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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박정진

출생:1950년, 대구

최근작
2024년 1월 <평화의 어머니 참어머니>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이 분야에 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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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6월 17일 출고 
무예를 천시하는 나라가 제대로 국가를 지키고 국민의 안녕을 보장한 경우는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가 무예를 천시하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았고, 일제식민지의 질곡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한민족을 불쌍히 여겼던지 천행으로 광복을 이루고 오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국가엘리트들은 무예의 호국정신과 상무정신을 하찮게 여기고 당쟁을 거듭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당수도唐手道’ 시범을 관람한 후 ‘태껸’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태권도의 원류무예가 되어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택견의 운명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우리나라 무예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과 함께 참으로 다행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 유일의 무경武經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함께 택견의 무예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해마다 확충되는 것은 참으로 택견인의 노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키나와의 맨손무술로 알려진 당수도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택견의 동작들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요즈음, 『무예도보통지』의 여러 무예와 함께 택견이 동아시아 삼국무예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어서 무예인의 자부심을 한껏 북돋우고 있습니다. 결국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택견, 수박 등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무예는 하나의 원류를 가졌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세계 최대의 몽골제국을 맞아서 마지막까지 항전을 서슴지 않았던 삼별초의 무인들이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하여 당수도가 되었고, 이것이 일제 때에 역으로 우리나라에 상륙하였음은 옛 고조선과 삼국의 무예가 일본으로 전해지고 일본무예의 원류가 되었던 역사를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택견에 관한 기존의 자료들이 부족하고, 단편적인 편린들을 재구성하는 수고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무예현실을 극복하고 수십 년 동안 성실한 자세로 수많은 자료를 섭렵한 끝에 김영만 박사는 이번에 『택견 근현대사』를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 박사는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미국 LA까지 몇 번이나 방문하고 자료를 찾는 수고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예연구가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우물을 판다는 속담을 넘어 ‘처마의 낙수가 떨어져 댓돌에 구멍을 뚫는다.’는 낙수천석落水穿石의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택견에 관한 연구서는 대개 자료의 한계로 인해 단체별 동작체계나 비교분석에 머물렀던 수준에 그쳐왔고, 그 이상의 연구 자료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자료의 섭렵과 더불어 다양한 시각과 부단한 노력은 자료가 거의 고갈되었다고 생각되는 현실에서도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택견을 했던 계층들은 대부분 중인이거나 서리계층이어서 기록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는데 더구나 조선은 상문경무尙文?武의 풍조가 극에 다다라 거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한제국에 이은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민족문화의 말살정책으로 인해 실제 택견은 큰 고비를 맞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서도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기록 중 어느 누구도 택견이라고 알아볼 수 없었던 자료와 그림을 통해서 택견의 모습을 찾아내었고 신문기사에서 ‘유술’로 불리었던 기록 중에서도 택견을 발견하는 날카로운 안목을 발휘하였습니다. 아울러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기능보유자로 송덕기(우대)와 신한승(아래대)이 지정되었지만,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송덕기 선생 택견의 기술이 배제되고, 신한승의 현대화된 택견이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현재에도 끊임없는 원형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행히 필자는 이 책에서 송덕기 택견의 원형과 택견史의 복원을 하고자, 송덕기에게 택견을 사사받은 제자들과 관련된 분들의 구술채록과 현장조사 그리고 새로운 택견의 기록을 찾고자 노력한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과 현대를 잇는 유일한 택견인 송덕기의 원형 중 편린이나마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으니 문화유산의 복원이라는 입장에서 쾌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현대화되고 경기화된 택견의 모습만이 아닌, 택견의 원형탐구는 택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택견과 고려의 수박이 상관성이 분명 있다는 생각을 한두 번쯤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한계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의 다양한 기록에서 택견이 종합격투기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발기술로 퇴보되는 침체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까지 수박은 손기술, 택견은 발기술로 서로 알려져 있으나 수박이 곧 택견인 것입니다. 김영만 박사가 이번에 출간한 이전의 자료를 뛰어 넘는 민족전통무예 택견의 총체적인 연구서인 『택견 근현대사』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전통무예를 사랑하는 마음이 인연이 되어 이번에 추천사를 쓰게 된 것도 예삿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예인의 혼이 하나가 되어 옛 고조선의 영화를 되찾는 역사회복의 길에 동지가 될 것은 기원해봅니다. 2020년 7월 3일 心中 박 정진
2.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6월 18일 출고 
기자정신으로 똘똘 뭉친 일대기에 고개 숙여져 대선배의 일대기에 추천사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청에 쾌히 응한 것은 선배가 베풀어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필자가 처음 윤오병(尹五柄) 국장을 만난 것은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지방기자공채 시험을 거쳐 대구지사에 발령을 받고서이다. 당시를 회고해보면 햇병아리 기자에게 윤 국장님은 취재반장으로서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전형적인 미남형에다 인심 좋아 보이는 그가 한때 ‘판문점 출입기자’로서 휴전선 일대에 명성을 날린 무용담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함께 근무한지 한 달쯤 되어서였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솔선수범하는 모습, 신문사 깃발을 휘날리면서 취재현장을 누비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구서문시장(1975년 11월 20일)에 큰불이 났을 때 신출내기 기자였던 필자도 함께 뛰어다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선배의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은연중에 기자의 여러 모습을 배우려고 애썼던 자신을 회고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번 일대기 원고를 보면서 선배님이 6.25 때 ‘소년병’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놀랐다. 제1부 화보에 따르면 “윤오병은 101사단 103연대 소속 문서통신 연락병(messenger)으로 임진강 북방서부전선 고랑포 104고지 전투에 참전하여 6·25종군기장(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수령했다. 휴전되기 직전 연령 미달로 귀가조치 됐다. 소년병 윤오병은 왼쪽 가슴에는 6·25종군기장을 달고 왼쪽 팔에는 문서통신연락병 완장을 차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후일 판문점, 종군기자가 되는 것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아, 타고난 기자였구나! 요즘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전장에서, 휴전선 일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경쟁을 벌일 기자들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나는 참 훌륭한 선배를 두었구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수많은 특종의 소유자라는 것을 여기서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남파된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1.21사태(1968년 1월21일)를 비롯하여 휴전선과 서울북부 일대는 항상 북괴병의 기습이나 무장공비·간첩사건으로 남북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미함(美艦) 푸에블로호 납북사건(1968년 1월23일)도 빼놓을 수 없다. 판문점 북한군 도끼만행사건도 있었으며(1976년 8월 18일),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는 판문점 JSA 북한군 귀순사건(2017년 11월 13일)이 있다. 윤 국장이 일대기의 제목을 ‘지방기자의 종군기’로 정한 것과 함께 본문에 해당하는 제3부 ‘판문점, 서부전선, 그리고 1.21사태’를 정한 까닭은 아마도 기자생활에서 가장 추억에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영남지방의 새마을운동과 주요사건’을 제4부로 정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전후의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새마을운동은 그가 대구경북취재팀장을 하고 있을 무렵에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는 경북 청도 신도리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수해복구 확인차 부산으로 가던 중 청도 신도마을 주민들의 제방보수 현장을 보고 열차를 세워 살핀 후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지붕을 개량하고 안길들을 잘 가꾼 신도1동을 본보기로 ‘새마을 운동’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도리에는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로 세계 10위권의 잘사는 나라이다. 5.16때인 61년도만 해도 한국이 국민소득 80달러, 북한이 2백 40달러, 필리핀이 8백 달러였다. 그 후 필자는 문화부전문기자로서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게 되었고, 경향신문에서 세계일보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으로 해서 윤 국장님과 소원하게 되었다. 윤국장님은 대구, 부산 취재 반장과 경기일보 정경부장, 중부일보 편집국장을 4번이나 역임하는 등 타고난 기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그는 누구보다도 평화와 통일을 바랄 것이다. 지금은 남북한이 평화무드 속에서 화합과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 그가 종군기자로서의 삶의 일대기를 화보를 곁들여 발간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어떤 경각심과 함께 만전을 기할 것을 촉구하고 웅변하는 듯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100세 시대의 인생 3모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훌륭한 선배님을 모셨다는 자부심으로 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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