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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에세이

이름:신경숙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3년,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 (염소자리)

직업:소설가

가족:1999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자 시인, 문학평론가인 남진우와 결혼하였다.

취미/특기:독서

기타: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데뷔작
1985년 문예중앙 소설 <겨울우화>

최근작
2024년 4월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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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큰글자도서] 아버지에게 갔었어

지난해 늦은 봄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반쯤 써두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는 저도 다 써봐야 알겠습니다, 여름이 지나 완성이 되었을 땐 삶의 고통들과 일생을 대면하면서도 매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익명의 아버지들의 시간들이 불러내졌기를 바라봅니다,라고 썼었지요. 막상 연재를 시작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져서 새로 써야 했고 새로 쓰는 중에도 또 새로 쓰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여름에 마칠 줄 알았던 작품 쓰기는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새해가 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수정하고 덧보태고 새로 쓰다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한 후 많은 분에게 아버지에 대한 작품은 쓸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참 단호하게도 쓸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네요. 그래놓고는 십여년이 지나 이 작품을 썼으니 누군가, 엄마 이야기를 쓰더니 이젠 아버지 이야기야?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소설 속의 이 아버지를 잘 살펴봐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듯한 이 허름한 아버지는 처음 보는 아버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개별자로 생각하는 일에 인색해서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아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내고도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는 이 말수 적은 익명의 아버지를 쓰는 동안 쏟아져나오는 순간순간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쓴 이야기들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사용한 농기구는 제자리에 두고, 집을 비울 때에도 남은 사람이 쓸 만큼의 최소한이라도 돈을 남기고, 무엇이든 새로 배우려 하고…… 뿌린 만큼만 바라고, 자신은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내고, 약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약자를 거두려 했던 이 아버지의 태도에 집중하고 싶었으니까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먼지 한톨로 사라질 이 익명의 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가서 이제라도 그가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죄다 알아듣고 싶었습니다. 하나 불가능했습니다. 익명의 그는 그 나름으로 도저해서 자주 저를 우두망찰하게 했습니다. 모진 현대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상처를 등에 지고 살아온 이 아버지에게 남은 게 소멸 직전의 육체와 시골집 벽에 걸린 학사모를 쓰고 찍은 자식들의 사진뿐이라고 여기는 것도 제 생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잊힌 것 같은 그의 존재에 숨을 불어넣고 싶은 이 글쓰기가 저의 욕망에 불과한 것처럼요. 그래도 그의 가슴에 잠겨 있는 그가 하지 못한 침묵의 말들을 호호 불어서라도 건져올려 죽음 저편으로까지 이어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아버지조차 단독자로 보는 눈을 갖지 못하고 ‘아버지’라는 틀에 묶어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심장에 쏘아버렸을지 모를 화살을 뽑아드리고 싶었습니다. (…) 참나무 밑에는 참나무 잎이 지겠지요. 가까운 아래 지느냐 저만큼 날아가서 지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설마 여기 있는 참나무 잎이 저기 다른 산의 잣나무 밑에 가서 쌓이겠는가요.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 설 때면 으깨진 마음으로 이 소설 속의 J시를 생각하며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게 J시와 독자들은 대자연 같은 의미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그 품에 의해 제가 구해지는 때가 적잖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곳에 듬성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담기기도 했습니다. 나이 든 잎사귀, 젊은 잎사귀 들이 바스락거리면서 참나무를 돌보는 것을 지켜보는 시선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 안에 스며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또 이런 가족이 어디 있어, 할 수도 있겠으나, 있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떤 참나무 한그루에게 바치는 서사시라고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길게 주어진 격리의 시절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각각 도약의 순간에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제 안부를 전합니다. 2021년 봄 신경숙 씀

감자 먹는 사람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유독 작품을 쓸 때의 나를 집중시키던 열렬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가 정주자인 줄 알았는데 작품 속의 공간들을 생각해보니 많이도 떠돌아다녔구나, 싶다. 내 영혼까지 파묻고 싶은 구덩이를 만나지 못한 탓일 게다.

겨울 우화

「겨울우화」는 내 등단작품이다. 85년 겨울의 일이니 27년 전의 일이다. 1985년 가을에 광화문 우체국에서 펀치를 빌려 원고지의 구멍을 뚫던 생각이 난다. 그 시간에 누군가 태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스물둘이었고 지금은 오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두렵다. 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나 쓸 수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를 ‘저기’까지 가게 할 것 또한 내가 글을 쓴다, 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 누군가 이 책을 읽으며 27년 전이 있었듯이 27년 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기쁨이겠다. - 3판 작가의 말

그는 언제 오는가

내겐 글쓰기가 타인과 나 사이에 생긴 균열생과 소멸사이에 얼룩져 있는 쓰라림들을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다. 한밤중에 어두운 얼굴로 더듬더듬 문장을 골라 끊긴 길을 조금이어 보고 있으면 사랑이나 죽음 욕망이 일렁이는 심연 저편이 온화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쓰는 일은 끔찍하게 고독하다. 이렇게 가긴 가지만 늘 등짝에 멍이 들어 있는 기분이다. 큰 그늘에 스며 없어지고 싶을 때도 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지금에야 나는 소설의 효용가치를 믿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싶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우리들 생의 모랄에 끼여들어 새 인사를 하고 싶고 인간이 지닌 친밀성에 냉소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만 변화시켜 놓고 싶다.

깊은 슬픔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恩瑞)라 짓는다. 첫 장편소설인 깊은 슬픔의 첫 문장을 위와 같이 쓰고 십삼 년이 흘렀다. 개정판이라 하나 표지를 바꾸고 상하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한 권으로 합쳐놓아 책이 무척 두꺼워졌을 뿐이다. 교정지를 책상 위에 일 년 가까이 올려놨으나 문장 하나 손대지 않았다. 이따금 깊은 슬픔 앞에서 손깍지를 깊이 끼고 있다가 어느 날 남자가 여자의 속눈썹을 세어보는 장면과 마주쳤다. 속눈썹 숫자가 너무 적은 것 같아 숫자를 바꿀까 하다가 그것도 그대로 두었다. 그때 내가 선택했던 그 숫자에 대한 의미를 지금은 잊었지만 그땐 절실히 그 숫자여야만 했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에. 어디 한 군데를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기에. 내가 썼지만 그때였기에 쓸 수 있었지 지금의 나는 도저히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오히려 내가 놀라기도 했다. 오로지 '너'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었다니, 아, 그때는 '너'만 있으면 되어서, '너'만 아름다워서, 어떤 식으로든 '너'의 곁에 존재하고 싶었기에,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리고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라는 문장을 끝 문장으로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너’ 들이 사라졌는데도 이 작품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을 골라내던 그때의 열정이 이렇게 고스란히 되살아나 겁이 나기도 하다. 지나온 곳으로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말자, 고 다짐한다.

내 마음의 빈 집 한 채

나는 소설가지만 그런 의미로 시인을 꿈꾸어왔으며 간혹 시인이 못 되어서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시인이 못된 내게 남아 있는 건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이다. 좋은 시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내 주변 사람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다른 이와 공유하기 싫어 숨겨놓기도 하고, 심야통화를 하다가 수화기 저편에 있는 이에게 자판으로 쳐서 팩스로 보내주기도 했다. 자랑삼자면 오분 전에 쓴 시를 읽어 주는 시인 친구도 두엇은 있고, 한껏 멋을 내서 시를 적어 보내주는 독자도 한둘은 있다. 좋은 시를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 사나흘씩 장설이 내리는 그 마을의 마루가 짧은 집, 그 집의 방 안에 앉아 문풍지에 어리는 눈 그림자를 바라보던 때와 같은 고요의 순간을, 그런 날 바깥에서 돌아온 누군가 토방에 눈 묻은 신발을 툭툭 터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쁨의 순간을 동시에 누리곤 했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 이야기들은 늘 어느 한순간에 쓰였다. 새벽의 한순간, 여행지에서의 한순간, 책을 읽는 한순간, 당신 혹은 우리가 만났던 한순간들. 그러니까 내가 머물러 있던 어떤 순간들의 반짝임이 스물여섯 번 모인 셈이다. (…) 나는, 달에게 먼저 전해진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능하면 당신을 한번쯤 환하게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봄날 방을 구하러 다니거나 이력서를 고쳐 쓰다가, 나는 왜 이럴까 싶은 자책이나 겨우 여기까지? 인가 싶은 체념이 당신의 한순간에 밀려들 때, 이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반짝여주었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딸기밭

예나 지금이나 어떤 상황에서나 작가로서 내가 글쓰기를 통해 얻어내고 싶은 것은 자유였을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혹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언어의 세계를 탐식하고, 그것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소설이 혹 아름답다면 그건 내가 아름답지 않아서이고, 내 소설이 혹 불온하다면 그건 내가 불온하지 못해서이며, 내 소설이 혹 그로테스크하다면 그건 내가 그로테스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움이나 관능, 폭력 또한 그러하며 혹 내 소설이 사랑스럽다면 그것 또한 내가 사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실이나 결핍 부재들은 소설 속에서는 외려 다정한 손이 되는 법이다. 가능한 한 수많은 긴 손가락들이 내게서 뻗어나가 인간의 영역을 확장시키거나 존재의 텅 빈 심연 한켠을 채워준다면 작가로서 보람이겠다.

리진 1

리진을 쓰는 동안 나는 충만했다. 나 자신이 외국인이 되어 백년 전의 조선 땅을 여행하는 듯 했다. 친숙한 거,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니면 소설로 쓸 엄두를 못 내던 내게는 새로운 영지였다. ... 서사를 요구하는 시대지만 나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격렬한 서사의 숨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활극이나 신파나 인간승리의 작품이 되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승리보다는 패배의 서사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바르게 잊혀지는가가 인생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날 사람은 만나듯이 리진의 서사는 내가 밀어 넣어도 넣어도 고개를 디밀고 올라왔다. 저절로 찾아든 이야기의 두께가 리진의 몸통이 되어준 것은 이 작품을 쓰며 거둔 즐거운 수확이었다.

리진 2

리진을 쓰는 동안 나는 충만했다. 나 자신이 외국인이 되어 백년 전의 조선 땅을 여행하는 듯 했다. 친숙한 거,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니면 소설로 쓸 엄두를 못 내던 내게는 새로운 영지였다. ... 서사를 요구하는 시대지만 나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격렬한 서사의 숨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활극이나 신파나 인간승리의 작품이 되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승리보다는 패배의 서사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바르게 잊혀지는가가 인생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날 사람은 만나듯이 리진의 서사는 내가 밀어 넣어도 넣어도 고개를 디밀고 올라왔다. 저절로 찾아든 이야기의 두께가 리진의 몸통이 되어준 것은 이 작품을 쓰며 거둔 즐거운 수확이었다.

모르는 여인들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모르는 여인들 스페셜 에디션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바이올렛

오산이. 이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준 지가 꼭 일 년이 되었다. 오산이는 내 단편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분신이다. 이 여자를 바로 다시 세상에 내보내려 했는데 다른 작품에 밀려 이제야 이루었다. 빚어지지 못한 채로 내 마음속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산 셈이다. 오해 많은 세상에 이 여자를 내보내려 하니 미안해 죽겠다. 제대로 맛있는 것도 먹이지 못했고, 좋은 옷도 입히지 못했으며, 종내는 꿈과 욕망조차 바스라지게 했으니 이 여자의 어미나 되는 듯 마음이 쓰리다. 이 여자를 통과해가는 시선 속에서 이 여자가 새로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작가 후기 중에서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아주 작은 식물이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잡초로 여길 수 있는 꽃입니다. 바이올렛이라고 이 소설 제목을 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조용히 존재하는 한 여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별 특징 없는 익명의 존재, 그녀는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죠.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그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부활시키고 싶었던 내 욕망이 담긴 소설이 이 『바이올렛』입니다. (…) 작가로서 내가 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 고통 속에서도 노트를 꺼내 글을 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다시 이 여성의 서사가 다른 뜻을 품고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_신경숙,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부석사

나를 여기에 두고 저만치 가 버리는 그런 것, 소설 제게 있어서 소설은... 그런 것입니다. 언제나 저를 여기에 두고 저만치 가 버리는 그런 것. 딴엔 눈을 부릅뜨고 그 뒤를 쫓아가 보지만 가 보면 또 저만치 가 버린 뒤입니다. 새 작품을 시작할 때면 흥분과 설렘으로 과연 이번에는 어떤 것이 나오려는가, 스스로 숨죽이면 긴장하지만 마쳐 놓고 보면 삶을 뒤쫓아갈 뿐인 언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 메워질 수 없는 거리를 감지하면서도 작가로 살아가고 있으니 치유될 수 없는 이 괴리가 제 운명이라 여깁니다. 이러해서 고독과 죽음 앞에 선 존재 탐구, 살아 있는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의 가치, 어긋난 개인과 사회, 등돌린 타자들끼리의 새로운 관계망을 언어로 형성해 보려는 제 여정은 늘 과정에 놓여 있을 뿐으로 완성이 될 수 없습니다. - 신경숙(소설가)

아버지에게 갔었어

지난해 늦은 봄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반쯤 써두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는 저도 다 써봐야 알겠습니다, 여름이 지나 완성이 되었을 땐 삶의 고통들과 일생을 대면하면서도 매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익명의 아버지들의 시간들이 불러내졌기를 바라봅니다,라고 썼었지요. 막상 연재를 시작하고 보니 마음이 달라져서 새로 써야 했고 새로 쓰는 중에도 또 새로 쓰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여름에 마칠 줄 알았던 작품 쓰기는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새해가 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수정하고 덧보태고 새로 쓰다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한 후 많은 분에게 아버지에 대한 작품은 쓸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참 단호하게도 쓸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네요. 그래놓고는 십여년이 지나 이 작품을 썼으니 누군가, 엄마 이야기를 쓰더니 이젠 아버지 이야기야?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소설 속의 이 아버지를 잘 살펴봐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듯한 이 허름한 아버지는 처음 보는 아버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개별자로 생각하는 일에 인색해서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아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내고도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는 이 말수 적은 익명의 아버지를 쓰는 동안 쏟아져나오는 순간순간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쓴 이야기들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사용한 농기구는 제자리에 두고, 집을 비울 때에도 남은 사람이 쓸 만큼의 최소한이라도 돈을 남기고, 무엇이든 새로 배우려 하고…… 뿌린 만큼만 바라고, 자신은 학교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내고, 약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약자를 거두려 했던 이 아버지의 태도에 집중하고 싶었으니까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먼지 한톨로 사라질 이 익명의 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가서 이제라도 그가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죄다 알아듣고 싶었습니다. 하나 불가능했습니다. 익명의 그는 그 나름으로 도저해서 자주 저를 우두망찰하게 했습니다. 모진 현대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상처를 등에 지고 살아온 이 아버지에게 남은 게 소멸 직전의 육체와 시골집 벽에 걸린 학사모를 쓰고 찍은 자식들의 사진뿐이라고 여기는 것도 제 생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잊힌 것 같은 그의 존재에 숨을 불어넣고 싶은 이 글쓰기가 저의 욕망에 불과한 것처럼요. 그래도 그의 가슴에 잠겨 있는 그가 하지 못한 침묵의 말들을 호호 불어서라도 건져올려 죽음 저편으로까지 이어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아버지조차 단독자로 보는 눈을 갖지 못하고 ‘아버지’라는 틀에 묶어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심장에 쏘아버렸을지 모를 화살을 뽑아드리고 싶었습니다. (…) 참나무 밑에는 참나무 잎이 지겠지요. 가까운 아래 지느냐 저만큼 날아가서 지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설마 여기 있는 참나무 잎이 저기 다른 산의 잣나무 밑에 가서 쌓이겠는가요.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 설 때면 으깨진 마음으로 이 소설 속의 J시를 생각하며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게 J시와 독자들은 대자연 같은 의미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그 품에 의해 제가 구해지는 때가 적잖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곳에 듬성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담기기도 했습니다. 나이 든 잎사귀, 젊은 잎사귀 들이 바스락거리면서 참나무를 돌보는 것을 지켜보는 시선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 안에 스며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또 이런 가족이 어디 있어, 할 수도 있겠으나, 있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떤 참나무 한그루에게 바치는 서사시라고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길게 주어진 격리의 시절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각각 도약의 순간에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제 안부를 전합니다. 2021년 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이 작품은 육 개월 동안 연재된 원고를 초고 삼아 지난겨울 동안 다시 썼다. 겨울만이 아니다. 봄과 이 초여름 사이…… 아니, 방금 전까지도 계속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쇄되기 직전까지도 쓰고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책이 나온 후에도. 어째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도 계속 이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을 향한 나의 이 발신음이 어디에 이를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울한 사회풍경과 시간을 뚫고 나아가서 서로에게 어떻게 불멸의 풍경으로 각인되는지……를 따라가보았다. 가능한 시대를 지우고 현대 문명기기의 등장을 막으며 마음이 아닌 다른 소통기구들을 배제하고 윤이와 단이와 미루와 명서라는 네 사람의 청춘들로 하여금 걷고 쓰고 읽는 일들과 자주 대면시켰다. 풍속이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도 인간 조건의 근원으로 걷고 쓰고 읽는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 안에서 나는 작품 바깥에서 글쓰기를 했던 셈이다. (……) 작품 속의 그들 또한 글쓰기 앞에서 뭔가에 벅차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느꼈던 그 모든 순간순간들을 여기에 부려놓고 이제 나는 다른 시간 속으로 건너간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엄마를 부탁해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엄마를 부탁해

오늘의 우리들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우리 어머니들이 이루어낸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 가슴 아픈 사랑과 열정과 희생을 복원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이로 인해 묻혀 있는 어머니들의 인생이 어느 만큼이라도 사회적인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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