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그리운 세계"
<내가 싸우듯이>,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정지돈 장편소설. 여기 실존인물 '정웰링턴'이 있다. 1927년 하와이에서 태어났고, 의학을 전공했으며, 체코의 헤프에서 의사로 일했다. 체코 여성 안나와 결혼했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체코 시민권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인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인 현앨리스는 미국 스파이로 오인받아 북한에서 처형되었다. 한때 북한에 가길 바랐던 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체코 비밀경찰과 협력하던 공산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에게 매혹당했다"는 말. 작가 정지돈은 정웰링턴의 삶을 통해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그리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 보여준다.
정웰링턴의 삶의 연표를 요약해 기억하는 건 이 소설을 체험하는 정확한 방법은 아닐 듯하다. 정웰링턴이 걸었을 체코의 거리의 추위. "세계가 변한 건가? 내가 변했나?"(9쪽) 이어지는 자문. "당시에는 아무것도 무의미하지 않았다. 모든 행위가 유의미했으며 의미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을 뜻했고 그것은 영원불변의 법칙이 존재함을 뜻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 (19쪽)로 이어지는 논리의 궤적. "그는 책을 읽으며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체험할 수 있는 어떤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28쪽)라는 문장을 읽으며 '어떤 예감만이 존재하던 시절'에 함께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이 지적인 소설은 정지돈의 글쓰기답게 수많은 사실과 결정적인 허구를 엮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81쪽)을 깨닫는 과정을, 어떤 마무리에 대한 예감을 체험하게 한다.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에 관해 이야기한 책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의 번역가이기도 한 김수환은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추천한다. "내가 늘 신기해하고 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인간이란 자기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에조차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향수를 지닌 어떤 독자를 위한, 유머와 비감 모두에 매혹되는, 오직 그들에게 꼭 알맞은 소설이 이곳에 도착했다.
- 소설 MD 김효선 (2020.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