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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앤서니 퀸 (Anthony Quinn)

최근작
2024년 8월 <안소니 퀸의 황야의 선풍 : 리마스터링>

앤서니 퀸(Anthony Quinn)

1915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퀸은 두 살 때까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프란체스코는 어렸을 때 세탁부로 팔려 온 처녀 마누엘라를 사랑했지만 집안이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멕시코 혁명 전쟁에 휩쓸려 철길을 따라 대륙을 떠돌았고 돌아와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떠돌았다. 주로 멕시코 이민 노동자들이 일하는 농장을 찾아 다녔던 퀸 일가가 정착한 곳은 동부 로스앤젤레스. 그 곳에서 프란체스코는 후진하는 트럭에 깔려 죽었다. 멕시코 인들은 대로를 건너는 것조차 불법이었던 지독한 인종차별, 조그만 양철지붕 집에 온 식구가 몰려 살았던 가난과 함께 아버지는 앤소니 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였다. 퀸은 고아가 된 유색 인종 소년이 흔히 겪는 험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남자와 재혼한 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 퀸은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맡았다. 그는 돈 받고 스파링 파트너를 해 주는 권투선수였고 시멘트 공이자 전기 수리공이었으며 구두닦이였다. 고생 때문에 일찍 성숙한 얼굴을 가지게 된 퀸을 거리 소년들과 구분해 주는 점이 있었다면 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고 건축물 스케치 대회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퀸이 부정확한 발음을 고치고 오면 조수로 써주겠다고 제의했다. 퀸은 청소를 해 교습비를 벌면서 발음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라이트를 찾아 가는 대신 연극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사람은 팜므 파탈 이미지로 유명한 여배우 매 웨스트였다. 그녀는 연극 〈깨끗한 침대(The Clean Bed)〉를 제작하면서 스물 한 살의 퀸에게 육십 넘은 노인 역을 맡겼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세실 B. 드밀의 〈평원의 사나이〉에 출연하게 된다. 리얼리티를 목숨처럼 여겼던 드밀은 순수한 샤이엔 족 인디언 배우를 찾고 있었다. 멕시코와 아일랜드, 멕시코 원주민의 피가 고루 섞여 있었던 퀸은 드밀을 찾아가 자신이 샤이엔 족이라고 사기를 쳤다. 그 거짓말은 먹혀 들어갔지만 드밀은 그의 연기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퇴짜 맞을 뻔한 그를 구해 준 사람은 게리 쿠퍼. 쿠퍼는 "착하게 생겼는데 한 번 써 보죠"라는 말로 퀸을 구원했고 그 곳에서 퀸은 배우로서의 경력과 함께 첫번째 아내이자 드밀의 수양 딸인 캐서린 드밀을 한꺼번에 얻었다. 그러나 드밀은 배우로서 그랬던 것처럼 사위로서의 퀸도 끝내 좋아하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 소화하기 힘든 외모 때문에 퀸은 갱스터나 인디언을 연기하며 조연에 만족해야 했다. 1947년 〈검은 황금 Black Gold〉에서 간신히 주연을 맡았지만 곧 사회주의자로 의심 받아 할리우드를 떠났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보낸 그 시절은 퀸에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그 곳에서 그는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주연을 맡았고 이전에 차분하게 익히지 못한 연기 수업을 실전으로 대신했다. 다시 돌아온 할리우드는 전과 달랐다. 그는 〈혁명아 자파타〉와 〈욕망의 랩소디〉로 두 개의 아카데미 남우조연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노틀담의 꼽추〉 역시 중년에 이르러 가능했던 명작들. 이탈리아 감독들도 그의 에너지 넘치는 연기와 검은 피부를 눈여겨 봤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연출한 〈길〉의 차력사 잠파노는 짐승처럼 야비한 겉모습 안에 아직 버리지 못한 인간성을 간직한, 어찌 보면 퀸 자신과도 비슷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퀸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말해 왔다. 영화 속에서 조르바는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세 살 먹은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랬다고 고백한다. 세 살 먹은 큰아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경험이 있는 퀸은 "조르바의 춤은 내가 아니면 누구도 출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퀸은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처녀성에 강박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캐서린 드밀과 결혼한 첫날밤,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퀸은 신부를 두들겨 팼고 "그 날부터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리타 헤이워드와 캐롤 롬바드, 모린 오하라, 잉그리드 버그만 등 할리우드 황금기의 여배우들이 그의 연인이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한 번도 처녀와 자본 적이 없다"고 안타깝게 회상했다. 그는 또 경멸의 대상이 됐던 멕시코 혈통을 지겨워 하면서도 멕시코의 가부장적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두 번째 아내 욜란다와 이혼할 때, 아들 대니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리고 음담 패설을 늘어 놓았다고 비난했다.

세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정부로부터 열 세 명의 아이를 얻은 그는 "우글거리는 자식들은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81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딸을 얻은 것이 그에게는 자랑이었다. 젊은 시절 가졌던 미술에 대한 열정을 뒤늦게 되살려 죽기 전에는 매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입체파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그림은 마치 그 생애처럼 강렬한 색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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