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여명, 호는 복애 금성사람,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덕령부운, 간의대부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알고 사관에 뜻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통곡하여 말하되 “백이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하니 그 품절이 이러하더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고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고향 금성으로 돌아가 세상을 마쳤다
충렬록과 해동삼강록에 실렸다. 저서로는 『동방연원록』이 있는데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된다(한국인명사전) 『태백일사』 고려본기에 의하면 이암과 함께 천보산 태소암에서 놀 때 거사에게서 많은 『기고지서』-이는 한단 이후로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의 진결이라 한다-를 얻어 행촌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를 상,하를 저술했고 청평산인 이명은 조선시대 숙종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의 저본이 되는 『진역유기』 3권을 썼다고 한다. 범장의 초명은 세동이며 그의 무덤이 현재 광주시 광산구에 실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