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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폭군의 신부 상.하 세트 - 전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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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하.
    대제국, 하패란의 황제인 진의 총비.

    눈을 떴을 때, 하리는 처음 보는 남자와 침대 위에 얽혀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몸, 하얀 살결 위에 피어 있는 민망한 흔적들.
    그녀의 비명 소리에 들어와 부복한 이의 목을 아무렇지 않게 벤 남자는
    피비린내 나는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사랑을 속삭인다.

    ─무섭다.

    인간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희대의 폭군, 진.
    그가 귀애하는 유일한 인간, 시하.

    시하의 몸에서 눈을 뜬 하리의 눈물겨운 폭군 갱생 프로젝트.

     

    ------------------------------------------------------


    마인가 진.
    대제국, 하패란의 황제.

    이미 수많은 사람을 해친,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
    그럼에도 그를 담는 그녀의 마음은 왜 이렇게도 흔들리던가.
    빛있는 황홀한 봄, 그 시간에 당신과 내가 살았다.

    “…네가 날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때,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것은 숙명이었을 거다.”

    겨우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무너져 내렸다.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을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다.

     

     

    ------------------------------------------------------

     

    “눈도 녹을 때는 추하다. 헌데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눈을 좋아하는 이유는 뭐냐?”
    그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묻는다. 그 말에는 동의했다. 눈은 하얗게 쌓였을 때 아름답긴 하지만, 녹을 때는 아주 너저분하니. 하리는 겨울에 태어났기에 눈을 좋아한다. 건강했을 때를 추억하는 것 같아 눈을 좋아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걸 좋아한다던 ‘시하’는 왜, 사라질 때에는 추한 눈을 좋아할까? 입술을 떼는 그 순간 머리에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진을 처음 만난 날에 눈이 내렸으니까요.”
    “……그래.”
    조금 뒤늦은 대답이 떨어졌다. 납득했다는 듯 그녀를 보며, 사방에 쌓인 눈처럼 새하얗게 웃는다. 쌓인 앙금이 녹아내린 듯이.
    “허면 내가 좋아서 눈이 좋은 것인가, 눈이 좋아서 내가 좋은 것인가?”
    “…비교할 수 없는 걸 물으시네요.”
    “비교할 수 없다?”
    “인간과 사물을 어떻게 비교하죠? 사람이 더 좋은 게 당연하잖아요.”
    모호한 말을 들은 그는, 하리의 시선을 피해 먼발치를 응시한다. 무얼 보는가 싶어 하리도 고개를 돌렸는데 벌판의 끝, 연기가 뭉게뭉게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엷게 비추는 햇볕을 등진 채.
    “시하.”
    그러다 문득 그가 그녀를 불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한다.
    “네 나를 사랑하는가.”
    이시하의 인두겁을 뒤집어쓴 신하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사소한 것 하나에조차 반응하는 육신은, 사소한 온기조차 나누어 받고 싶어 난동을 부리는 이 육신은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하리는,
    “당연히요.”
    속삭인다.
    “사랑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격정 어린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공기가 들어간 틈조차 없을 정도로 오롯이 끌어안고 입술을 겹쳐 온다. 오랜만에 맞닿은 그것에 육신이 설렘으로 발버둥 친다.
    “…네가 때때로 멀게만 느껴진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입술을 뗀 그가 처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떨리는 손길로 차게 얼어붙은 뺨을 쓰다듬었다. 가득 흐려진 눈을 붉게 상기된 뺨으로 마주한 그녀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난……, 아무데도 안 가요.”
    그 이후로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서, 눈에 담기는 것은 온통 엉망으로 채색된 채였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이상하게도 빌어먹을 황제가 가여워 보였다는 것. 그래서 어젯밤처럼 꼭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시하는 끊임없이, 그를 갈구했다는 것. 그날 밤, 그는 그녀를 안았다는 것.
    긴 겨울이었다.


    --------------------------------------------------------


    “진.”
    그녀가 부르자, 그는 새신랑처럼 하얀 손으로 새 신부 같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극히 본능적으로 움직인 손이 등 뒤에 돋아나 있던 날개로 향했다. 날갯죽지에서 무언가 빠지는 느낌이 났다. 다소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이윽고 손끝에 남은 것은 신비스러운 느낌이 강한, 커다랗고 빳빳한 깃이었다. 투명한 하얀빛으로, 그 스스로가 발광하는 것만 같은 기괴한 느낌. 그 때문일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칼깃이었다. 익인이 반려와 주고받는다는.
    “받아요.”
    그녀가 칼깃을 내밀자 그는 순순히 그를 받아 들었다. 커다랗고 빳빳했으나 무게감은 없는 그 깃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것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돼요.”
    하리는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그에 눈치로, 진은 그것이 칼깃이란 것을 알았나 보다. 그의 손에 파랑(波浪)이 일었다. 그리하여 꼭 움켜쥔 그녀의 칼깃이 부들부들 떨렸더란다.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후사고 뭐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진의 곁에 있는 건 싫으니까.”
    “시하.”
    감격에 인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온다. 하지만 그는 알까. 그가 부르는, 그녀의 것이 아닌 이름이 심장을 쥐여 온다는 것을. ‘시하’조차 하리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면 칼깃을 주라고 그리 말했는데.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내게는 당연히 너밖에 없다.”
    상냥하고 다정하기에 더욱 잔혹한 말이 귀에 떨어졌다. 그를 사랑하는 하리에게, 그에게는 ‘시하’밖에 없다고.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마음을 할퀴었다.
    “반려라 하였다. 네가 내 유일한 사람이요, 사랑이니.”
    이어진 그 말에 도리어 마음이 아팠다.
    ……아름다운 그에게로 흰색 칼깃이 스며들었다. 스르륵 녹듯 칼깃이 사라지자 꼭 그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마음이, 또 육신이…… 오롯이 이어져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
    “사랑한다.”
    그도 비슷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심장에 손을 얹은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그녀도 자연스레 입술을 벌려 사랑을 노래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와 마음이 이어졌기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어진 마음이 그녀가 아닌 다른 이의 것만 같아서 더더욱 아렸다.
    그렇기에,
    “……내가.”
    하리는 마침내 지나간 몇 년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마음으로 울며 속삭이는 말이 지독하리만치 아름다운 바람 틈새로 널리 울렸다.
    “시하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말해 줄 건가요?”
    그를 올려다보는 보석 같은 파란 눈에서 구슬픈 물기가, 반짝였다.
    “난 진이 알고 있는 이시하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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