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무엇보다 '침묵.' 그러니까 "인간은 말을 통해 침묵을 듣는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이다"라고 했을 때의 그 '침묵'을 듣고 싶었다. (...) 인간은 '침묵'과 접촉함으로써, 아니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삶의 저 너머로 뻗어간다. (...) 나는 이 '침묵'이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실재로 내 안에 머물고 있음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시는 어쩌면 '위기'를 먹고 자라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1997년 등단했을 때도 지금도 시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풍문은 여전하다. 그러나 한국시는 쉽게 휘갈겨 쓴 진단서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그냥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시를 넘어 내일로 도약하는 미학적 갱신이 없다면, 분명 한국시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