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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나혜석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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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큰글자책] 여자도 사람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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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1896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13년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1918년에 졸업한 후 잠시 미술교사로 활동했으며, 1919년 3월 만세 운동을 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했으며, 25세 때인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연 첫 여성 개인 전람회였다. 같은 해에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했으며,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해 수상과 특선을 거듭했다.
그는 작가이자 여성의 주체적 권리와 인권을 펼친 운동가이기도 했다. 1914년 〈이상적 부인〉을, 1918년에는 조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 〈경희〉를 썼으며, 1923년 〈모(母) 된 감상기〉와 1934년에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며 파문을 불러왔다. 특히 〈이혼 고백서〉에서 그는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한편, 경직된 사회와 이로 인한 여성 문제를 비판했다. 이후 다양한 글을 쓰고 발표했으나 이혼녀라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
이후 수덕사 등을 떠돌다가 1944년 8월 한 양로원에 맡겨진 뒤 1949년 3월 14일에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1948년 11월에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해 있던 중 12월 10일 눈을 감은 것이다. 시대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었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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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 2018년 4월  더보기

100년후 독자에게 사람들은 믿어줄까? 내가 하루아침에 남의 집 건넌방 구석을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전당포를 들락거려야 했다는 것을. 생활의 곤고함은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병들게 하노니, 나는 끝내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소.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자존이었소. 그대들은 모르리. 세상과 불화하고 방종한 대가라고 손가락질하던 당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거의 한 세기 뒤를 사는 오늘의 여러분들도. 우리 시대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시밭길이었는지. 나는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소. 그러나 세상은 여성의 삶을 옥죄는 거대한 벽이었으니, 식민지체제와 봉건 질서, 남성중심주의는 숨쉬기에도 버거웠소. 생각이 제법 틔었다는 사람들도 우리더러 인형이 되라는 것이었소. 여자는 남자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오. 나는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였소. 그리고 글로, 몸으로 실천하였소.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오지 않는 법 아니오? 나는 내가 내딛는 한 걸음이 조선 여성 전체의 미래와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소. 〈이혼 고백장〉을 발표했을 때 ‘미치광이 짓 같은 노출증’라고 공격한 여성도 있었소. 남성들이야 얼마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소. 자신들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는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지 않소? 이혼하면 친권을 박탈당하고 돈 한 푼 없이 내쫓기는 게 정당한 것이오? 나는 결혼후 한순간도 허투루 허비한 적이 없소.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했소. 하지만 예술가의 길과 주부의 길이 행복하게 양립하기는 지금도 쉽지 않을 것이오. 결국 나의 결혼은 파탄이 나고 말았소. 과연 결혼이란 무엇일까? 정조란 무엇일까? 모성이란 무엇일까? 내 주장이 지금 세상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과격하다는데,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못 궁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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