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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박우수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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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리처드 2세>

리처드 2세

리처드 2세」는 역사와 예술, 예술과 역사가 상호 교섭하고 교류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리처드 2세」가 셰익스피어 역사극 중에서 가장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이라면, 이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충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에서 다시 역사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 가장 큰 작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셰익스피어 5대 희극 세트 - 전5권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가 1597년경에 쓴 것으로 그의 본격적인 비극 시기와 완숙한 희극 시대의 중간에 있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극들이 작품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제목들을 가지는 반면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의 비극들은 작품의 주인공들을 내세우는 제목을 갖고 있다. 그런데 희극으로 분류되는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상인'을 내세우는 비극적인 제목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딱히 베니스의 상인인 '안토니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샤일록이 대사의 양이나 인물의 비중에서 안토니오를 압도하고 있고 따라서 많은 독자들이 베니스의 상인을 샤일록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0세기 초기에 일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셰익스피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 <살 일 파운드> 등과 같은 다분히 감각적인 제목으로 부분적인 편집 및 각색을 거쳐 매우 제한적인 시각에서 알려졌다. 권선징악이나 시적 정의 같은 유교적 도덕규범과 상당 부분 맞아 떨어지는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다분히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수용되고 해석되어 온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현실이다. 즉 『베니스의 상인』은 비극과 희극의 중간지대에서 샤일록을 인종적, 종교적 편견의 희생물임과 동시에 물질적 탐욕의 화신인 조롱감으로 제시함으로써 편견의 폐해를 들춰내는 셰익스피어의 문제작이다. 셰익스피어가 샤일록을 배금주의의 화신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당대 사회의 배금주의와 물욕일 샤일록으로 환원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꿈과 현실, 자연과 초자연, 인간과 요정들의 다양한 세계를 한데 모아 부조화로부터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

햄릿

이 작품을 읽는 것은 거울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는 바라봄과 보임이 동시적인 현상이다.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다른 응시의 대상이 되어 있다. 마치 쫓고 쫓기는 놀이처럼 범인은 탐정이 되고 탐정은 범인이 되는 뒤바꿈이 빈번한 작품 속에서, 일과 놀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승과 저승의 구분은 사라지며 삶의 영역은 죽음 이후의 세계로 확장된다. 햄릿의 독백처럼 죽은 후에도 우리의 불멸하는 영혼이 꿈을 꾸고 그 꿈이 바로 이 현실의 반영이라면, 죽음은 삶과의 이별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거나 재생이라 할 만하다. 허구와 실재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작품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햄릿처럼 당당히 <나는 덴마크 사람 햄릿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리어 왕처럼 광야에서 헐벗은 영혼으로 폭풍우에 맞서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칠 수 있을 뿐이다. 햄릿, 그 영원한 모나리자.

햄릿 (제1사절판본)

시대마다 풍토병처럼 그 시대의 우울병을 앓고 있듯이 시대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대하는 시대적 징후가 있다. 이성의 시대는 이성의 눈으로 햄릿의 지성과 천사에 버금가는 고귀한 능력을 앞세우는 르네상스 인간 햄릿을 읽어내고, 신 앞에 단독자로 우뚝 선 개인을 강조하는 종교적 개혁의 시대(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햄릿을 우상파괴주의자로 읽는다. 햄릿은 매우 충동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한갓 먼지의 정수이자 더러운 욕망의 덩어리로 보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눈에는 햄릿은 이성의 한계에 직면한 광기 어린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논리적 설명과 분석, 보편적인 세계의 원리를 추구하는 계몽적 이성의 시대가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곳에선 양차 세계대전이란 전후의 상흔과 그 딱지가 가려워 계속 긁어대고 있다. 이 부조리한 세계 속 인간들에게 햄릿은 영문도 모르고 죽음의 세계로부터 다가온 유령의 명령에 귀신이 들린 듯 쫓겨 무덤 속으로 몰려가는 사냥감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마치 소용돌이처럼 로젠크래프트와 길더스톤 같은 주변의 친구들을 싸잡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루 설명할 수 없이 부조리한 인간이다.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는 『햄릿』에서 보편적 진리가 부재한 경계지역, 꿈과 현실이 뒤섞인 장자의 나비 꿈의 전형을 읽어내며, 객관적 진리란 단지 인간의 편의적인 합의의 산물이며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이러한 가정에 근거할 뿐이라고 그의 희곡 『로젠크래프트와 길더스톤 죽다』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신분석가들에게 햄릿은 성도착증 환자이며, 성적욕망 실현의 좌절과 그의 자살 충동은 줄곧 맞닿아 있다. 햄릿의 과도한 성적집착과 자의식의 과잉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불만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에게 햄릿은 오필리아의 광기와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남성우월주의자이다. 그의 여성혐오주의 담론 안에는 서구의 기독교 전통과 밀접하게 여성에 대한 은밀한 두려움과 불안이 오델로의 그것만큼이나 깊숙하게 내재되어 있다. 요컨대 햄릿은 히드라처럼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이다. 머리를 잘라버리면, 죽기는커녕 그 피를 먹고 계속 새로운 머리가 자라난다. 가끔 우리는 그의 여러 머리들 중 어디에 눈길을 주어야할 줄 몰라 당황하다가 그 눈총에 맞아 시름시름 앓거나 죽기도 한다. 시대마다 햄릿을 대하는 시대의 징후가 있다면, 우리들에게 햄릿은 무엇인가? 폭풍우 치는 광야에 광대와 함께 버려진 리어가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자신을 향해 하는 질문이 사실은 관객과 독자를 향한 절규이듯이, 절단이 난 시대의 관절을 꿰맞추거나 아니면 고통을 눌러 참고 절뚝거리며 시대와 동행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잡초가 무성한 어느 곳에 처한 햄릿들이다. 햄릿의 엘시노어 궁정을 찾아온 아동 극단 제 일 배우의 낭송은 버질의 서사시 『이니어드』와 여기에 직접 빚지고 있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비극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에 기초한 것이다. 트로이 몰락의 최후를 그린 아킬레스의 아들 피러스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배우의 낭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실감 나는 연기를 본 햄릿이 자문하듯이 “피러스에게 헤큐바가 무엇이란 말인가?”란 질문은 곧장 “우리에게 햄릿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니체에게 햄릿은 세상의 신비와 비밀을 꿰뚫어 보고 결국에는 환멸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환시자이지만, 햄릿은 철학적 성찰과 이성의 언어로만 세상을 파악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를 느끼고 몸으로 체험한 본능에 충실한 원초적 인간이기도 하다. 햄릿이 친구 호레이쇼를 두고 이성과 감성이 너무나 매끄럽게 조화를 이뤄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아무것에도 아파하지 않는 이상적인 견인주의자라고 극찬하지만 이런 인간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햄릿』은 “거기 누구냐?”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의문으로 끝나는 수수께끼놀이이다. 이 삶의 헝클어진 수수께끼들은 시간 안에서 탄생하고 시간과 더불어 더욱 발전한다. 햄릿이 각색하고 연출하고 해설자 역할을 맡고 있는 극 중 극 <<쥐덫>>에 걸려 큰 쥐인 폴로니우스가 죽는 것처럼 우리들 모두 햄릿이 놓은 그 쥐덫에 걸려들 위험이 크다. 그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때로는 무분별한 만용이 지혜가 되기도 한다는 역설을 햄릿은 체험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약은 자가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들어 넘어지기도 한다. 햄릿의 비극은 바로 이 설명할 수 없는 이성과 광기의 경계지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경계지역은 마음 놓고 걸어 다니기에는 위험한 늪지이다. 비극은 이 늪지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오디세우스가 그 위험한 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부하들에게는 모두 밀랍으로 만든 귀마개를 덮어씌우면서도 자신은 돛 꼭대기의 밧줄에 묶인 채 그 마법의 노래를 만끽하듯이 우리들도 비극의 늪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펄을 뒤집어쓸 각오가 필요하다. 사실상 오디세우스의 10년의 편력은 호기심 많은 시인의 편력이며 그의 여행담은 시인의 서사충동을 풀어헤쳐놓은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이 위험천만이지만 안전한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짜릿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늪지의 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시간이 때로는 맨땅에서 활보하는 것보다 수고로운 의미가 있다. 파수꾼들이 낯선 세계에서 온 손님과 만나려면 살갗을 찢는 겨울 찬 공기를 마시고 밤잠을 줄여야 하듯이, 햄릿의 장례식을 마지막에 목격하고 애도하는 독자들에게 새벽은 밤이슬을 털고 붉은 후광을 입고 그렇게 성큼 걸어올 것이다. 밤의 끝자락에 새벽에 있듯이 문학적 독서체험, 특히 비극의 체험은 아슬아슬한 현기증 나는 경계지역을 넘나드는 데에 있다. 제1 사절판 『햄릿』을 번역한 것은 이미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립 반 윙클은 아니지만, 어느 산속에 깊숙이 잠들어 있다 새롭게 세상에 나온 원고를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새 단장을 해준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의 신선호, 김민정 두 선생님께 특히 감사를 드린다. 햄릿의 말처럼 이 함부로 쏜 화살이 어디로 떨어질지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처럼 예측 불허다. 다만 엉뚱하게도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불운한 형제의 머리를 맞히지 않기를 기대한다. 예상 밖의 순항을 한다면 조만간 이 사절판 번역본과 양절판 번역본을 통합한 통일의 꿈이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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