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 화백의 <35년> 시리즈가 출간 2년여 만에 완간되었다. 국내외 답사를 포함한 준비 과정을 포함하면 5년 만의 결실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총 스무 권으로 갈무리했던 그는 일제강점기 35년의 역사를 총 일곱 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그려 냈다. 얼추 5년마다 한 권인 셈이니 그만큼 알차고 단단하게 되살려 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 장면들을 충실히 구현한 만화뿐만 아니라 각종 사료와 도표, 인명사전과 연표까지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그 모든 작업을 박시백 화백이 손수 진행했다는 이 작품은 일제에 맞서 싸웠던 35년의 세월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한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시백 화백은 말한다. 8.15 해방은 우리 선조들의 힘으로 일궈낸 일이니 자랑스러움을 간직한 역사로 바라보자고.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투쟁 정신이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것은 광복 75주년을 맞은 우리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역사 MD 홍성원
작가의 말
비록 독립을 가져온 결정적 동인이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설명은 무지 혹은 의도적 왜곡이다. 자학이다. 우리 선조들은 한 세대가 훌쩍 넘는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줄기차게 싸웠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국경을 넘었고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총을 들었고, 폭탄을 던졌으며, 대중을 조직하고 각성시켰다. 그 어떤 고난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들이 있어서 일제 식민지 35년은 단지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움을 간직한 역사가 되었다.
플라뇌르. 도시를 걸으며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하는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남성 명사다. 저자 로런 앨킨은 이 단어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스스로에게 붙인다. 플라뇌즈.
호명은 존재를 가시화한다. 앨킨은 "마치 페니스가 지팡이처럼 걷는 데 꼭 필요한 부속품이라도 되는 것마냥" 남성들에게만 도시 산보를 허락했던 사회에서 숨었던 플라뇌즈들을 드러낸다.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아녜스 바르다, 진 리스, 소피 칼... 그는 이 여성 예술가들이 앞서 걸었던 바로 그 도시들을 걸으며 그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사유를 넓혀나간다.
억압의 기능만 남아있는 금기를 깨고 기존의 통념을 전복하는 글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런 글에서도 표현 방식은 여럿인데, 이 책의 매력은 과도하게 힘 들어가지 않은 태도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여자라면 고어텍스를 입고 쭈그려 앉지 않아도 전복적일 수 있다. 그냥 문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도시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전복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플라네리(산보)도 그저 플라네리로만 받아들여지는 세계가 정상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 인문 MD 김경영
이 책의 첫 문장
내가 플라뇌르(flaneur, 산보자)라는 단어, 아치가 얹힌 a에 구불거리는 외르(eur)라는 발음까지 붙은 독특하고 우아한 프랑스어 단어를 처음 만난 게 어디에서였을까?
허지웅 작가가 <나의 친애하는 적> 이후 4년 만에 에세이를 펴냈다. 새 책을 준비하는 사이, 작가에게 어둡고 깊은 시련의 과정이 있었다. 2018년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고 지독한 투병의 시간을 통과했다. 버티고 견뎌내어 드디어 독자들 앞에 다시 선 작가가 진심을 다해 한 문장 한 문장 힘주어 써내려간 25편의 이야기가 <살고 싶다는 농담>에 고스란히 담겼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온몸이 부어 물건을 집을 수 없고, 손발 끝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밤마다 제발 덜 아프기를 아무에게나 빌었다. 천장이 내려와 몸을 누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겨우 잠들었다 깨면 바닥에 뒹굴곤 했다. 천장과 바닥이 호시탐탐 노리는 고통의 날을 감당하고 난 뒤 살기로, 살아내기로 결정했다.
고통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맞이했던 숱한 밤과 낮들을 보내며 깨달은 마음과 다짐과 생각들이 이 한 권에 간절하게 녹아져 있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과 같은 마음의 모두에게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살기로 결정하라고, 삶의 바닥에서도 괜찮다고 버티라고, 따뜻한 조언과 응원을 건넨다.
- 에세이 MD 송진경
이 책의 첫 문장
망했는데. 세 번째 항암 치료를 하고 나흘째 되는 날 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책의 한 문장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저는 언제나 발렌시아로 돌아갈 생각만 합니다. 그 해변으로 가 그림을 그릴 생각만 합니다. 발렌시아 해변이 바로 그림입니다."(90쪽) 스페인의 바다를 그린 화가, 호아킨 소로야의 세계를 소개한다. 한낮의 발렌시아 해변, 충실한 어부들<돌아오는 고깃배>과 뛰노는 어린이들 <바다의 아이들>, 빛을 받고 선 자신의 아내와 딸<바닷가 산책>. 호아킨 소로야는 태양빛을 머금은 붓으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화폭 위에 옮겼다. 흐드러지는 빛,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그 순간의 찬란함이 그의 그림 안에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파블로 피카소 등의 스페인 화가들이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와 <게르니카> 등의 강렬한 이미지로 대표적인 스페인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세계 최고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던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은 점차 잊히고 말았다. 그렇지만 '바다 위에서 빛은 여전히 빛나고'(92쪽) 이 아름다움은 백여 년의 시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도달했다.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바다, 그 자연을 가득 담은 싱그러운 책을 만난다.
- 예술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나는 아이처럼 흥분했다네. 우리는 여기 자리를 잡고, 영혼을 기쁘게 해 주는 너무나 파랗고 격렬한 바다를 이미 즐기고 있네... 하베아는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충만한 느낌이라네."
소로야가 친구 페드로 힐 모레노에게 보낸 편지 중, 1905년 7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