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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이름:고영범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최근작
2023년 11월 <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

[큰글씨책] 서교동에서 죽다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썼을 때 그건 시의 형태였다. 최소한 겉모습은 시란 이런 것이라고 그때까지 알고 있던 것들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보고 나서는 희곡을 쓰고 싶어졌고, 모두 세 편을 써서 그중 두 편은 당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공연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쓴다는 건, 당연히,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는 하나의 군사독재 정권이 다른 군사독재 정권으로 넘어가던 무렵이었고, 따라서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은 당연히, 그 문제들에 대한 걸로 채워졌다. 이 생각들은 시나 희곡 속에 스며들기도 했지만, 당시에 발생한 이란의 미 대사관 점거 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이란의 미 대사관 점거 사태와 미국의 제국주의’라는 소논문 비슷한 형태의 글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소논문은 교지의 인문사회과학 논단에 싣기 위해 쓴 것이었다. 학교 측에서 이 글을 게재하지 못하게 막은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교지의 당시 편집장이었던 친구는 학교와 맞서서 결국 게재했다고, 자기 집 어딘가에 그 책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시와 희곡, 사회과학에 몰두하게 된 건 당연한 귀결이었고, 문학회와 연극반, 그리고 사회과학 서클에 동시에 가입한 것도, 따라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전공 공부를 포함한다면 네 가지 영역 모두에서 실패했다. 전적으로 겉멋과 불성실, 비윤리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이 세 가지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를 부추기면서 같이 움직이게 마련인데, 따라서 각자 맡은 역할을 시간표에 따라 수행해야만 하는 곳인 연극반이나 사회과학 서클과는 늘 문제가 많았고, 몇 달 만에 상당한 수준에 오른 불성실과 무책임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모임인 문학회에서 입대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이 문제 많은 존재와 가족, 동료들,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 이런저런 각도에서, 틈틈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한 번 들여다보자 싶어졌다. 형식은 이 존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혹은 그동안 선택해왔던 방식들을 모두 동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몇몇 에피소드는 오래전에 시나리오 형식으로 써본 적이 있었으니 그 형식은 제쳐두고, 이번에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각 에피소드의 성격에 적합한 형식들—시와 희곡,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접근이 뒤엉킨 소논문, 인터뷰, 기사, 에세이, 심지어 성명서 등 한 번이라도 다뤄본 형식은 모두 동원해서—로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내부에서 다투면서 밖으로 말하는 책을 만들어보자, 이를테면 그런 생각이었다. 가쎄의 김남지 대표와는 페이스북 친구로 처음 만났는데, 농담처럼 꺼낸 이 이상한 몽상에 대해 “마음대로 해보세요”라고 대답해 줬다. 그게 벌써 4년 전의 여름이었다. 이런 무계획에 가까운 계획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인터뷰 형식의 글은 겉돌았고, 논문 형식의 글은 깊이가 없었고, 에세이는 감상적이었고, 시는 그냥 그랬고, 기사는… 이것까지 들어가자 전체적으로 어린애 장난처럼 보였다. 기중 마음이 가는 게 이사 가는 날을 다룬 희곡 형태의 장과 개에 물리는 장면을 다룬, 이전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소설 형태의 글이었다.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한동안 밀어두고 있다가 조금 나아진다 싶어져서, 일단 희곡 형태로 되어 있던 장을 붙들고 공연이 가능한 길이로 키워봤다. 너무나 설명적인 내용이 많아서 희곡은 포기하고 차라리 소설로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별개의 작품으로 키워보기로 했다. 희곡은 다행히도 2021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얼마 전에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을 마치고 나온 이성열 연출이 해보겠다고 나서줬다. 이성열 연출은 공연으로 올리기 난감한 면이 있는 대본을 노련하게 다듬어서 올려줬고, 코로나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관객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고맙다. 이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한동안 안고 살아준 배우들과 스태프진에게도 고마울 따름이고. 그리고 이제 이 책이다. 희곡과는 별개로, 다른 조각들을 해체한 뒤 ‘장편소설’이라는 형태로 재구성해서 다시 쓴 것이다. 이야기가 꽤 오랜 기간 동안 난삽한 변신 과정을 거쳐 비로소 소설의 형태로 정착된 셈인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김남지 대표가 건네줬던 그 넉넉한 제안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고, 결과물을 내어놓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건 몹시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대학 생활이 실패였다고 썼는데, 희곡 <서교동에서 죽다>를 연출해준 이성열은 대학 연극반에서 만난 친구고, 문학회에서 만난 선후배와 친구들은 그때 이후 여태까지 내게 마음속의 닻이고 돛이고 갑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아주 실패하지는 않은 셈인가.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본다. 모두 고맙다. 혹시라도 누구 하나 빼놓을까 봐 두려워서 이름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다만 먼저 이곳을 떠난 성원근, 기형도, 이주원 형들의 이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모아 불러보고 그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소설 속의 인물들일 뿐이다. 내 실제의 형제들(누나가 둘이 더 있다)은 이들보다 훨씬 더 다정다감한 사람들이고 동생은 직장생활 잘하고 일찌감치 은퇴해서 여유 있는 은퇴자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어떤 순간 서로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칠십 년대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허구적 요소들과 함께 희생자로 동원되었을 뿐이다. 글을 쓰는 건 철저하게 사적인 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애정과 이해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해도, 몇 시간이고 한쪽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애도 아니고 그 집에서 제일 덩치 큰 남자 어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관계를 감당하기 위해, 또 집안을 함께 꾸려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꽤 있는데, 글을 쓴다는 건 그 일들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최소한 뒤로 미루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한마디로 민폐다. 그 답답함과 괴로움을 견뎌주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오마니가 이 책을 보셨으면 분명히 잊기 어려울 농담을 한 마디 하셨을 텐데(나는, 불행하게도, 약한 치아는 그대로 물려받은 반면에 그 은근한 유머감각은 반도 닮지 못했다), 오마니는 당신을 오랫동안 한결같이 편안하게 모시고 있던 형 집에서, 올해 초에 먼저 떠나셨다. 나는 늘 늦게 귀가하고 늦게 도착하는 자식이었는데, 이번에도 늦었다. 늘 용서하셨으니 이번에도 용서해 주시겠지. 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이 따뜻한 걸 보면 이미 그러신 것 같다.

서교동에서 죽다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썼을 때 그건 시의 형태였다. 최소한 겉모습은 시란 이런 것이라고 그때까지 알고 있던 것들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보고 나서는 희곡을 쓰고 싶어졌고, 모두 세 편을 써서 그중 두 편은 당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공연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쓴다는 건, 당연히,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는 하나의 군사독재 정권이 다른 군사독재 정권으로 넘어가던 무렵이었고, 따라서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은 당연히, 그 문제들에 대한 걸로 채워졌다. 이 생각들은 시나 희곡 속에 스며들기도 했지만, 당시에 발생한 이란의 미 대사관 점거 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이란의 미 대사관 점거 사태와 미국의 제국주의’라는 소논문 비슷한 형태의 글로 나타나기도 했다.(이 소논문은 교지의 인문사회과학 논단에 싣기 위해 쓴 것이었다. 학교 측에서 이 글을 게재하지 못하게 막은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교지의 당시 편집장이었던 친구는 학교와 맞서서 결국 게재했다고, 자기 집 어딘가에 그 책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시와 희곡, 사회과학에 몰두하게 된 건 당연한 귀결이었고, 문학회와 연극반, 그리고 사회과학 서클에 동시에 가입한 것도, 따라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 영역 모두에서, 전공 공부를 포함한다면 네 가지 영역 모두에서 실패했다. 전적으로 겉멋과 불성실, 비윤리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이 세 가지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를 부추기면서 같이 움직이게 마련인데, 따라서 각자 맡은 역할을 시간표에 따라 수행해야만 하는 곳인 연극반이나 사회과학 서클과는 늘 문제가 많았고, 몇 달 만에 상당한 수준에 오른 불성실과 무책임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모임인 문학회에서 입대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이 문제 많은 존재와 가족, 동료들,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 이런저런 각도에서, 틈틈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한 번 들여다보자 싶어졌다. 형식은 이 존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혹은 그동안 선택해왔던 방식들을 모두 동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몇몇 에피소드는 오래전에 시나리오 형식으로 써본 적이 있었으니 그 형식은 제쳐두고, 이번에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각 에피소드의 성격에 적합한 형식들—시와 희곡,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접근이 뒤엉킨 소논문, 인터뷰, 기사, 에세이, 심지어 성명서 등 한 번이라도 다뤄본 형식은 모두 동원해서—로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내부에서 다투면서 밖으로 말하는 책을 만들어보자, 이를테면 그런 생각이었다. 가쎄의 김남지 대표와는 페이스북 친구로 처음 만났는데, 농담처럼 꺼낸 이 이상한 몽상에 대해 “마음대로 해보세요”라고 대답해 줬다. 그게 벌써 4년 전의 여름이었다. 이런 무계획에 가까운 계획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다. 인터뷰 형식의 글은 겉돌았고, 논문 형식의 글은 깊이가 없었고, 에세이는 감상적이었고, 시는 그냥 그랬고, 기사는… 이것까지 들어가자 전체적으로 어린애 장난처럼 보였다. 기중 마음이 가는 게 이사 가는 날을 다룬 희곡 형태의 장과 개에 물리는 장면을 다룬, 이전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소설 형태의 글이었다.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한동안 밀어두고 있다가 조금 나아진다 싶어져서, 일단 희곡 형태로 되어 있던 장을 붙들고 공연이 가능한 길이로 키워봤다. 너무나 설명적인 내용이 많아서 희곡은 포기하고 차라리 소설로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별개의 작품으로 키워보기로 했다. 희곡은 다행히도 2021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얼마 전에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직을 마치고 나온 이성열 연출이 해보겠다고 나서줬다. 이성열 연출은 공연으로 올리기 난감한 면이 있는 대본을 노련하게 다듬어서 올려줬고, 코로나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관객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고맙다. 이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를 한동안 안고 살아준 배우들과 스태프진에게도 고마울 따름이고. 그리고 이제 이 책이다. 희곡과는 별개로, 다른 조각들을 해체한 뒤 ‘장편소설’이라는 형태로 재구성해서 다시 쓴 것이다. 이야기가 꽤 오랜 기간 동안 난삽한 변신 과정을 거쳐 비로소 소설의 형태로 정착된 셈인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김남지 대표가 건네줬던 그 넉넉한 제안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고, 결과물을 내어놓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건 몹시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대학 생활이 실패였다고 썼는데, 희곡 <서교동에서 죽다>를 연출해준 이성열은 대학 연극반에서 만난 친구고, 문학회에서 만난 선후배와 친구들은 그때 이후 여태까지 내게 마음속의 닻이고 돛이고 갑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아주 실패하지는 않은 셈인가.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본다. 모두 고맙다. 혹시라도 누구 하나 빼놓을까 봐 두려워서 이름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다만 먼저 이곳을 떠난 성원근, 기형도, 이주원 형들의 이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모아 불러보고 그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소설 속의 인물들일 뿐이다. 내 실제의 형제들(누나가 둘이 더 있다)은 이들보다 훨씬 더 다정다감한 사람들이고 동생은 직장생활 잘하고 일찌감치 은퇴해서 여유 있는 은퇴자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어떤 순간 서로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칠십 년대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허구적 요소들과 함께 희생자로 동원되었을 뿐이다. 글을 쓰는 건 철저하게 사적인 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애정과 이해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해도, 몇 시간이고 한쪽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애도 아니고 그 집에서 제일 덩치 큰 남자 어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관계를 감당하기 위해, 또 집안을 함께 꾸려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꽤 있는데, 글을 쓴다는 건 그 일들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최소한 뒤로 미루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한마디로 민폐다. 그 답답함과 괴로움을 견뎌주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오마니가 이 책을 보셨으면 분명히 잊기 어려울 농담을 한 마디 하셨을 텐데(나는, 불행하게도, 약한 치아는 그대로 물려받은 반면에 그 은근한 유머감각은 반도 닮지 못했다), 오마니는 당신을 오랫동안 한결같이 편안하게 모시고 있던 형 집에서, 올해 초에 먼저 떠나셨다. 나는 늘 늦게 귀가하고 늦게 도착하는 자식이었는데, 이번에도 늦었다. 늘 용서하셨으니 이번에도 용서해 주시겠지. 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이 따뜻한 걸 보면 이미 그러신 것 같다.

행복

리반엘리는 몇인 분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1946년에 태어난 그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71년에 일어난 쿠데타 때 두 차례에 걸쳐 수감생활을 경험한 뒤 이듬해에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1984년에야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아서 밀러, 제임스 볼드윈 같은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면서 정치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처음 각인시킨 건 음악가로서였다. 망명길에 오른 리반엘리에게 고국의 저항운동가들이 시위 도중에 그가 만든 노래들을 부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후로 그는 음악과 정치활동, 글쓰기 모두를 멈춘 적이 없다. 리반엘리는 터키가 낳은 명작 중 하나인 <길Yol>을 비롯한 여러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만들었고, 직접 영화감독으로 나선 <쇠땅, 구리하늘Iron Earth, Copper Sky>은 1987년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분야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 <행복>은 리반엘리가 쓴 아홉 편의 장편소설들 중 아마 서방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스탄불의 대학교수인 이르판과 동부 아나톨리아의 산악지대에 사는 소녀 메리엠, 그리고 그의 사촌오빠이자 쿠르드족 무장집단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특전사 요원인 제말 세 사람의 이야기다. 전반부는 이 세 사람에게 번갈아 한 장씩 부여하면서 그들이 사는 세계를 따로따로 그려나가다가, 중반에서는 제말과 메리엠이 함께하는 여정과 이르판의 여행이,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세 사람이 함께하는 생활이 그려진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세 사람이 한데 모였다가 결국 다시 흩어지는 게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 구성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작가가 들려주는 터키의 분열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정치적인 선호, 지역적인 이해, 지방색 등에 따른 분열이 있지만, 터키는 소수민족인 쿠르드족과의 문제, 1920년대에 케말 아타투르크가 술탄제를 폐지하고 세속공화국을 세우면서 생긴 이슬람과 세속 가치의 충돌의 문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지역적인 특성에서 비롯된 문제 등 다양한 차원의 내적인 분쟁과 혼란을 겪고 있다. 리반엘리는 다양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세 인물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이런 복잡한 사정들 사이를 뚫고 항해한다. 이 항해는 터키의 근현대사를 꿰뚫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복잡한 사회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고통스럽고 혼란한 마음을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반엘리가 이런 거대한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개인들의 마음을 가볍게 다루거나 관성에 빠지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들여다보려는 성의는, 그 성의 자체 때문에 희망으로 여겨진다. 이 성의, 이런 태도는 터키와 내용은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렬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물론, 생각이 다른 동료 시민들과 수시로 부딪히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 또한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할 덕목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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