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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지은이) | 교유서가 |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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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자책 : 10,100원 전자책보기
반양장본 | 348쪽 | 135*205mm | 484g | ISBN : 978895465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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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 구매 자목련 2018-12-31

     불쑥 무언가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문장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자판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쓴다. 지금도 그런 순간이다. 손홍규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읽고 이야기를 전하는 글이지만 실은 그냥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책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글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일기를 쓰던 시절에는 일기의 위대함을 알지 못했다. 그 시절의 일기를 쓰던 목적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숙제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나의 진짜 마음은 숨기고 가면을 쓴 다른 나의 감정을 쓴 기록 말이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무언가를 쓸 때 진짜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하는 글 사이를 오갈 때가 생겼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 둘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손홍규의 글처럼 나는 책의 속삭임과 고함을 들었고 답으로 나도 그에게 속삭인다. 거기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책은 물질이다. 아니 차라리 하나의 질료다. 독서를 통해 완성되는 질료다. 책을 읽고 난 뒤 대체 누가 그것을 한낱 활자가 박힌 종이들의 묶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책은 속삭일 줄 안다. 책은 고함을 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은 홀로 속삭이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는다. (150쪽)

     

     마당 한구석에 자리한 외양간과 그 안에 코뚜레를 하고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던 소를 기억하는 순간, 나는 손홍규가 보낸 어린 시절을 알 것만 같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삶의 고달프고 서러움, 방학마다 내려오는 사촌의 하얀 피부가 부러운 나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잊을만하면 손가락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가 나의 어린 동생 같았고 상경하여 대학을 다니면서 친구와 선후배의 자취집을 전전하던 그 모습은 나와 친구의 모습이었다. 같은 듯 다른 삶을 살아온 이야기는 애틋하고 반가우면서도 마뜩잖은 것이다. 왜냐면 그 삶의 통증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로 등단한 소식을 전하자 그의 아버지가 축하 인사를 전하며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던 것처럼.

     

     유년시절 기억의 전부를 지배하는 할머니의 죽음, 피붙이의 소중함을 일깨운 고모의 죽음, 자신의 전부를 소진한 소를 트럭에 태우고 나가는 마음, 손가락을 다쳐 병원에 가신 부모님을 홀로 기다리는 저녁. 그 순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기억되는 감정의 순간이겠지만 그 모든 것의 종착역은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이다. 그것들에 대하여 차분하게 글로 써 내려가는 손홍규는 누군가의 과거이거나 누군가의 미래이다. 그래서 기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의도하지 않게 어떤 불행과 마주한다.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절망이 엄습해오는 걸 똑똑히 목격하기도 한다. 그것과 어떻게 손잡고 어떻게 함께 나가야 하는지 안다면 삶은 평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원인을 밝히고 고쳐내려 할 뿐이다. 글을 업(業)으로 삼은 작가이기에 그에게는 글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글이라는 형식으로 세상에 고한다. <정권교체 희망선언>에 참여하였고 세월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길, 그 끝에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다친 마음은 순간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설령 기다리는 누군가를 대신해 불 꺼진 작은방, 옷걸이 걸린 허름한 잠옷, 한 권의 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은 춥지 않고 바람은 잔잔해질 것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삶을 모른다. 알 수 없다. 문학을 좋아해서 문학을 읽고 이렇게 중얼거리듯 뭔가 쓰고 있지만 문학가의 삶은 가까운 듯 멀다. 그러니 그가 터키에서 만난 고령의 작가 ‘야샤르 케말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아지즈 네신’이 남긴 흔적을 찾으면서 무슨 다짐을 했을지 모르다. 그럼에도 어떤 비장함이 느껴지는 건 그가 분명 어떤 절망을 건너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절망한 자만이 누군가의 절망을 볼 수 있다. 절망한 자만이 절망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설령 그것의 깊이를 잴 수 없다 하더라도. 손홍규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지닌 사람이다.

     

     살아남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하고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으려면 낙관해야 한다. 비관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절대적이고 필사적으로 낙관해야 한다. (283쪽) 

     

     쓴다는 것은 다짐인지도 모른다. 절대적이고 필사적으로 낙관해야 한다고 쓰면서 그는 그것이 ‘자기암시’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살아남았으니, 살아남은 자로 살아야 한다. 죽은 자처럼 살지 않아야 한다. 절망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다쳐 약을 바르는 게 아니라 수술을 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살아 있음을 노래해야 한다. 여전히 나는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 없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릴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쓰고 싶다. 나 역시 살아남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살아남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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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잭와일드 2018-12-31


    2018년을 열면서 나는 42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읽었다. 세대간, 성별간 시각 차이의 기저에 내려앉은 상실과 절망에 대해 무겁고 깊게 성찰한 소설이었다. 작가의 전작 <그 남자의 가출>에서 다룬 좌절, 실패, 상실감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더욱 깊게 침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어느날 문득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두 눈에서 용암처럼 눈물이 흘러나와 귓속에 고이지 않던가.”(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65)하고 읊조리던 소설 속 늙은 불한당의 독백은 가슴에 오래 남았다. 작가의 수상소감은아짐찮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아짐찮다는 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 말. 유언처럼 아껴둔 이 말.” 작가가 이 말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작가는 작품집에 수상소감과 함께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을 남겨 놓았다. 이것이 나를 작가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으로 이끌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진정성을 느꼈고, 동시에 온 생애를 다해 성과 속의 경계를 떠돌아야 하는 소설가로서의 그의 삶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학적 자서전은 본 산문집 1부에도절망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우리에게 문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 손흥규에게 문학은 소다. 소는 그에게 다정한 동무인 동시에 소통불능의 벽이었고, 긴 세월 그의 삶을 담담하게 지켜봐온 목격자인 동시에 그를 배신하고 다른 세계로 떠난 그 무엇이었다. 또한 그것은아직 차갑기만 한 불꽃’ (18)처럼 삭혀지는 서투른 욕망과 분출되려는 욕망의 충돌이었고, ‘육식동물의 송곳니’ (20)처럼 단단하고 투박한 그의 잃어버린 일부분이기도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이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문학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눌 수 있을테니. <그 남자의 가출>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소설은 온기가 남은 아궁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 앉아 손을 내민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삶의 숨결을 느낀다. 산문집 뒷편의 미니픽션 <불한당의 소설사>에서 노소설가는문학은 감동을 통해 평범하고 흔한 진리를 비범하고 독특한 진리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341)라고 말한다. 이는 노소설가의 입을 빌린 작가 손흥규의 아포리즘 (Aphorism)임을 나는 이 산문집을 읽으며 깨달았다. 결국 문학은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118)

     

    산문집에는아짐찮다.’는 작가의 수상소감의 의미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아짐찮다는 사전에 담기지 않은 말로 저자의 할머니가 자주 사용한, 저자가 결코 흉내낼 수 없다고 말하는 단어다. 언어는 기표 (Signifiant)와 기의 (Signifie)가 유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작가는 할머니의 말투와 어휘를 흉내낼 수 없는 이유는 할머니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사연들과 그 말에 깃든 정서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의 낱말 속에 담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무거운 한 사람의 인생과 진심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사전은 할머니의 삶과 정서, 목소리의 떨림까지는 담아내지 못한다. 따라서, 작가는 소설가로서 사전에 없는 말을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어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소설가는 사전이 아닌 삶에서 언어를 발굴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삶이 아닌 다른 형태의 삶을 추구하는, 불확정의 영역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가진 사연의 일면들을 엿보면서 나는 조심스레 짐작을 해본다. ‘아짐찮다는 작가의 수상소감 속 마지막말은 긴 세월동안 함께 해온 문학에게 그가 건넨 인사 아니었을까?

     

    산문집 전반에 흐르는 감정 중 하나는 작가의 딸을 향한 애정이다. 산문집의 제목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도 딸과의 에피소드에서 따왔다. 아이가 오른팔을 다쳐 아픔을 달래기 위해 왼손으로 감싸쥔 모습을 보고 작가는 결국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혹은 최소의 방법은 자신에게 기대는 것임을,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속한다는 걸 (212) 부모의 입장에서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몸이 아닌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이 많아지게 될 아이가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길 바란다. 어쩌면 나에게도 작가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어 더 마음이 가고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완전한 어른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시대에 존재하는 일렁임을 경험하고 극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딸 아이도 나이가 들면서모호한 단어들을 하나씩 명백한 단어들로 뒤바꿔가고’ (52),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제아무리 반듯이 펴놓는다 해도 구겨진 은박지처럼 삶에 흔적이 남을’ (195)것이다. 하지만 딸 아이가 삶을 살아가며 시대의 풍랑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최고이자 최선의 응원은 자신이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 가족과 사회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종국에는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241) 깨닫게 되길 바란다.

     

    “괴물은 숲속에 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숲속에는 네가 잃어버린 것들, 두고 온 것들이 있어. 잃어버린 걸 찾고 싶으면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해... 우리는 우리라는 하나의 사연이 되어 깊어가는 가을밤에 소리 없이 지는 낙엽처럼 서로의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5)

     

    우리가 잃어버린것들, 두고온 것들은 무엇일까?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혹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문학이라는 숲에 머물 것이다. 나 역시 그 속에 머물면서 앞으로의 작가의 여정을 지켜보며 응원할 것이다. 2018년 한해의 시작과 끝을 손흥규라는 한 사람의 작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손흥규, #마음을다쳐돌아가는저녁, #교유서가, #이상문학상수상자, #꿈을꾸었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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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꼼쥐 2018-12-31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이유로 주눅이 들곤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어두운 방 한켠으로 달아나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무릎 꿇고 손을 드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두어 시간쯤 혼자만의 깊은 반성 정도는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세상에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을 일일이 다 알아둘 필요야 없다 할지라도 제 나이에 걸맞은 평균적인 앎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효자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제 부모가 지나온 삶의 여정을 더듬고 이해하면서 그 지난한 과정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만 같다. 이러한 느낌은 작가의 글이 주는 엄숙주의에서 비롯된다. 웃음기 쏙 뺀 그의 글은 단정하다 못해 서릿발처럼 엄격하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작가 개인의 자서전적 성격이 짙은 산문집인 까닭에 작가의 성장 배경과 소설가로서의 꿈과 희망, 문학에 대한 작가의 소신, 그리고 소설가인 작가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모습 등 다소 주관적인 이야기가 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독자층으로부터 공감을 득하는, 말하자면 작가 개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적 소신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까닭은 작가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작가의 부친이 탈곡기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잃고 절망한 나머지 크지 않은 논을 처분하여 중고 트럭을 샀고, 모친과 함께 행상에 나섰다. 옷과 신발, 그릇, 잡화, 닭, 청과 등을 팔고 다녔는데 장사 수완이 없었던 터라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이를 두고 작가는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다"고 썼다. 십여 년의 트럭 행상을 접은 후 조경업체 날품팔이로 칠팔 년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전지작업을 하기 위해 높은 사다리에 올랐다가 떨어져 크게 다쳤고, 수술을 하기 위해 마취실 입구에서 섰을 때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잡았던 기억을 들려준다.

     

    "당신의 손이 내 손안에서 어린 새처럼 떨었다. 당신의 두 눈은 이미 갈쌍갈쌍했다. 마취사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온 생애인 듯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다시는 그럴 수 없는 것처럼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것처럼 아버지의 손을 쥐고 있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p.79)

     

    그의 또 다른 산문집 <다정한 편견>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글을 읽다 보면 지금은 쓰지 않는 낯선 단어들로 인해 책을 덮고 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순간들을 종종 맞게 된다.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국어사전을 뒤적였던 건 대학 시절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은 이후 손홍규의 산문집이 유일하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잊혀가는 한글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그런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작가 개인에게 미칠 수도 있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도 점차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손홍규의 가치는 그 지점에서 발화된다.

     

    "같은 낱말이라 해도 사전에 있을 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아름다운 이유 역시 그 낱말을 발음하는 이의 사연이 담겨서라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정작 내가 흉내 내야 했던 건 할머니의 말투와 어휘가 아니라 당신이 세계를 바라보던 방식, 고달프고 끔찍하며 비참했으나 누구보다 낙관적이었던 당신의 태도였어야 한다는 후회가 찾아왔다." (p.45~p.46)

     

    어린 시절 작가와 내내 같은 방을 쓰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 고모의 죽음, 작가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팔아야만 했던 소, 대학시절의 문학 동아리 활동과 파란만장했던 대학 생활과 군대 시절의 기억, 터키 이스탄불에서 만난 '야샤르 케말' 등 그가 절망 속에서 고드름처럼 키워온 문학적 소양은 이 겨울의 한파처럼 매섭고 눈물겹다. 이십대 후반까지 농민이 되기를 꿈꿨던 그가 갑오농민전쟁 사료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는 '형님들의 서글픈 진심'. 농민 따위는 되지도 말고 생각도 말라며 윽박질렀던.

     

    "글을 쓰는 시간보다 아직은 글을 읽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영감을 받기 위해서고 영감이 필요한 이유는 글을 쓰지 못해서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나면 삶의 일부를 낭비해버린 듯 허탈하기까지 하지만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외려 과분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송구하기까지 하다." (p.303)

     

    바람이 차다. 작정한 듯 불어오는 바람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오래 기억하라고 다그치는 듯하다. 인간은 절망을 딛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지만 때로는 절망 앞에서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는 경우도 흔히 보지 않던가. 시가, 소설이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켜켜이 절망이 쌓일지언정, 마음을 다쳐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지언정 우리는 끝끝내 그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 더는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라는 작가의 다짐, 그 문장을 읽는 우리도 다시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지금은 다시 희망을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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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키치 2018-12-31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일곱 자식 중 다섯째 자식이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맏형이 양자로 떠났고, 맏형 노릇을 해야 했던 둘째형은 농사고 뭐고 다 싫다고 도시로 떠났다. 셋째형마저 도시로 떠나면 꼼짝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셋째형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네가 도시로 가서 대학에 가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덕분에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쭉 도시에서 살았다. 그랬던 셋째형이 얼마 전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 아흔네 해를 산 부친이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부친에 이어 가장 가까운 형마저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여겨질까. 과묵한 아버지와 변변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정 없는 딸인 나는 그저 멀찍이서 아버지의 심정을 혼자서 상상해보고 추측해볼 뿐이다.


    2018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손홍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읽는 내내 나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저자와 나의 아버지는 이십 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데도 두 사람의 삶은 상당히 비슷하다. 일단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라는 것이 그렇고, 식구처럼 데리고 살았던 소를 팔아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렇고,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한국 사회를 바꿔보려 노력했으나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더 많이했다는 것이 비슷하게 보였다. 덕분에 나는 요즘 부쩍 궁금해진 아버지의 마음속을 이 책을 통해 대신 살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향에서 함께 자란 형제자매(외동인 저자에게는 친형제자매만큼 가깝게 지낸 사촌 형제자매가 있다)에 대해서는, 친척 어른들에 대해서는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을까.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대학에선, 대학 밖으로 나와선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범하게 취업을 한 아버지와 달리, 저자는 어려서부터 간직했던 소설가의 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그 과정이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시선 또한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절망이 사무쳐 절망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나뿐인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기꺼이 소를 팔았던 아버지는 자식이 등단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짜고짜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힘들게 일하고 가진 것 다 팔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낸 아들이, 자신이 높은 곳에서 쓰러지고 손가락 한 마디가 잘리고 의식을 잃고 혼수 상태에 놓이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무력하게 떨기만 하는 존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하며 나와 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살뜰히 뒷바라지를 한 나의 아버지 역시, 이 나이 먹도로 제 앞길 못하고 꿈을 쫓아 다니는 나를 보며 비슷한 심정을 느낄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저자가 대학 시절 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았을 때 겪은 일화다. 자취방 벽 너머에는 주인 노부부가 살았는데, 노부부는 세입자의 집에 얹혀 살러 온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고, 저자 역시 자격지심 때문에 노부부의 눈초리가 쌀쌀맞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가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다가 자기도 모르게 절로 끙 소리를 냈는데 벽 너머에서 똑, 똑, 똑 하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아파도 조용히 하라는 뜻인 줄 알고 투덜댔으나, 그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그제야 노부부가 자신의 안부를 걱정해 괜찮냐고 묻는 뜻인 줄 알았다. 얼마 후 쾌차한 저자는 벽 너머에서 신음이 들리는 듯해 잠시 망설이다 벽을 똑, 똑, 똑 두드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어서 가봤더니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저자 덕분에 노인은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고, 저자 또한 노부부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 기뻤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벽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용기를 내 벽을 두드리면 누군가가 응답의 뜻으로 벽을 두드려 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내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구를 돕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아버지도 그렇게 벽을 두드리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중에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 나일 것이고, 나는 언제든 아버지가 벽을 두드리면 똑, 똑, 똑 하고 응답하거나, 벽을 두드리지 않더라도 먼저 똑, 똑, 똑 하고 두드리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이 되길 바랄 텐데, 정작 나는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마음조차 두드리지 못하는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으로 아버지의 삶을 대신 알았다고 자위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아버지가 있는 기억 속으로 집요하게 침잠해 들어간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도 과연 이렇게 솔직하고 의미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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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2018-12-26
    책 속에 삶이 있다.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그것이 글로 옮겨지면 보통의 삶도 그럴듯하게 윤을 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는 그의 글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나조차도 잊고 산 아무것도 보태지 않은 낯선 감정의 순간들을. 진심이 담긴 사연은 뭇사람의 마음을 쓸어준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글쓰기란 무엇일까. 나에게 글이란 것은 그저 읽는 것에 불과한데 많이 읽다보면 또 잘 쓰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보다. 기껏해야 누가 읽을 성싶은 서평을 쓰는 게 글쓰기의 전부이지만 나 역시 나름의 고충은 있다. 써놓고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그것인데 이곳 저곳 너무 많이 쓰인 나머지 반들반들해진 문장은 혹여나 있을 읽는 이의 마음에 걸리지 못하고 그대로 휙, 지나쳐버릴 확률이 높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다. 나만의 스타일일랑 없고 앞서 읽은 작가의 문체에 영향을 받아 서평을 작성하기 때문에 지금 써내려가는 이 글도 아마 소설가 손홍규의 모습을 조금 닮아있지 않을까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그 목소리의 떨림마저 기록할 수 있는 사전이 나온다면 누구보다 먼저 반기겠지만 그런 사전은 앞으로도 영영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러기에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장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p.45

    "그에 비하면 내 말은 허위에 가깝지 않았던가. 내 말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내가 쌓아온 사연들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의 결함은 사투리나 표준어의 결함이 아닌 결국 내가 살아온 삶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p.46




    한 마리의 소에게서 그는 소설을 알았다. 가난하고 순수했던 한 시대를 함께한 우직한 소의 삶은 한 사람의 생 전체를 아우르는 기억이 되어 영생한다. 가령 깜깜한 밤 주고 받았던 무심한 눈길과 손등을 스친 어미소의 까끌까끌한 혓바닥의 감촉은 그의 일부가 되어 가슴 한 켠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소는 언제 울어야 할지 아는 짐승"이거늘 얌전히 집을 떠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자신의 글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함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글로 풀어낸 오롯한 진심 때문일 것이다. 쓰여지기 위한 글이 아닌 깊은 사유의 흔적이 베인 글이기에. 고로 산문집의 첫 장의 시작은 문학의 길을 열어준 존재에게 바치는 헌정글이자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고백록이 되며 이어지는 장(章)은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포착한 절망의 모습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갑작스레 날아든 아버지의 사고 소식은 오랫동안 그에게 시시각각 떠오르는 악몽과도 같이 잔상을 남겼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그의 기억이 붙박힌 것처럼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떠올린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였고 정말로 죽길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상상에 그친 총동적이었던 최초의 삽화는 줄곧 내 기억에 붙박여 함께 자라났다. 그날 내가 겁을 덜 집어먹었더라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머릿속에서 무한히 되풀이 했다. 그렇게 스스로 키워낸 절망은 울리지 않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아무도 여닫지 않은 문소리를 듣게 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는 존재"이며 사람은 절망 속에서 성장한다지만 앞으로 쌓아갈 날들에 그토록 깊은 절망은 많지 않기를. 요즘 나는 하루를 산다. 읽고 싶으면 읽고 그러다 지겨워지면 단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보낸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미루지 않고 움직인다. 가만히 흐르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읽히지 않을 책장의 책들이 아까워 조금씩 들인 습관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책장 속의 짐은 자꾸만 늘어간다. 나의 삶처럼. 그런데 여기 죽음과 책 읽기를 연결짓는 이가 또 있다니! 타인의 공감은 늘 즐겁다.



    "세계는 우리가 만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만나지 않은 채 만나기 위해 책은 존재해야 한다. 거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무슨 소용이랴. 오래전에도 나는 불온한 도서들의 대출기록부에 쓰인 이름들을 나지막이 호명해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던가. 손가락으로 그 이름들을 쓸어보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않았던가. 이 더러운 세계가 이처럼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 덕분에 완벽하게 붕괴되지는 않았다는 걸, 그리하여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일터로 떠나듯 쓸쓸하게 책을 품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는 걸 오래전에도 알았던 것만 같았다. 나는 무덤 속에 관을 내려놓듯 조심스레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았다." p.153





    중생에게 절을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부처가 있는 경주 열암곡을 지나 이스탄불에서 야샤르 케말과의 아련한 만남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한 여행 한 걸음 한 걸음은 돋보기로 세상을 보듯 너무도 익숙해 쉬이 지나치는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세상 만물이 품은 아름다움과 절망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소설가가 응당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사회의 아픔에 공명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진실을 보도하는 매체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고 권력의 힘으로 가려진 장벽 뒤에선 많은 이들이 조용하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다. 본래 아파 본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알아본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그의 시선 끝에 마음을 절뚝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가 타인의 오른손에 자신의 왼손을 살풋 얹어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이다. 그러므로 글쓰는 일이야말로 세상과 밀접히 관련된 일임에 분명하다. 오늘도 우리는 읽음으로써 위로 받는다.




    별책 부록의 재미를 선사한 두 편의 미니픽션에 대한 감상평이 남았다.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한 남자의 죽음에서 시작되는 『헛것들』은 과거 국정원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감시, 살해한 사람이 겪는 공포를 그려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잃어버린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혹은 유령같은 존재가 되어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을 본다. 모든 것을 조망 가능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사람들을 감시하는 시선과 그가 쌓아온 공포를 열망하는 소녀의 눈에 비친 것 모두 헛것에 불과하다. 산문집을 들추다 헛것들에 방점이 찍힌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절묘한 일치가 있어 남겨본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전설 같은 풍문과 함께 돌아왔고 그림자 속에 스스로를 은닉해버렸다." (p.88)




    『불한당의 소설사』는 오래 전 얻은 명성으로 중압감에 시달리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다. 등단 오십 주년을 기념하며 은퇴작을 쓰던 그는 소설의 결말 부분만을 남기고 진전을 보지 못 하던 중 친구의 문학상 수상 자리에 참석했다가 갑작스레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세상은 열광하고 예정대로 칩거에 들어갔던 소설가는 자신을 비난하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다시 펜을 잡는다. 때론 사랑보다 분노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 비평가와 독자들의 반응이 상반된 것 역시 그의 펜촉을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제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 하는 글은 분노에서 소실될 수밖에 없는 진심과 원고지 앞에서 절로 굽어지는 협심증 환자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에게 글쓰기란 "소유할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결코 소유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부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 됐든 도적질 한 것은 제 손을 떠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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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모시빛 2018-12-31

    나는 괜찮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교유서가, 2018-12-05.


      한파에 눈물이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서가 아니라 한해를 마감하는 날이라서가 아니라, 돌아보면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인 나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인생사가 희로애락인지라… 흐르는 시간탓이라고 말할 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이 세상과의 안녕과도 가까워짐을 자꾸 인식하며 그런 일들 또한 많아진다. 다친 마음과 몸이 한번에 돌아오는 날 또한 다반사이다. 새삼 나만이 겪는 일이 아닐진대 무어 이리 허우적거리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오는 저녁』속에서 너무나도 닮은 아버지, 어머니를, 할머니를 만난다. 심지어 소까지도…. 짜장면이 싫다는 어머니는 이제 햄버거를 맛나게 드시는 광고가 등장하는 판인데 부모님은 여전히 ‘너희 먹어라, 나는 됐다’를 시전하신다. 까마득한 어느 때 손가락이 잘린 아버지는 붕대를 감아 시림을 막았다. 작가가 제 아비의 잘린 손가락을 보며 소설을 영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손가락을 보며 무엇을 했던가. 반복된 수술로 힘겨운 어머니가 내 끼니를 걱정할 때 나이든 딸의 끼니 걱정일랑 마시라며 서로 핑퐁처럼 걱정과 안부를 오가다 결국엔 무조건적인 ‘나는 괜찮다’는 말씀에 버럭으로 마감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이 정말 사실인가. 그런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너희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너희 좋은 것이면 다 좋다더니 어찌 그리 선거에서만은 끝끝내 좋고 싫음이 분명하신지 꽁한 얼굴로 노여움을 풀지 않던 할머니…가시던 날도 선거 무렵이었으니 오히려 결과를 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 더 나았으려나. 이산가족 상봉은 취소되고 북으로 띄운 편지만이 되돌아왔으니 직접 그곳으로 가셨던 게 더 빨랐을지도.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우습게도 절망하는 건 나다. 누군가로 인해 생의 피폐함에 있었을 때도 절망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왔던 그들의 삶 옆에서 젊은 나의 포효가 가장 높았고 지속되었다. 그들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아짐찮다’를 온몸으로 내보이고 있을 뿐. 통곡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디에다 쏟고 있는 걸까. 

      이 책 작가인 아버지는 딸의 아픈 팔을 보며 아이가 자라 마음이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몸이 아픈 채 돌아온 어머니를, 아버지를 보며 훗날 내 마음이 다쳐 돌아갈 저녁을 염려한다. 아직 닿지도 않은 날을 당겨와 마음이 푹푹 꺼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이것은 두려움일까.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그들을 ‘여읠까’ 싶은 마음에는 그들보다 나의 감정만이 우선하여 있다는 생각에 미치도록 놀란다.

      이제는 몇 번을 확인하여 되묻고, 부연 설명을 곁들어야 그들, 내 부모님과의 이야기 한뼘이 지난다. 누군가를 말한대도 몇 번의 사람을 거치고, 몇 번의 사건들을 거쳐야 지칭하는 대상이 명확해진다. 단어는 또 말해 무엇하랴. ‘체험하는 순간에야 오롯이 내 말이 되기에’ 그들 세대의 단어와 지금의 나의 단어가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리하여 돌고 돌아서 말하는 사이 이제야 세월이 품은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간다. 살면서 직접 보지 않은 것들 이외에 알지 못했던 것. 진즉 묻지 않았던 그들의 삶, 이야기.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난 세월 서로에게 무심했음을, 우리에게 사연이 없다면 우리가 헛되이 함께 살아오기만 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단어와 문장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가 작가에게 불안을 무사히 건너가는 기제가 되었을까. 작가가 쓴 소설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꿈을 꾸듯이 이 책의 문장속에서 허우적인다. 타인의 슬픔과 비극을 외면치 않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예의’를 배우며 작가가 세상을 담는 동안 이 위안과 후회를 머금게 해주는 시선에서 나도 오래 머물게 된다.

      그토록 말없이 품고 있던 그들 생의 이야기가 또 한해 마감되어 간다. 한편으론 작가는 소설가로서 그들의 삶을 이야기로 담아내었지만 한 사람으로서, 자식으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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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Shining 2018-12-31



    12월 31일이다그러나 새삼스레 한 해를 돌아보며 열정적인 후회를 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민망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나이를 곱씹으며 과장한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 한다아마도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그러니 마찬가지로 한 해를 보내며 읽어야 할 마지막 책이라며 호들갑 또한 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며칠 전 터미널 앞 카페통유리로 된 창가에 앉아서 이 책을 읽었다부러 장소를 선정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아니나 읽다보니 이보다 더 적합한 순간이 있을까 낯선 감탄이 일었다. 12스산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간헐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출입문으로 새어들어오고 먼지처럼 내리는 눈발을 간간이 내다보며 읽은 책은 소설가 손흥규의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었다. 

     

    첫 챕터를 읽은 후 책의 앞날개로 돌아가 작가의 나이를 돌아본다. 1975년 생한참 젊은 나이다이문구와 오정희. 처음 떠올린 것은 둘이었고 그 다음엔 지금은 신축으로 공사한 옛날 큰아버지 댁이었다소와 여물이 있고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던, 그래서 언니가 가기 싫어했던 집이었다기껏해야 우리가 그 집에 가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많으면 세 번이었음에도 그 냄새와 마당의 진흙과 예쁜 눈을 가졌던 소의 눈은 여전히 기억이 된다외갓집은 그보다 나았다꽃이 있고 털이 하얀 강아지가 있었고 할아버지의 자전거와 호미 같은 것들이 널려 있는 곳엔 어린 사촌동생이 타던 낮은 장난감 자전거도 있었다. 어떤 것들은 아주 사소하지만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그리고 문득 어떤 냄새공기날씨를 보며 그 날을 떠올리게 된다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아스라한 향수정확히는 거기 있었던 지도 몰랐던 어린 날의 어떤 지점을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다


    우르슬라에 비유한 고모의 죽음이나 그녀들의 아들들과 딸할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 함께 소의 궁둥이를 밀어 트럭으로 싣고 장에 나갔다가 소머리국밥을 먹고 온 일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이견과 그 사이에서 시소를 타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태도와 외동의 난감함 같은 것건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산수유와 감옥에 갔던 일과 하다못해 이스탄불에 체류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작가에겐 오래된, 빛 바랜 냄새가 났다. 이는 기묘한 경험이었다. 도시에 대해 쓰는 작가들은 차고 넘치고 특히 젊은 작가들은 대부분 도시의 삶과 그 진절머리에 천착한 이야기를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마흔 다섯(내일이 새해라는 것을 감안, 한 살을 높임을 사과한다)의 작가가 이야기하는 어린시절과 자신의 삶에는 갖은 냄새와 촉감과 추억인지 향수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했다. 그게 낯설었고 동시에 신선했으며 조금 부끄럽게도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아마도 넛할아버지는 아직도 캄캄했을 새벽에 집을 나섰을테고 초겨울 짧은 해가 지고도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야 그 집으로 돌아갔을 테다오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오직 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손등 한 번 쓸어보기 위해 다니는 이 없어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곶감을 지게에 지고 걸어왔을 넛할아버지.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러나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니, 사실 겨울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평생을 기척도 없이 살다 가신 분인지라 강렬한 기억이 생전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이 문득문득 미안하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숨을 쉬는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분의 삶의 태도같았던 날숨과 뻣뻣하게 자란 하얀 머리와 막내딸과 손녀를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이 잠시 흐른 뒤 춥지 않느냐, 밥은 먹었느냐 묻던. 그리고 이제는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가족들 중 누구도 보지 못한 저 먼 곳에 걸린 현수막도 읽을 수 있는 시력으로 굳어가는 다리 때문에 집 밖으로는 혼자 나가지 못하는 분. 옆에 놓인 고무나무 화분처럼 해가 있는 곳에서 늘 바깥만 바라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보니 비죽 눈물이 나온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신기한 일 중 하나는 어떤 일에 대해선 한없이 메말라있는데 어떤 부분에선 믿을 수 없게 눈물이 쉽게 나온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다. 그 책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필멸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못내 서럽다.

     

    문학은 언제나 가망이 없었을 따름이며 문학을 죽음 직전에서 일으켜세우는 건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나의 환멸은 뿌리가 깊다. 어쩌면 그해를 지나쳐 더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학이 무언지 모르던 시절까지 혹은 문학이 생겨나기 전에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이 없는 그곳에 이르면 아마도 누군가는 기어이 그곳에서 문학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어딘가에 묵새기고 앉아 문학을 이야기할 것이며 설령 벽도 천장도 없는 벌판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혹은 오르지 별과 달만이 머리 위에 빛나고 있을지라도 그 별과 달을 쓰기 위해 기꺼이 고독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알게 될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

     

    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남김없이 쓴다 해도 결코 완전하게 쓸 수 없으리라는, 아무리 적게 쓴다 해도 너무 많이 쓰게 되리라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이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가로막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읽는 이들 역시 글을 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으리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편의 글이 완전하다면 그 이유는 글 자체가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해서가 아니라 글의 틈이나 군더더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소거하며 읽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고작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그것으로 충분하겠냐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그 수동적인 행위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힐난도 해보고 적당히 구슬려도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도무지 나는 대답이 없었다. 자주 그러했다. 더 완벽한 때를 기다린다는 신중함을 방패 삼아 게으름을 정당화했고 어차피 안 되었을거란 불분명한 절망을 근거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허나 열심히, 꾸준히 쓰는 사람들 앞에서 늘 똑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죽는 것이 서러울 것 같다고 말하는, 자신에게 터키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오르한 파묵이 아니라 아지즈 네신이라고 말하는 작가를 앞에 두고 어찌할 바 없이 12월에 멈춰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무척 불편했던 영화를 만든 작품의 신작 포스터를 보고서 나쁜 작품을 쓰는 것보다는 나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계절이 있었다. 그 때부터 작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것도 아니고 등단을 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그저,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견디는게 어렵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그런 해였다. 여전히 문장은 헤지고 형편없지만, 쓰고자 하는 욕심의 절반도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룩거리면서도 무언가를 썼다는, 도마뱀의 꼬리보다도 짧은 안도감. 작가가 쓰는 소설가의 일, 문학의 자격, 쓴다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좋은 문장을 쓰는, 이처럼 편안하게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것 같은 글을 쓰는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내 고민 따위는 너무도 당연하다.


    기꺼이 나이를 떠올리지 않고 지난 해를 후회하고 앞날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실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것을 가까스로 인정하면서 어쩌면 작위적인 태도보다도 지금 이 인정이 나이를 먹는다는 진짜 물증일수도 있겠다. 그래 12월은 어쩔 수 없이 향수와 서글픔과 울음의 계절인가보다. 그리고 겨울을 관통하는 이 시기에, 따뜻한 차 한잔과 조금의 눈물과 함께 이 책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12월 31일이다. 또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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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피오나 2018-12-31

    아빠가 돌아가시고 이제 한 해가 지났다. 겨우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다.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살아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에서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 가야 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인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노인이 된 부모가 보인다. 당신들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쳐 노인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그리고 지금 나와 더불어 노인이 될 게 분명한 아내와 노인이 된 우리를 기억해줄 딸아이를 본다. 혈통처럼 세월이 흐르고 꽃잎이 분분히 떨어져 사연처럼 쌓이고 해가 저문다. 삶이 이슥해지는 시간들. 사소하고 비범한 우리의 노년이 자박자박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p.62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올 해의 마지막 날 손홍규의 산문집을 읽었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니 제목부터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가로등 아래 놓은 골목을 딸아이와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딸은 묻고 아빠는 답하고, 아빠의 대답에 담긴 질문을 아이는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한다. 나도 부모의 입장이라서 '아이가 앞으로 새롭게 발견하게 될 언어들이 벌써부터 그리워'라든가, '아직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는 말에 뭉클해졌다. 매 순간 부모는 그렇게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걸 깨닫고, 몰랐던 걸 배우고,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한 마리 소를 사랑했던 소년이, 성년이 될 무렵 그 소를 떠나 보내기까지의 시간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비롯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저자의 어린 시절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주며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라고 물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부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아마 몇 해전의 나였다면 이 장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던 인물은 아버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고모의 부음을 들었을 무렵의 대학 새내기 시절, 애도와 잔치의 분위기가 뒤섞인 장례 풍습이 서먹했던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속 마르케스 대령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그렇게 저자의 삶 구석구석 문학이 함께 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게 무엇인지를 천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했다고 한다. 지난해 나란히 칠순을 맞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들은 더 애틋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소설을 쓴다는 저자의 고백은, 세상 모든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온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어른의 모습이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나이든 모습이었을 것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한때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도 한때 우리처럼 사랑에 설레고, 실패에 좌절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온 걸음마다 이야기를 남겨둔' 우리의 부모들에게 더 말을 건네고,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식이 부모를 기억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방은 감옥의 혼거방만한 크기여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다. 그러나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 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마치 평소에는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던 평행우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과 비슷하다. 낯설고 기이하지만 분명 내가 머문 시공간에 겹쳐진 또 다른 세계.    p.139

    이 산문집의 많은 부분을 저자의 유년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읽으며,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페이지 바깥으로 흘러 넘치고 있다. '한국의 작가들은 살롱에서 먹고 마시고 춤춘다. 그 아래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 라는 문장에서 읽히는 그 깊은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책을 덮고도 아릿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이들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에게나 유독 마음이 기우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할머니에 대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러한 문장들은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글들이었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밑줄을 긋게 되고, 페이지를 멈추고 돌아보게 되고, 시간을 들여 행간에 숨어 있는 추억을 찾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가족과 관련되어서는 항상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누군가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또 듣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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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가을남자 2018-12-31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마을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마을에서 보면 그냥 민둥산이었지만, 도로 쪽에서 보면 포클레인과 중장비들이 언덕을 깎고 있는 절벽이었다. 절벽 위에서 채석장 밑을 바라보면 커다란 포클레인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아득한 높이였다. 마을에서 큰 도로로 나가기 위해서는 채석장을 한참 돌아야 했다. 채석장의 절벽 위로 지나가는 짧은 길이 있기는 했지만, 위험해서 어른들이 절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는 길이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채석장 절벽 위의 작은 길을 책가방을 메고 아무런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한쪽은 언덕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다행히 언덕 쪽으로 넘어졌기에 손바닥만 찢기는 정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는 몰랐던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득한 절벽 속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을 살면서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몇 번이나 느껴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걷고 있지만 내 삶의 한 쪽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그 절벽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삶이 송두리째 절벽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과 상실감을 몇 번이나 경험한 후에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절망감과 상실감을 표시 내지 않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절벽에 떨어졌을 뻔했던 그날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학교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손홍규 작가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는 산문집을 읽으며 그렇게 절벽 속으로 떨어지는 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아왔던 그의 삶에서 느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과 상실감을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어떤 때는 그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책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게 있어야 했다.

     

     

    책에서는 작가가 느꼈던 그 감정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그의 어린 시절 집에는 소가 한 마리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생각하듯 그도 소와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소가 무례한 인공수정사에게 억지로 인공수정을 당하고, 송아지를 낳고, 또 팔려가는 과정 속에 그는 커다란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른들이 겪었을 절망감을 떠올린다.

     

     

    “우시장 초입의 국밥집에서 호기롭게 거간꾼에게 한턱을 낸 뒤 잔뜩 취해 돌아오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취하지 않고서는 갔던 길을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 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뒤 소머리 국밥집에 앉아 방금 떠나보낸 소를 생각하며 소주를 마시지 않고서는 길눈조차 어두워지고 마는. 생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허둥대는 그들처럼 아버지 역시 취해야 돌아올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P 19)

     

     

    그는 이런 절망감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에서도 발견한다. 아버지가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하던 날,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는 순간도, 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순간도, 그리고 예정보다 몇 시간이 지나서 생사를 오가는 순간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분노로 바뀌어가는 순간, 그는 건물 구석 벤치에서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혼자 두려움과 절망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잘리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어른에게 아버지가 탈곡을 하다가 손가락이 탈곡기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린 손에 붕대를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터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작가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느꼈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P 75)

     

     

    그가 타인의 눈에서 느꼈던 그 절망감은 단순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서 만이 아니다. 그는 절망감에서 버티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손가락이 잘린 후 논을 팔고 트럭을 사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말주변이 없었던 아버지는 매번 실패를 했고, 그때마다 절망 속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아버지의 장사를 따랐다가 아버지에 무능력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썩인 감정으로 돌아왔던 저녁을 떠올린다.

     

     

    “고창 읍내에서 고향 집까지 가면서 내가 보았던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조등이 비친 만큼만이 열려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면 그 공간 역시 어둠에 잠겼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면서 아버지의 삶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드문 어느 골목 초입에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 앞을 지날 때거나 퇴직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자신들의 가게 구석에 시름에 잠겨 멍하니 앉은 걸 보게 되면 그이들이 서 있는 경계, 그이들이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지만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그날 선 자리에 발바닥을 베이지 않고 부디 오래오래 서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P 205-6)

     

     

    한 해를 마감하며 다들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단지 뉴스에서만 듣는 소식이 아니다. 주변의 사업을 하는 친척이나 장사를 하는 지인들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때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저히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말하는 그 절망감과 상실감이 바로 그 눈빛이었으면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책에서의 작가처럼 바래 본다. 절망에서 빠진 이들이 삶의 경계에서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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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 삐딱곰 2018-12-26

    소는 모든 감각과 여섯 째 감각을 맞바꾼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진물 같은 눈물을 흘리고서야 빛 알갱이마저 헤아릴 수 있는 눈을 얻은 것이다. 소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소가 보고 듣고 느껴온 세계는 사라졌다. 이제 소는 새로운 세계를 얻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를 내주고서야 소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p17

    ?

    소설은 이미 저 소가 다 써버린걸요.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되는 비장하게 희극적인 삶을 삭제할 수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문학은 소다. p22

    ?

    하나의 단어가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에 담긴 진심을 헤아리기 위해서이다. p42

    ?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할머니와 더불어 보냈던 터라 내게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노인의 이미지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내가 초3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무언가가 변해버렸고 적어도 내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게 무엇인지를 천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도 내 삶의 기착지라 할 만한 이런저런 중대한 변화의 순간들은 많았지만 어찌 보면 내 삶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와 돌아가신 뒤로 나누어도 될 것 같다. p53

    ?

    이 세계가 고독한 이유는 원래부터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에 속함에도 추방당한 기분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p55

    ?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걸. 나는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일 뿐이다. p79

    ?

    부르주아들과 다른 꿈을 꾸는 건 인간의 삶을 재신비화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다. p91

    ?

    이따금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면서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기도 한다. 글쓰기처럼 독서 역시 그런 행위다. 나는 아직 행복한 책 읽기가 무언지 잘 모른다. 내게 독서는 고달픈 행위였다. p139

    ?

    나도 확실하게 행복한 책 읽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현실도피를 잠깐이나마 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책 속에 있으면 기운 나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속에서 빠져나오면 원상복귀된다. 그렇다고 고달프지는 않다.

    ?

    읽을 만한 소설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쓸모없는 질문에 사로잡히고 만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소설가가 여느 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소설가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건 순수한 독자의 눈으로 읽는 동시에 찬탄과 질투가 뒤섞인 감정을 오가며 동업자의 눈으로 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p242

    ?

    나는 오로지 독자의 눈으로 읽는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기를 바라고, 내가 좋아라하는 스토리 전개가 펼쳐지길 바라고, 흔하지 않은 반전을 바라고 등등 나한테 읽을 만한 소설이란 그런 것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는 그리고 작가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독자일 뿐이다.

    ?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p317 ~318

    ?

    후반부에 미니픽션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헛것들"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

    작가분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나하고 몇 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겪으신 분이었다. 읽으면서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은 아마 나도 그 시대 속에 잠깐이나마 발을 담가 놓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분의 부모님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그 시대 부모들은 다 그랬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나의 부모님이 떠오르기도 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옛 생각이 많이 나고 그리웠다. 그렇게 좋은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의 시대보다는 좋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한국 소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박완서 작가분의 소설을 유난히 좋아한다.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거부감 없이 그 시대에 푹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작가분의 삶에 있어서 차지했던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살짝 드러냈을 뿐이고, 거기에 문학이란? 문장이란? 문체란? 이야기란?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 놓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글에 우울함이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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