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해외저자 >

이름:카렐 히네크 마하 (Karel Hynek Mácha)

국적:유럽 > 동유럽 > 체코

출생:1810년, 체코 프라하 말라스트라나 (전갈자리)

사망:1836년

직업:시인

최근작
2019년 5월 <5월>

카렐 히네크 마하(Karel Hynek Mácha)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시, 산문,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지만 특히 시인으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체코 시인의 상징으로 불리는 마하는 체코 근대시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가장 위대한 체코 시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영국의 바이런(Byron)과 셸리(Shelley), 프랑스의 비니(Alfred de Vigny), 독일의 노발리스(Novalis), 폴란드의 미츠키에비치(Mickiewicz), 러시아의 레르몬토프(Lermontov) 등과 더불어 유럽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카렐 히네크 마하는 1810년 11월 16일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Malá Stran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하가 태어나기 전에 지방에서 프라하로 올라와 제분소 조수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말라스트라나의 성 미쿨라시(sv. Mikuláš)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의 딸이었는데, 마하 시의 탁월한 음악성은 그의 어머니 가계의 음악적 배경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824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마하 가족은 말라스트라나를 떠나 프라하 구시의 빈민 구역인 나프란티슈쿠(Na Františku)로 이주해 살다가 1826년 신시가지로 옮겨 와 가축 시장(Dobytčí trh), 즉 오늘날의 카렐 광장(Karlovo náměstí)]에서 자그마한 곡물 가게를 운영했다. 당시의 전형적인 도시 소시민 가계의 어린 마하는 공부에 재능을 보여 1824∼1830년에 가톨릭 계통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1830년에 카렐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했다가 1932년 동 대학교 법학부로 옮겨 1836년 8월에 졸업했으며, 9월 말부터 체코 북부의 리토메르지체(Litoměřice)에서 변호사 사무실 시보로 일하기 시작했다.
마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당시 체코 민족 부흥 운동의 지도자로 언어학자겸 번역 문학자인 융그만(Jungmann, M.)의 강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그의 영향으로 카렐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하면서 체코 문학과 역사에 관해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괴테, 노발리스, 셰익스피어, 바이런, 스콧, 미츠키에비치 등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마하는 체코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공부를 통해 체코 민족의 부흥을 꿈꾸기 시작하고 외국 문학 탐독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당시 유럽의 혁명 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체코의 민족 부흥 운동가들은 체코의 일반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애국심을 심어 주기 위한 하나의 좋은 방편으로 연극을 선택했고, 마하 역시 여러 애국 청년 단체들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체코어 연극 동아리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당시 체코 민족 부흥 운동의 또 한 사람의 지도자이자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체코 국가 <내 조국은 어디에(Kde domov můj)>의 작사자이기도 한 요세프 카예탄 틸(Josef Kajetán Tyl)의 애국적인 연극 단체를 포함한 여러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여기서 운명의 여인 로리(Lori)를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34년 초 구시 광장 성 미쿨라시 성당에서 아마추어 연극 동아리가 올린 클리츠페라(Klicpera, V. K.)의 단막극 <꽃다발(Kytka)>의 공연에서였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네 살, 그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마하에게 로리는 필생의 여인이었고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마하는 1836년 초 로리의 임신 이후 모든 것이 급했다. 필생의 시집도 내야 했고 아이가 출생하면 가정을 꾸리기 위한 경제적 자립도 필요했기 때문에 서둘러 공부도 마쳐야만 했다. 1836년 4월 23일 가까스로 시 ≪5월≫의 출판을 끝낸 마하는 공부에 매진해 8월까지 카렐대학교 법학부의 졸업 시험과 석사 논문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고, 9월 29일 만삭이 된 로리를 프라하에 남겨 둔 채 일자리를 찾아 프라하 북쪽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리토메르지체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의 생활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가계가 기울기 시작해 부모님의 재정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월급이 나올 때까지 빚을 얻어 생활해야 했기에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고 난방도 되지 않는 냉골에서 추위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10월 2일 아들 루드비크(Ludvík)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10월 15일 산모와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두 차례 프라하로 달려갔고 이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그가 프라하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 23일 시내 외곽의 한 창고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지붕 위까지 올라가 선두에서 화재 진압을 돕고 하숙집으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다리를 다쳐 더 이상 프라하로 달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화재 진압으로 얻은 감기와 연이은 감염으로 11월 6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대표작
모두보기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