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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017
  • 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은이), 이재영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같은 것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피로사회>에서 시작한 한병철의 신자유주의 비판, 이번에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나와 너의 구분을 없애는 세계의 폭력을 고발한다. 다름으로 드러나는 인간성이 사라지고, 다름을 인정하며 공동체를 모색하던 사회는 유명무실해졌으니, 이제 서로는 서로에게 테러일 뿐이고,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었다는 분석인데, 그의 일관된 시선이 다소 힘겹다가도, 낭떠러지 앞에 선 인간과 세계의 진면목을 마주하면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엄중한 현실 앞에서 누군들 해법이 있겠느냐마는, 일련의 저작으로 “고유한 사유 전통”을 만들어냈다고 평가 받는 그가, 마찬가지로 타자가 사라지는 시대에서 선택한 가능성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자유마저 자기착취의 근거로 작동하여 더는 저항과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진정성이란 말은 그 진정성과 무관하게 코웃음거리가 되는 관계에서, 서로를 환대할 타자를 어떻게 상상하고 체현할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들어올릴 용기가 나지 않는 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 서로를 확인하며 경청할 소리를, 화음은커녕 파열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쥐어짜내야만 할 텐데, 여전히 숨이 턱 막힌다.

  • 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선대인 (지은이)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2월 "우리가 바꿔야 할 것, 가져야 할 것"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발달은 미래 일자리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다.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또 새로 생길까. 자동화의 물결을 피해 살아남는 직업은 뭐가 있을까. 이처럼 우리는 그동안 기술 공학적 관점에서 주로 이 문제를 바라봤다. '사'자가 들어가는 전문직을 포함한 많은 직업이 자동화로 인해 사라질 것이라는 보고서는 이제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서 무뎌진 걸까. 선대인 소장의 이번 책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다. 당장 5년 앞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망의 차원을 넘어, 직면한 일자리 문제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일의 미래는 훨씬 복합적이다. 기술의 발전 못지 않게 기술의 수용 여부 역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스포츠 심판은 로봇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땅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내리찍으며 삼진 아웃을 선언한다거나 선수의 항의에 꿈쩍도 하지 않고 레드카드를 꺼내 드는 심판의 모습은 스포츠의 또 다른 묘미이며 쉽게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또한 가능하다. 그밖에도 일하는 시간과 방식의 변화, 소득 배분 방법, 정부 정책과 산업 구조 재편에 따라 일의 미래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끝으로 선대인 소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교육은 미래 산업에 필요한 인재 배출뿐만 아니라 앞선 모든 논의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과제다.

  • 그해, 역사가 바뀌다
    주경철 (지은이)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인류 역사 다섯 번째 변곡점은 무엇일까?"

    1492, 1820, 1914, 1945. 네 숫자에서 공통점을 찾아보자. 힌트 하나, 네 숫자는 모두 서기 연도를 나타낸다. 힌트 둘, 이 숫자를 고른 이는 역사학자다. 이쯤 되면 대략 어떤 숫자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떠올릴 법도 한데, 1492년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945년과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연결했다면, 정답에 절반은 다가선 셈이다. 다른 두 숫자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다. 나머지 절반의 정답은 넷을 한데 묶는 시선에 있으니 말이다.

    <대항해시대>로 알려진 역사학자 주경철 교수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네 개의 변곡점을 꼽고, 인류가 그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에 따라 오늘날 세계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유럽이 주도한 근대 세계의 형성을 이끈 정신의 기원, 대분기라 불리는 동양과 서양의 전환, 문명과 자연의 균형이 인류에게 넘어온 복잡한 과정, 폭력과 평화의 기로에 선 현대 문명은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고민하며 떠오른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마주한 오늘이 다섯 번째 변곡점일 수도 있을 터, 오늘의 역사를 만든 인류의 도전 속에서 여전히 남은 과제와 새롭게 마주해야 할 질문을 찾아보자.

  • 안드로메다 성운
    이반 예프레모프 (지은이), 정보라 (옮긴이) | 아작 | 2017년 2월 "소비에트 유토피아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유토피아 소설'이다. 보통 낙원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유토피아를 다룬 소설은 사실 재미있을 수가 없다. 소설을 전개할 만한 갈등의 여지가 완전히 해소된 태평성대의 공간이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소비에트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는 우주로 눈을 돌렸다. 완성된 사회 속에서 자라난 인격체들이 외계인(즉, 다른 세계관과 인격)을 만나고 우주의 물리적 위협에 대응하면서 모험을 수행한다. 그래서 <안드로메다 성운>은 재미있는 유토피아 소설이 되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재미있는 유토피아 소설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재미가 있다. 모험의 전개 자체도 신나지만, 목숨을 건 위험에 직면해서도 긍정성을 잃지 않고 다른 인간을 깍듯한 인격체로 대하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그 진지함이 어쩐지 희극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드로메다 성운>이 희극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지금 이 세계가 그만큼 뒤떨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쩌면 인류는 정말로 저렇게 기품과 의지와 명랑함을 함께 갖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다른 소비에트 소설들, 이 소설과 닮았지만 당시의 현실에 짓눌렸던, 어두우면서 어딘가 환상적인 작품을 떠올리게 하면서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나는<안드로메다 성운>을 읽으며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를 떠올렸다. 우주를 향해 솟아올라 전진하는 이들과 끝없이 밀려오는 현실에 저항하는 이들은 같은 슬로건을 공유하는 동지들이다. 그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이 인류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어쩌면 이는 슬로건이라기보다는 기도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드로메다 성운>은 문학이 선사한 가장 신나고 유쾌한 찬송 중 하나일 것이다.

3.72017
  • 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은이)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사랑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의 주체는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사랑에 '빠진', '들린' 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하고 엇갈리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순간들. 이승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어다보고 보고서를' 쓰듯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이 간단한 문장이 서술하는 상황에도 그들 각자의 역사가 있고, 사랑하는 혹은 사랑할 수 없는 맥락이 있다. 이승우의 정련된 문장은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으로 돌아가 그 마음의 자리를 되짚는다.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말하기도 했던 작가 이승우가 5년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생의 이면>, <지상의 노래> 같은 작품을 통해 존재, 신앙 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본다. 현미경 같은 문장이 들여다보는 마음의 움직임, 여러 번 읽고 곱씹기 좋은 사랑에 관한 통찰들이 깊은 사유를 권한다.

  • 꿈은 토리노를 달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은이), 민경욱 (옮긴이) | 비채 | 2017년 2월 "히가시노 게이고, 고양이와 토리노를 달리다"

    일본을 대표하는 만능 이야기꾼이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손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에세이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책은 스키점프 경기만 열리면 침을 튀기며 해설할 정도로 동계 스포츠 마니아인 작가의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관전기를 담고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시작되는 에세이는 애묘 '유메키치'가 사람이 되어 작가와 함께 동행한다는 상상력이 더해져 흥미롭게 그려진다. '유메키치'와 환상의 한 팀이면서도 시종일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웃음 짓게 된다. 스포츠 종목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자랑하는 해설자로, 귀여운 스포츠 팬으로서, 소설에서 발견하기 힘든 새로운 면모를 이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하계 올림픽 관전기 <시드니!>와 비교하며 읽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줄 것이다.

  •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김민철, 김승은, 김영환, 김진영, 노기 카오리, 조한성, 조시현, 김미경, 김정미, 마메타 도시키, 소라노 요시히로, 야노 히데키, 야마모토 나오요시, 우에다 케이시, 이치바 준코, 이희자, 장완익, 후루카와 마사키 (지은이), 민족문제연구소 | 생각정원 | 2017년 3월 "강제동원 100년, 분쟁을 넘어 역사를 마주하라"

    해결 가능한 역사라는 게 가능할까? 벌어진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고, 누군가 겪은 일은 아무도 겪지 않은 일로 바꿀 수 없으니, 사실을 밝히고 잘못을 인정하고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하는 게 최선이겠고,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표현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억지로 말을 만들어 지난 역사가 정리되었다고 마침표를 찍고는, 서둘러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자고 외치는 모순이 오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오늘 한국에 얽힌 역사의 모순을 풀어보려 기획되었다. 최근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논란을 빚은 군함도를 시작으로, 시베리아에서 파푸아뉴기니까지, 일제가 강제로 끌고간 조선인의 삶이 남아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 취재했고, 길고 긴 세월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붙잡고 살아온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최근 한일 위안부 합의가 그러했듯, 이들은 고통을 받았을 뿐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분쟁이든 협상이든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잊힌 그들을 불러내 망각을 기억으로 되돌리는 일은, 이렇게 역사를 마주하는 데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 최고의 설득
    카민 갤로 (지은이), 김태훈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3월 "그저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공적인 자리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기업 면접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개인적으로'라는 말머리를 달며 나의 생각조차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우리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째서 '내 이야기가 가장 강력한 자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어제도 좋고 지난 주말도 좋다. 가족, 친구, 동료와의 식사 혹은 티타임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모두 유능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청중이나 상황에 알맞게 각색되는 순간, 그것은 때때로 돈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한다. 기법이라고 하니 어딘가 거창하다. 같은 이야기를 조금 더 맛깔나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해두면 어떨까. 어쨌든 날것 그대로였던 우리의 이야기에는 숙성과 가열, 그리고 약간의 양념이 필요하다. 저자 카민 갤로는 이야기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명사 수십 명의 이야기를 빌어 독자를 설득한다. 책은 이야기가 왕이고 우주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야기를 소비하는 지금 우리의 우주에서라면 더욱 그렇겠다. 수치, 통계, 정보는 그 다음 문제다.

3.102017
  • 작은 친구들 1
    도나 타트 (지은이), 허진 (옮긴이) | 은행나무 | 2017년 2월 "어째서 진실은 밝혀져야 하는지"

    누군가 죽고 나면 그 사실은 돌이킬 수 없다. 억울하거나 비극적인 죽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 앞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만큼 아까운 때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언가를 깊이 좋아하는 한, 그 사람의 마음은 애도를 필요로 한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과거를 떠나보내는 데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납득'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떠나보내기 위해 가지고 있어야 할 슬픔에 물음표가 붙으면 그 슬픔은 흘러갈 수가 없다. 범인을 찾고 시신을 수습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종료'되기 전에는 슬픔은 온전히 슬픔이 되지 못한다. 냉혹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논리에 따라 죽은 사람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면, 그 죽은 이를 사랑했던,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도나 타트의 <작은 친구들>은 이 해결되지 않은 슬픔에 대한 탐구다. 집 마당에서 목이 매달려 죽은 아이가 있고, 사건은 범인을 찾지 못한 채 미결로 남는다. 가족들은 그 슬픔과 자책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상 무너져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해리엇은 사건 당시 갓난아기였던 가족의 막내다. 사건 후 12년이 지나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에 자리잡은 해리엇은 겉모양만 유지한 채 붕괴한 가족의 삶을 되찾기 위해 오빠를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 한다. 오직 진실만이, 그때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장악한 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해리엇이 탐문과 추리와 여정을 통해 밝히려는 것은 범인의 정체지만, 이 여정은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진실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방법으로 미스터리에 맞서는 해리엇의 이야기는 꽤 느리고 자주 망설이지만, '슬픔을 쟁취'하려는 이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스릴러의 근사한 템포로 뽑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느린 템포를, 이야기 속의 그 작은 망설임과 의심들을 지지한다.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김대식 (지은이) | 민음사 | 2017년 3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질문 찾는 법"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전작 <빅 퀘스천>에서 인류가 가장 오래 묻고 답해온 질문에 가장 최근에 찾아낸 해법까지 찾아 붙이고는, 여전히 풀리지 않아 다시 확인하고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전하며 이야기를 마치는 바람에, 속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읽는 이에게 궁금증만 남겼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해답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찾으라 말하는 그의 일관된 태도에 비추어 보면, 그가 던진 질문은 해답을 향하기보다는 읽는 이에게 생겨날 새로운 질문을 기대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질문왕 김대식 교수가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고 읽으며 숱한 질문을 찾은 책들, 여전히 들춰보며 미처 찾지 못한 질문을 찾는 책들,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먼저 던지며 새로운 질문으로 이끄는 책들을 되짚으며, 책을 어떻게 대하고 읽을 때 뻔한 해답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있는 질문을 마주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책의 차례를 펼쳐 그가 찾아낸 질문을 보며 각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진 책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거나 그가 소개하는 책에서 그와는 다른 질문을 찾아 생각의 단초로 삼는다면, 그가 이 책에 숨겨놓은 (해답 아닌) 질문을 찾는 데에 성공했다 하겠다.

  • 여중생A 1~3 세트 - 전3권
    허5파6 (지은이) | 비아북 | 2017년 3월 "그냥 내가 나인게 잘못인가요?"

    <아이들은 즐겁다> 허5파6의 신작으로 네이버 일요 웹툰 연재분이 단행본 세 권으로 출간됐다. '2016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하며 스토리의 저력을 보여준 이번 작품에서는 여중생 A, 주인공 장미래의 일상을 통해 사춘기, 가정폭력, 왕따, 게임중독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밀도 있게 풀어낸다.

    '원더링 월드' 라는 작품 내 게임에서만 컬러로 존재하는 미래의 일상은, 집과 학교라는 실제 공간에서는 오히려 흑백으로 표현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긴장감과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있었을 법한 현실적인 캐릭터들로 그 흑백의 공간은 더욱 강조된다.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 만화. '가장 간단한 그림으로 당대를 드러내고, 위로하는 작품' 이라는 '2016 오늘의 우리 만화상'의 평은 이 작품을 가장 잘 소개한 문장이 될 것 같다.

  • 변신돼지
    박주혜 (지은이), 이갑규 (그림) | 비룡소 | 2017년 2월 "제6회 비룡소 문학상 대상 수상작"

    돼지로 변한 토끼를 상상해 본 적 있는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깜찍함에 미소 짓게 될 것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돼지가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사랑스러운 동화. 어떤 동물이든지 돼지로 변신한다! 처음엔 토끼가 그 다음엔 강아지가 설마설마 했던 햄스터까지, 찬이네 집에 온 동물들은 어김없이 돼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인간들과 한 집에 살게 된 지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에! 이 어처구니 없는 소동은 왜 벌어지는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루 아침에 돼지로 변해버린 동물들을 보여 아연실색하는 찬이네 식구들! 독자들도 찬이 가족과 한마음 한뜻으로 가슴 졸이고, 쉽게 풀리지 않는 변신돼지의 비밀을 추리해나간다. 이색적인 설정으로 시작해서 활기차게 쭉쭉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힘, 동화 속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한 100점짜리 일러스트는 만족, 대만족이다. 웃는 모습까지도 서로 닮아가는 가족들간의 끈끈한 정, 반려동물을 보살피고 아껴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넉넉하고 푸짐한 정을 그려낸 이야기. 변신돼지들의 살인미소에 상큼한 에너지가 퐁퐁 솟아난다.

3.142017
  • 물고기는 알고 있다
    조너선 밸컴 (지은이), 양병찬 (옮긴이) | 에이도스 | 2017년 2월 "물고기가 인간에게 알려준 것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아는 일에 열심을 더할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알지 못하는 부분에는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품은 말이다. 인간은 전자에는 열과 성을 다했지만, 후자는 늘 뒤늦게 깨닫곤 했다. 덕분에 오해와 핍박을 받은 대상이 여럿인데, 오늘 소개할 주인공은 물고기다. 인간은 사람 마음 속뿐 아니라 물 속도 거의 모른다. 당연히 그 속에 사는 물고기의 생태 역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덕분에 물고기는 3초면 까먹는 바보로, 풀어줘도 같은 낚싯바늘을 다시 물 정도로 생각이 없는 생명으로 저평가 되기 일쑤였다.

    동물행동학자 조너선 밸컴은 최근에야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 물고기의 진면목을 하나씩 들려주는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감각에서 시작해 공포, 스트레스, 쾌감, 놀이 같은 의식, 지능과 학습 그리고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인간의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공기와 물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만들어내는 생명 유지와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이전에 주목하던 차이보다 생명으로서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물고기를 대하는 인간의 윤리적 태도까지 고민하니, 깊은 바다에 직접 들어가지 못해도 시야가 그곳까지 닿아 깊고 넓어지는 기분이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 심용환의 역사 토크
    심용환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휘말리고 싶지 않지만 풀어야만 할 역사논쟁"

    가급적 휘말리고 싶은 않은 논쟁, 바로 역사와 정치다. 가장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며 공감대를 넓히고 함께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할 영역이지만, 그만큼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서로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살자는 결론에 이르기 쉬운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 논쟁에서는 앞선 시기를 겪어보지 못했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이들과 변화된 오늘의 현실을 모르면 가만히 계시라는 이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으며 지금도 둘 사이의 거리는 계속 멀어지는 중이다.

    역사가 심용환은 위안부, 친일파, 식민지근대화론부터 이승만, 박정희, 고대사까지, 비슷한 논란이 반복되면서 공감대는커녕 유언비어와 상호비방만 늘어가는 혼돈의 역사논쟁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는다. 당연히 시작은 역사적 사실이다. 논쟁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사실을 바로잡으며, 역사적 사실에서 논리적 주장을 이어가는 방법을 대화체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더불어 역사적 사실에만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논쟁이 이어지는 정치적 맥락과 각자의 이해관계를 폭넓게 살펴보며 각각의 주장이 서 있는 근거를 확인한다. 이 대화에 이어질 한 마디는 각자의 선택일 터, 모쪼록 역사를 가르는 강이 더 넓고 깊어지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 엄마의 수학 공부
    전위성 (지은이) | 오리진하우스 | 2017년 3월 "초등 수학의 기본, 자연수의 사칙연산"

    <초등 6년이 자녀교육의 전부다> 저자 전위성의 초등 수학 연산 지도법. 수능 수학 상위 1퍼센트의 성적으로 공주교대 수학교육과에 입학, 2006년부터 10여 년 간 초등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저자는 고교 시절과 삼수에 실패할 때까지는 '수포자'였다. 수포자 시절의 잦은 실수와 시간 부족의 원인은 부실한 연산력이었고, 수년 동안 수학에 매달리면서 자연스럽게 탄탄한 연산력을 갖춘 덕분에 수포자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탄탄한 연산력,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부터 4학년 1학기까지 배우는 자연수의 사칙연산이다. 이 기초 연산에 통달해야 초등 수학을 마스터할 수 있고, 이는 중고등 수학 실력으로 연결된다. 초등학생의 36.5%, 중학생의 46.2%, 고등학생의 59.7%가 수학을 포기하는 현실, 학교와 학원에서는 자연수의 사칙연산을 개념과 원리에 근거해 가르치고 있지 않다. 자녀를 수학 우등생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엄마표 수학 교육'이 필요하다. 경험과 노하우도, 전문적인 수학 지식도 빈약한 엄마들을 위해 초등 수학의 기본, 자연수의 사칙연산을 학년별, 월별로 정리해 설명한다.

  • 데프 보이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은이), 최은지 (옮긴이) | 황금가지 | 2017년 3월 "농인의 삶, 미스터리 소설에 녹여내다"

    <데프 보이스>는 한 농아시설에서 17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살인사건에 얽힌 전말을 밝히려 하는 수화 통역사의 이야기를 그린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란 청인을 뜻하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인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가 살인사건의 진실과 더불어 농인의 세계를 둘러싼 편견과 차별에 맞선다.

    이 소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농인 사회에 대한 꼼꼼한 묘사에 있다. 서로 다른 체계를 가진 두 종류의 수화와 그에 따라 나뉘어진 두 부류의 농인들, 농인을 일종의 정신박약으로 취급해 형량을 감해주는 특별법 등 일본 사회가 농인들을 바라보는 시점은 물론 농인 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딜레마까지 짚어주고 있다. 농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청인이라는 이유로 청인 사회와 자기 가족의 소통 창구가 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얻은 소년이 경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농인에 얽힌 사건에 부딪혀 경찰 사회로부터도 도태되고, 다시 수화 통역사로 법정에 서서 자신의 상처와 그를 둘러싼 농인 사회의 상처들을 대면하는 순간들은 끊임없이 작은 감동들을 안겨준다. 또한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데프 보이스> 역시 농인의 특색을 이용한 트릭을 준비해서 주제의식과 잘 들어맞는다. 범죄 미스터리를 소재로 사회의 편견을 고발하는 드라마를 엮어낸 <데프 보이스>는 누구나 인상 깊게 읽을 수 있는 감동적인 소설이다.

3.172017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지은이), 김규태, 박리라 (옮긴이), 김추성 (감수) | 글항아리 | 2017년 3월 "인간을 잃어버린 전쟁, 사람을 발견하는 전쟁사"

    조선인 양경종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38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관동군에 배치된다. 이후 포로로 붙잡혀 소련군으로 강제 복무를 하다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었고, 이번에는 독일 군복을 입고 프랑스로 파병되었다가 미군 포로로 붙잡힌다.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과거를 숨기고 살다 1992년 일리노이 주에서 생을 마감한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기구한 이야기지만, 6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주어진 행운(?)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 하면 대번에 히틀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떠오르지만,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가 그리는 전쟁사의 시작은 한 사람 양경종의 사연이다. 개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전쟁 속에서 개인의 삶을 속속들이 뒤바꿔버린 전쟁의 전면적 영향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사건을 일으킨 인간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견디며 새로운 출구(이자 다른 지옥으로의 입구)를 만들었는지를 읽다 보면, 비로소 이 전쟁의 총체와 세부가 드러나고,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이 엿보이고, 역사의 책임과 전망을 되새기게 된다.

  •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지은이), 배수아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고독 속의 작은 축복"

    책의 이름이 <산책자>인 건 아마 작가의 삶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각종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써 명성을 얻었으나 끝내 아웃사이더로 남은 채 여기저기를 떠돌았던 사람. 결국 직접 정신병원에 찾아가 입원하고 곧 절필한 뒤, 생이 다할 때까지 매일 걸었던 사람. 크리스마스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서 숨을 거둔 이 고독한 천재에게 부여할 영예로 '산책자'만큼 어울리는 단어는 없어 보인다.

    그가 남긴 짧은 소품들 역시 그의 삶에서 느껴지는 짙은 고독의 흔적들을 갖고 있다. 때로 웃음을 머금게 하고 때로는 동화 같은 전개가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언제나 사건 또는 현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화자는 실제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기보다는 약간씩 미끄러져 스쳐가기를 택한다. 그는 모험가가 아니라 산책자이며, 산책에서 만나는 풍경(으로서의 세계)란 산책자에게 상념을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이미지 또는 판타지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발저의 세계는 환상소설적인 설정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꿈결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섬세하게 현실을 묘사하는 관찰자와 몽상 또는 명상에 잠겨 세계를 바라보는 산책자의 특성을 모두 갖춘 발저의 세계는 독자들을 '그때 그 곳'이면서 그 곳이 아닌 특이한 장소로 데려간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 어딘가 고요한 세계. 말하자면 흔들리지 않는 중심 같은 게 있다. 이런 특이하고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를 찾는 이들이 많음을, 특히 책을 사랑하는 이들 중에는 무척 많다. 그 분들 모두 이 책에 머물러, 고독과 함께 평안하시기를 바란다.

  • 오래된 생각
    윤태영 (지은이)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또 다른 노무현의 이야기 "

    우리가 잘 아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이야기. 태생부터 비주류였던, 고졸, 사법고시 합격, 1987년 부산 민주화운동, 청문회 스타, 2003년 기적 같은 당선, 종합부동산세와 행정 수도와 임기 단축 개헌, 퇴임 후의 고초와 2009년의 비극적 죽음. 그의 인생은 소설로 적기에 모자람이 없다. 부산, 신촌, 종로를 잇는 그 길을 '노무현의 필사'라 불린, <대통령의 말하기>의 저자 윤태영이 팩션의 형태를 빌어 다시 걷는다.

    '그'는 승리하고, 패배하고, 극적으로 승리하고, 다시 패배하고, 패배함으로써 승리한다. 2009년 5월 이후 몸과 마음의 병을 이기기까지 저자는 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청와대 대변인 진익훈과 대통령 임진혁의 이야기. 알려진 사실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소설적인 '사실'들이 결합해 독자와 소설 사이의 감정적 거리가 좁혀진다. 역사의 한 단락이 교차하는 순간 다시 읽는 그에 관한 이야기.

  • 왜 맞춤법에 맞게 써야 돼?
    박규빈 (지은이) | 길벗어린이 | 2017년 3월 "못처럼 쉬는 날, 일해라 절해라?"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글로 생겨난 황당한 상황을 통해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유쾌하게 설명, 초등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왜 띄어 써야 돼?>의 후속작. 이번에는 맞춤법을 틀리게 쓴 훈이의 일기 때문에, 훈이 가족은 또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된다. 못처럼 벽에 박혀 버린 아빠, 동생에게 프로레슬링 기술을 발휘하는 엄마, 끝없이 일하고 절하고를 반복하는 훈이까지. 일기장 속 이야기가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리는 판타지를 통해 맞춤법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림책.

3.212017
  • 랜들 먼로의 친절한 과학 그림책
    랜들 먼로 (지은이), 조은영 (옮긴이) | 시공사 | 2017년 3월 "복잡한 것들을 간명하게 풀어내는 고수의 실력"

    엉뚱하다고 생각한 일이 그럴 법하거나 익숙한 일이 되어갈 때 세상은 좀더 즐거워지는 게 아닐까. <위험한 과학책>에서 지구의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여 동시에 점프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야구공을 광속으로 던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등 대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며 지나칠 법한 질문에 작정하고 달려들어, 질문을 던진 이조차 당황스러워 할 답변을 쏟아낸 랜들 먼로가, 이번에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단어만으로 복잡하고 어렵다고 오해 받는 과학 지식을 풀어낸다.

    특히 제한된 단어 사용이 설명에 묘미를 더하는데, 1000개 이내의 단어로 국제우주정거장과 헬리콥터, 주기율표와 인체 기관 등 세세한 구조와 다양한 쓸모를 빠짐없이 표현하고 풀어내려니 고민이 적지 않았을 터, "우리가 밟고 사는 커다란 바위 판"이 무엇일지, "물을 나르는 바위"와 "불타는 바위산"은 어떤 말을 바꿔 표현한 것일지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름보다 쓸모와 원리에 무게가 쏠리며 랜들 먼로의 의도를 이해하고 즐기게 된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냈다고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어렵더라도 흥미롭게 풀어내겠다고 진솔하게 말하는 랜들 먼로에게서 오랜만에 고수의 풍모를 느낀다.

  • 인구와 투자의 미래
    홍춘욱 (지은이) | 에프엔미디어 | 2017년 4월 "일본의 실패 vs 다른 나라의 성공"

    '인구절벽'처럼 긴박감을 주는 신조어가 또 있을까. 최근 몇 년 동안 인구절벽 프레임으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주장이 큰 호응을 얻어 왔다. 그들의 주장을 듣다 보면 당장 집을 팔고 주식시장에서 철수해야 할 것만 같다. 한국인은 지금의 한국 경제를 1990년대 일본의 장기 불황과 동일시하는 분위기에 대체로 거부감이 없으며, 감정적으로 쉽게 동조한다. 물론 누구나 자산시장의 붕괴를 주장하거나 기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단편적 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근거를 제시해서는 곤란하다. '신뢰할 수 있는'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박사는 이 책에서 한국의 자산시장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장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주장은 그가 제시하는 생생한 데이터가 증명한다.

    이 책은 경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을 세계 각국의 예를 통해 살펴보고, 인구절벽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인구절벽과 그로 인한 자산시장 붕괴론을 통쾌하게 반박하는 이 책을 보며 투자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한국의 경제 상황이 마냥 좋다는 것은 아니니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느냐다. 이제 예전 같은 대박은 없다. 그러나 돈을 벌 수는 있다. 데이터를 읽어내는 눈과 자산시장이 움직이는 원리를 아는 힘이 그 비결이다. 그것은 홍춘욱 박사가 투자 지침서이자 경제 교양서로서 이 책을 펴낸 이유이기도 하다.

  •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김대식 (지은이)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최후의 물음, 최선의 해답"

    인류의 문명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찾아 헤맨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지루할 틈이 없는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오판과 수정을 거듭해온 지난한 경과였고, 그리하여 오늘날 다다른 정답이 바로 뇌과학이다. 인간의 특질이 지능이든 정신이든 자아든 뇌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결론, 그렇다면 이대로 답안을 제출하고 끝내면 되는 걸까.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인류가 뇌과학이라는 정답을 찾아 지나온 과정을 복기하며, 뇌과학이 해결한 문제와 직면한 문제, 더불어 아직은 판단이 불가능한 영역을 살피며, 인공지능의 도래로 문제를 고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수천 년에 걸쳐 풀어온 문제의 해답을 비로소 제출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새로 작성해야 할 답이 무엇인지, 변하지 않는 이전의 답은 무엇인지, 철학의 물음에 답하는 뇌과학의 활약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 오리무중에 이르다
    정영문 (지은이) | 문학동네 | 2017년 3월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 되는 "

    오리무중은 목적지가 될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이 소설집이 다다르는 곳이기도 하다. 어린 개의 귀를 접었다 폈다 하는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시작점, 리듬감 있는 문장은 상황을 반복해 변주하고, 논리를 건너 뛰며 말을 이어나간다. 자신의 낭독회에 아무도 오지 않길 바라는 작가가 나 자신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었지만 내가 나를 들어 던질 수는 없어 나 대신 내 소설책을 내던질 때. (<개의 귀>) 혹은 순전히 재미로, 앞으로, 전혀 살고 싶지 않아서 혹은 너무도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겠어서 자살했거나, 아직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장차 자살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한 작가들의 작품들만 번역하는 것을 계획할 때. (<유형지 X에서>) 이 비극의 세계는 지극히 어두워서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

    <어떤 작위의 세계>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정영문이 발표한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말하기가 나선이 되어 이어진다. 그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덧 독자 역시 '영영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따라서 중얼거리며, 어지럽고 복잡하고 매혹적인 산책을 시작한다.

3.242017
  • 먹는 인간
    헨미 요 (지은이), 박성민 (옮긴이) | 메멘토 | 2017년 3월 "생(生)의 음식을 찾아 떠난 2년의 기록"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어떤 얼굴로 먹고 있을까, 또는 얼마나 못 먹고 있을까? 하루하루 음식을 먹는 당연한 행위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을까, 또는 의식도 못하고 있을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 헨미 요는 이런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방글라데시, 베트남, 필리핀, 독일, 러시아, 한국 등 기아, 전쟁, 재해, 빈곤의 현장들을 찾아 다녔다. 현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간직해온 사연과 기억들을 이 한 권에 담았다.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한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이나 음식을 먹는 풍경에 관한 스토리가 아닌, 처절하고 치열하고 긴장되는 현장 속 식(食)을 통해 생(生)을 탐구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음식 찌꺼기를 버리는 자와 사 먹는 자를, 필리핀에서는 일본 병사들에 의해 먹힘을 당한 주민들과 남겨진 그의 가족들을, 타이에서는 고양이 캔사료를 만드는 노동자들을, 그리고 한국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마주하며, '먹다'라는 영역에 숨겨진 분노, 슬픔, 증오의 장면을 포착해 문학적 필치로 그려낸다. 식(食)과 생(生)에 관한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2년의 기록은 경이와 감동의 순간으로 이끈다.

  • 알사탕
    백희나 (지은이) | 책읽는곰 | 2017년 3월 "'안녕' '나랑 같이 놀래?' 백희나 표 마법 알사탕"

    친구들은 만날 자기들끼리 논다. 구슬치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동동이는 혼자 논다. 새 구슬이 필요해서 문방구에 간 동동이는, 구슬 대신 색깔도 크기도 가지가지인 알사탕을 골랐다. 박하 향이 진한 체크무늬 알사탕을 입에 넣으니 갑자기 소파가 말을 한다. 점박이 사탕을 먹고는 8년 만에 강아지 구슬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 내내 함께 놀았다. 저녁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빠처럼 까칠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잠이 들자, 설거지하는 아빠의 등 뒤로 잔소리 대신 진심이 흘러나온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늙은 구슬이의 고단함, 잔소리쟁이 아빠의 속마음, 그리운 할머니의 안부. 그리고 친구, 친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건네는 인사, "나랑 같이 놀래?". 알사탕이 만드는 공감, 용기, 성장의 마법. 언제나처럼 백희나 표 마법은 따뜻하고 행복하다.

  • 버라이어티
    오쿠다 히데오 (지은이), 김해용 (옮긴이) | 현대문학 | 2017년 3월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안다는 소설가"

    책의 띠지에는 작가 후기에 실린 오쿠다 히데오의 문장이 실려 있다. "저는 앞으로 16년 후면 죽습니다." 이는 나오키상 수상 작가의 평균 연령을 대충 계산한 뒤 거기서 자신의 나이를 뺀 수치로, 굳이 통계의 함정을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그가 정말로 그때 죽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도 진지하게 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흰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은 그 배짱이 웃기다. 이렇게 웃긴 후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게 소설가로서의 오쿠다 히데오의 매력이겠다.

    단편과 대담들이 함께 들어가 있는 책 <버라이어티>는 이런 작가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딘가 삐딱하지만 사실은 괜찮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위기 또는 모험에 임하면서 삐딱한 소리들-비윤리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나사가 잘못 조립된 듯한-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눈치 보지 않고 삐딱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버라이어티>는 어떤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경쾌하고 따뜻한 기조를 잃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어느 때에나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특히 단편들 이외의 기고나 대담들도 단편들만큼이나 재미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여튼 웃긴 사람이다.

  • 보이지 않는 영향력
    조나 버거 (지은이), 김보미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사회적 영향력"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까. 유명 작가의 책? 광고를 많이 하는 책? 아니면,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내용이 아주 훌륭한 책? 아니다. 어제까지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베스트셀러다.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예로 들어보자. <해리 포터>의 성공은 필연이 아니었다.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리 포터>를 거절했던 십여 곳의 출판사를 나무랄 문제가 아니다. <해리 포터>는 우연한 계기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고 보는 게 맞다. 음원 사이트에서 '가요 Top 100' 을 통째로 플레이해본 경험이 있는가? 사회적 영향력은 인기 있는 곡을 더 인기 있게 만들고 인기 없는 곡은 더 인기 없게 만든다.

    전작 <컨테이저스: 전략적 입소문>을 입소문만으로 팔아 치웠다는 와튼스쿨의 조나 버거 교수는 이번 책에서 '사회적 영향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영향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남들이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는 곧잘 분석하면서도 나 자신만은 그 영향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로맨스와 불륜의 차이 같다. 책을 고를 때를 떠올려 보자. 2016년 최고의 책으로 꼽히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어떻게 구입했는가. 아니면 사 놓고 아직 읽지 않은 <총균쇠>도 좋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베스트셀러, 광고, 혹은 주위의 추천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주 미미하겠지만) 이 글 역시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다. 비즈니스와 마케팅에 근간이 될 통찰을 얻으면 더 좋겠지만 이 책은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보다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교양서로, 보이지 않게 전략적으로 입소문을 내고 싶은 그런 책이다.

3.282017
  •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지은이), 박선령, 정지현 (옮긴이) | 토네이도 | 2017년 4월 "이게 전부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이 책을 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타이탄(거인)'이란 표제가 붙은(엄밀히 말하면 붙었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이다. 말러 전문가인 칼럼니스트 김문경은 "자신에게 닥친 숱한 고난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하는 말러 자신을 그리기에 거인이란 표제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인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처음부터 1등도 아니었고 거인도 아니었다. 그들의 성공 노하우는 요행이나 꼼수가 아닌, 고난과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는 투쟁 방법과 다름없다. 다음은 <4시간>이라는 책이다. 10년 전 고작 서른의 나이로, 주 40시간을 근무하는 우리에게 '주 4시간 근무의 비결'을 외쳤던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팀 페리스다.

    <4시간>에서 자신의 성공 노하우를 거침없이 들려주었던 그는 무슨 이야기가 더 하고 싶었던 걸까. 당시에 이미 투자가로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각 분야의 일인자들을 만나 그들의 믿음과 습관들을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노트에서 가려 뽑은 정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있고, 꽤 쏠쏠한 팁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명백히 다르고 또 어려운 일이다. 그가 거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본인의 체험담을 곁들이는 이유다. 그는 강조한다. 작은 디테일이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오랜만에 말러 교향곡 1번을 들으며 이 책을 다시 읽는다. 거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은이), 이경아 (옮긴이),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페미니즘은 언제나 모두를 향한다"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이론과 실천이라 말한다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여성을 위한 이론과 실천이란 설명은 틀리지 않지만, 이런 설명에 감춰진 여성’만’을 위한 이론과 실천이라는 맥락은 잘못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특정한 이론이나 운동의 일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전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모두를 위한’을 따로 붙여가며 지난한 설명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지난 40여 년 동안 페미니즘 이론을 연구하고 실천에 매진해온 벨 훅스는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하며 남성을 배제하는 운동이 아닐뿐더러, 성차별주의에 더불어 펼쳐지는 인종과 계급의 문제까지 함께 살피는 포괄적인 관점이 분명하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어떻게 쌓이고 퍼졌는지, 여전히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파헤치며, 페미니즘이 응당 그러해야 할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역할과 의의를 짚어가는데, 복잡한 타래를 명확하고 간결하게 풀어가는 일관된 관점을 보면, 숱한 갈등과 다툼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한 페미니즘의 가치와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모두를 향하니, 이제 모두가 미래를 믿고 만들어야 할 차례다.

  • 햇빛마을 아파트 동물원
    정제광 (지은이), 국민지 (그림) | 창비 | 2017년 3월 "제21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수상작"

    동물과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이야기하는 동화. 초등학생 미오가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동물들은 귀엽다. 그 부드러운 털을 만지고 쓰다듬을 때면, 마음까지 덩달아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동물을 기르면 친구들에 항상 둘러싸여 외롭지 않다. 그래서 미오의 꿈은 커서 동물원을 만드는 것이다.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미오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동물원을 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희귀 동물 분양 비용을 마련하는 문제부터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미오는 동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고슴도치, 햄스터, 앵무새를 비롯해 주인공이 키우는 다양한 동물들의 습성을 옆에서 직접 관찰하듯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청소, 목욕, 먹이, 치료 방법 등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은 아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정보도 가득하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동물을 사랑하며 기쁨과 위안을 얻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며, 동물들의 권리와 자유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짚어나간다. 한 생명을 기르고 돌보는 일에 따르는 책임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사랑하는 이가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소년의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지은이), 정장진 (옮긴이) | 열린책들 | 2017년 3월 "세계 최고령 강도단, 카지노에 도전하다"

    티비에서 본 감옥이 양로원보다 좋아 보여서 감옥에 가고자 강도가 되기로 한 기상천외한 노인들. 발상부터 결론까지 내내 웃음이 나왔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의 속편은 미국으로 향한다. 이 속편은 마치 헐리우드의 속편 공식을 (마치 패러디인 양) 따르는 것처럼 보여서 그 컨셉부터가 웃기다. 범죄를 저지르기로 한 세계 최고령 강도단의 좌충우돌이라는 기본 기조는 유지한 채, 이번 속편은 더 큰 스케일의 모험과 시련, 특별한 능력을 갖춘 인물의 추가, 그리고 더 야심찬 유머 코드를 추가했다. 읽다 보면 본의아니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들이 꽤 많다.

    그러나 이 속편은 동시에 현재 북유럽의 복지 모델이 가진 맹점들을 고발하는 데에도 전작보다 열심이다. 기본적인 생존권에 대해서는 확실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복지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그 혜택은 말 그대로 생존권에 그친다. 국가의 복지 혜택은 노년의 삶을 연장시켜주지만 그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다. 애초에 메르타 할머니가 (귀여운) 강도가 되기로 한 것도 권태와 우울함을 돌봐줄 이가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이러한 쓸쓸함이 빗발치는 유머 속에 고스란히 삽입돼 있다. 함께 웃으며 읽다 보면 세상에 대해 좀더 넓은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312017
  •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마틴 피스토리우스 (지은이), 이유진 (옮긴이) | 푸른숲 | 2017년 3월 "살아갈 이유를 알려준 한 청년의 감동 실화"

    열두 살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한 소년이 원인 모를 병을 앓아 의식불명에 빠진다. 4년 뒤인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몸에 갇혀 지낸 지 13년이 지난 어느 날, 한 간병인에 의해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점차 건강을 회복하는 기적 같은 변화를 맞는다.

    책은 테드 강연으로 큰 화제를 모은 마틴 피스토리우스의 놀라운 삶에 관한 기록이다. 몸에 갇혔던 그가 세상과 다시 소통하기까지의 길고 긴 여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절망, 공포, 외로움이 반복된 지옥 같은 시간과 싸우면서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그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삶의 가치들을 일깨우고,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은이), 정연희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4월 "and의 신비"

    시련을 이겨내고 연극 각본가로 성공한 남자와 아름다운 그의 아내가 살아온 이야기.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남자 주인공 로토가 주도하는 '운명'이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여자 주인공 마틸드가 중심이 되는 '분노'가 나온다. 20대 초반에 만나 결혼한 이 두 주인공은 20년이 넘는 많은 세월을 공유했지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소설은 그들이 공유한 세월이 서로에게 다른 방식으로 각인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소설을 결혼에 대한 소설로 보자면 이러한 내용일 것이다. 정말로 영혼을 하나로 합칠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결말을 맺은 결혼조차 운명'공동체' 이상일 수는 없다. 로토와 마틸드는 많은 시간동안 서로를 사랑했지만 사랑은 상대를 더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는 않았다. 로런 그로프는 이 두 주인공의 내면 또는 영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서사 방식에 차이를 둔다. 로토의 삶은 연대기식으로 서술되는 반면 마틸드의 삶은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이어지며 시간 속을 오간다.

    그러나 이 서사 방식의 변경은 더 큰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전통적인 연극의 서사 형태와 유사하게 서술된 로토의 삶은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연극을 통해 삶의 구원을 얻은 그는 자신의 실제 인생조차 그 잘생긴 용모, 시련과 극복, 갈등과 해소까지 많은 부분들을 고대 연극처럼 보이게 한다. 조직적이며, 인과가 있고, 복선은 회수된다. 그가 갑자기 죽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렇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연극은 갑자기 중단된다.

    <운명과 분노>를 진정 완성시키는 부분은 갑자기 중단된 '운명'에 이어지는 '분노'다. '운명'은 그 마지막에 다다라 성공적인 연극이 되지 못한 채 부서져 버렸고, '분노'는 그 부서진 잔해들을 헤집으며 전진한다. 대부분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던 마틸드의 삶은 '운명'이 보여주었던 영웅 서사의 방식을 해체한다. 삶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그것을 하나로 이으려면 일종의 신화적인 환상이 필요하다). 마틸드의 오늘에 이어지는 것은 내일이 아닌 어제, 십수 년 전, 아주 어릴 때의 기억들이다. 그녀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반응한다. 이를 근대 이후의 문학에 대한 비유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노'가 '운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역사는 전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명과 분노>는 두 사람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전통적인 소설이면서 이를 통해 근대 이전과 이후의 문학사적 변천을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운명'과 '분노'는 딱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는 듯 느껴진다. 세상은 '운명'과 '분노'가 아니라 '운명과 분노'로 이루어졌다는 듯이. 그렇다면 이 소설을 다시 결혼 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운명과 분노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운명과 분노>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질문을 인상적으로 연출하는 데 그침으로써 또다시 자신이 좋은 소설임을 입증한다. 이 질문은 소설 속의 몇몇 장면들과 엮인 채 오래도록 독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 에고라는 적
    라이언 홀리데이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 흐름출판 | 2017년 4월 "절제와 겸손의 미학"

    <Tongue Fu>라는 책에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 책이 1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는 데에는 우리가 수없이 들어 온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격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그 적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내가 모르는 나의 적이 되어 잘 되던 일을, 사랑을, 더 나아가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자만심과 자신감, 겉치레와 내실, 열정과 냉정, 흥분과 침착, 말과 침묵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갈라놓는지를 보여준다. 술에 취하듯 자기 자신에, 일시적 성공에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자아를 통제하고, 특별함을 내려놓고, 자제력을 발휘하여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그 이상의 가치에 인생의 목표를 둘 것을 제안한다. 잠시 멈추고 한 발짝 물러나 차분히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물론, 애써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 아몬드 (양장)
    손원평 (지은이) | 창비 | 2017년 3월 "당신에게도 분명 아몬드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라고 소년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에게도 아몬드가 있듯, 이 소년에게도 아몬드가 있다. 머릿속 아몬드 같은 모양의 편도체가 유독 작아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소년 선윤재. 그는 슬퍼하지도, 미소짓지도, 분노하지도 못한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엄마, 기골이 장대한 할멈과 함께 그 묵묵한 얼굴로 하루하루 남들을 흉내내며 살아가던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이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고 만다. 그리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분노로 가득한 그가 쏟아내는 화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과 감정이 흘러 넘치는 '괴물'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완득이> 등을 독자에게 소개한 창비청소년문학상의 10회 수상작. 영화 연출을 전공한 작가 손원평은 윤재의 굳게 닫힌 입술, 곤이의 분노로 이글대는 눈빛을 눈에 그리듯 선명하게 연출해 낸다. 명확한 캐릭터가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통해 형상화 되고, 이야기는 매끄럽게 전진해 소년들의 고통 너머 자그마한 공감의 가능성을 향해 걸어 나간다. 감정이 없는 소년에 대한 감정 이입을 멈출 수가 없는 이야기, '괴물'인 그에게도 아몬드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