽습니다. 일주일 걸리던 분량에게 한 달을 내어줍니다. 작업은 한없이 더디고 더디고 길고 길어집니다. 그래도 이 작업을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쓰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즉각 존재를 환수당하는 것이 소설가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과연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포와 전율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더 진짜 잔혹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려나 그저 쓴다고 소설가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쓰되, 다른 것이 아닌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이니까요. 소설이랍시고 썼는데 소설이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것만 못하고 그것은……. 이런 절박한 계제였으니 제가 심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이라니요. 그렇겠습니다. 놀라움 없는 기쁨이 기쁨이겠습니까. 그리고 생명 연장의 기쁨을 이길 기쁨이 있을까요. 놀랐지만 고맙게 상을 받습니다. 십년감수가 아닌 십년가수加壽가 되는 거네요. 정말 기쁩니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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