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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역사

이름:이상훈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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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나당전쟁>

이상훈

우리나라 고대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현재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관생도에게 한국사와 군사사를 강의하고 있다.
학군ROTC 37기로 육군 제1사단에서 군 복무했고, 경북대학교에서 『나당전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가쿠슈인대학과 중국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과 영남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KBS, MBC, EBS, 국방TV 등 역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편 『아시아경제』 신문에 「이상훈의 한국유사」 전쟁사 칼럼을 6년간 연재했다. 현재 고대군사사연구회, 북악사학회, 한국고대학회, 한국군사사학회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근에는 군사사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2023 군사사 콘텐츠의 현재와 미래」를 기획하기도 했다.
개인 저서로 『나당전쟁 연구』(201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전략 전술의 한국사』(2015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2016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전쟁 이후의 한국사』 (2018), 『신라의 통일전쟁』(2021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등이, 번역서로 『군인수지』(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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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나당전쟁> - 2023년 9월  더보기

나당전쟁羅唐戰爭(670~676)은 약소국 신라가 최강대국 당을 상대로 7년간 벌인 전쟁이다. 당에게는 여러 전장戰場 중 하나였지만 신라에게는 전부였다. 다시 말해 신라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나당전쟁은 삼국통일의 마지막 단계로, 이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통일신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최근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니라 ‘백제 통합’에 불과하며, 우리의 진정한 통일은 고려에 의한 통일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설인귀서薛仁貴書」에는 당이 신라 영토로 인정하는 범위가 서술되어 있다. 바로 “평양 이남平壤以南 백제 토지百濟土地”라는 표현이다. ‘삼국통일’ 입장에서는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토지’로 이해하고, ‘백제 통합’ 입장에서는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만으로 한정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백제 토지는 당연히 평양 이남이다. 수백 년간 전쟁을 해온 신라나 당이 백제 토지가 어딘지 모를 리 없다.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가 성립하려면, 평양 이북의 백제 토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백제는 평양 이북에 토지를 소유한 적이 없다. 일례로 ‘의주 이남의 신라 토지’나 ‘압록강 이남의 신라 토지’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신라 토지를 지칭할 때 의주나 압록강은 불필요한 단어다. 임진강 이남의 신라 토지라면 모를까, 의주나 압록강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설인귀서」가 작성된 시기는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7세기다. 7세기에 백제는 대동강 이남을 점유한 적이 없다. 이 지역은 당연히 고구려 영토였다. 고구려는 5세기에 평양 지역으로 천도했고, 평양 이남 황해도 지역은 수백 년간 고구려의 핵심 영토였다. 당 입장에서 신라에게 백제 토지를 준다고 할 경우, 그냥 ‘백제 토지’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굳이 ‘평양 이남’을 추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에게는 백제 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방어에 유리한 대동강이라는 자연 경계가 더 의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까지는 신라가 차지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901년 건국된 ‘후고구려’에서 출발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삼국을 ‘통일(676년)’한 적이 없는 신라인데, 어떻게 통일신라 강역 내에서 그것도 2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후고구려’를 지향하며 건국할 수 있었을까? 후고구려의 인구·영토·유산이 통일신라의 것이 아니라면, ‘만주 벌판’ 고구려의 것을 도대체 언제 이어받았을까? 이와 관련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의 존재가 제시된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934년 대광현은 발해 유민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귀부했다. 고려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라는 주요 근거다. 당시 발해의 인구는 적어도 수백만 명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수만 명, 즉 인구만 놓고 보면 채 10퍼센트도 안 되는 이들만 고려로 흡수된 셈이다. 발해 영토는 고스란히 거란으로 넘어갔고 발해 유민이 발해의 후신을 자처하며 건국한 정안국定安國도 거란에 흡수되었다. 우리야 당연히 대광현의 고려 귀부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고 강조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발해 인구 90퍼센트 이상과 영토 전체가 거란으로 넘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 왕조인 거란이 발해의 후신을 자처한 정안국도 흡수했음을 강조한다. 신라가 고구려의 유산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본다면,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명확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만의 역사 인식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고구려는 물론 발해의 인구·영토·유산을 거란이 다 가져갔다고 주장하는 그 중국을 상대로 말이다. ‘삼국통일’ 문제를 어설프게 대응하다가는 ‘신라만 한국사’라는 중국 논리에 휘말릴 수 있다. 실제 중국은 2017년 동북 고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거란의 역사 편년을 발간한 바 있다. 최근 중국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고 한반도 남부만 병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이 통일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구려 는 발해로 이어지고 그 발해는 거란으로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논리에 따른다면 신라만 한국 고대국가라는 이야기가 된다. 삼국통일 당시 신라가 흡수한 대동강 이남, 즉 황해도·경기도·강원도 등 고구려 영역의 인구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 고려보다 더 많은 인구와 영토를 일차적으로 흡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구려 유산도 적지 않게 흡수했음은 분명하다. 통일신라 강역 내에서 후고구려가 건국되었고, 결국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추 가로 흡수했다. 그후 고구려를 지향하며 북진 정책을 펼쳐 통일신라 강역에서 조금 더 북상했다. 조선 또한 고려 강역에서 조금 더 북상해 현재의 국경선을 완성했다. ‘삼국통일’이라는 주제는 역사학계 내부의 단순한 논의에 그치지 않는다. 감상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중국은 우리 빈 틈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이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속내를 모르면 곤란하다.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고리타분한 수천 년 전 이야기지만, 북한 정권 붕괴 시 중국의 한반도 개입 명분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타국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옛 영토, 즉 ‘고토故土를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우리가 삼국통일 과정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나당전쟁은 삼국통일의 마지막 단계로 우리 삼국이 단일 국가로 변모하는 획기였다. 우리는 660년에 멸망한 백제 역사,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전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관련 사료는 부족한데 한·중·일 학자별 견해가 제각각이어서 하나의 사안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전쟁이라는 다이나믹한 사건이지만 여러 학설을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고 만다. 여기에 더해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마저 적지 않게 작용한다. 과거 사실이 현실 정치의 연장선에서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도구로 전락하곤 하는 것이다. 2012년 『나당전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만 10년이 지났다. 그간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나당전쟁이라는 주제는 대부분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계 내에서만 소화되었다. 일부 교양서나 인터넷 자료에서 다루어지긴 했지만 일반 대중에게 그리 친숙한 주제는 아니다. “신라는 왜 전쟁을 시작했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나당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당전쟁을 대중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당전쟁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물음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수년간 고민한 결과물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나당전쟁 연구』(2012),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2015), 『신라의 통일전쟁』(2021) 등의 저서와 『아시아경제』 신문에 연재한 「이상훈의 한국유사」(2017~2022) 칼럼 등을 엮어 재구성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나당전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기순으로 편성했다. 최근 개별 사건의 연도를 조정해서 이해하려는 연구가 활발한 편이지만, 학술논의가 아니기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그대로 정리했다. 2부는 나당전쟁과 관련된 여러 논의와 의문점을 필자 견해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시대순으로 된 1부를 먼저 읽은 후 주제별로 된 2부를 읽으면 나당전쟁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책은 없다. 이 책에는 각주를 따로 두지 않았다. 이를 불친절한 것으로 여기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라 옛날 이야기처럼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책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참고문헌은 개인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밝혀두었다. 보다 심도 있는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나당전쟁과 관련된 학술서와 연구논문을 참고하면 좋겠다. 또한 개인의 박사학위논문과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최근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다만 나당전쟁이라는 주제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음을 알아주면 감사하겠다. 이 책을 통해 나당전쟁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조금이 나마 높아지기를 기대해본다. 2023년 8월 화랑대에서

- 책을 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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