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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단위로 문학사 내지 문화현상을 나누는 것만큼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발상도 없지만 무리를 감수하면서 편의상 그러한 시기구분을 전제한다면, 2000년대 들어 지난 십년 동안 가장 인상적인 소설문단의 임팩트는 박민규 작가의 등장을 꼽을 수 있겠다. 2003년 <지구영웅전설>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각각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데뷔 때부터 문단의 관심을 한눈에 받았다.

그를 주목하게 하는 건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오직 박민규만의 신선한 발상과 시각으로 무장한 독보적인 개성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간에 한국문단을 형성해온 주류문학과는 상당부분 변별점을 가진다. 1980년대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서사와 어법, 80년대식 이념을 억압으로 인식하고 집단 지성과 가치에서 멀어지면서 인간내면과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가치를 두고 침잠한 1990년대의 문학과도 다른 것이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환경운동의 가치와도 통하는 자발적 마이너리티 속에서 가치와 행복을 발견하는 <삼미~>, 개복치와 외계 존재 같은 환상적인 소재와 현실에 대해 광학적으로 세밀하게 접근하는 단편들이 공존하는 작품집 <카스테라>, 이 세계가 깜박해버린 왕따들을 동원해 세계의 은폐된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을 통쾌하게 풍자하면서 지구를 언인스톨시켜버리는 장편 <핑퐁>에 이르기까지 박민규는 기존의 한국문학사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여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보면 연애소설까지도 그가 쓰면 다른 것이 되는 걸 알 수 있다. 연애소설의 소재는 일상적이고 그야말로 사소한 것이다. 그 일반적이고 식상한 소재와 주제를 이 소설만큼 독특한 상상력과 발상의 전환, 깊은 사유를 동시에 제공해준 예를 기존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간에 논의해온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 판타지, 공상과학 같은 단어로는 그의 작품을 규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된다. 굳이 나이브하게 작품세계를 나눠보자면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 현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 그리고 환상과 현실적인 것들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흔히 박민규 작품에 대해선 이러한 구분처럼 성향에 따라 독자들의 호오가 갈리기도 한다. <카스테라> 수록작을 예로 들자면 현실에 즉해서 쓴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좋아하는 독자가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같은 환상적인 작품을 싫어하는가 하면,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독자도 있다. 심지어는 문학평론가조차도 그렇다. 최근에 어느 문학상의 심사평을 보고 나는 적잖게 놀랐다. 수상작을 두고 ‘의미있는 변화의 표지’를 보았고 ‘발전적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작가 역시 이런 평을 듣고는 적잖게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반응, ‘아니, 원래부터 그렇게 써왔는데 새삼스럽게 갑자기 왜?’ 눈에 힘을 주고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들에는 <지구영웅~>과 <삼미~> 의 세계, 즉 작품활동의 출발선에서부터 예의 세 가지 요소가 쭉 공존하면서 변주되어 왔다. 다만 어떤 요소가 더 승하거나 약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면서 새로운 언어와 소설적 구성을 형성해온 것이다.

박민규의 장점은 그밖에도 많다. 본문의 형식실험에서부터 독특하고 매력적이면서 정교한 문장, 마치 시(詩)와 같은,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비유들로 상상력을 추동하는 문장들은 가히 놀라운 것이다. 그렇다, 박민규의 가장 큰 장점은 환상과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작품 속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어 오히려 평범한 것일 수 있다. 정작 문제적인 것은 상상력 빈곤의 시대를 살고 있는 21세기 한국문단에 던지는 그만의 강력하고 차별적인 상상력이다. 자가발전, 변종하면서 예측할 수 없이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그만큼 보여준 작가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작가는 그간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면서 평단의 평가도 받아 각종 주요 문학상(이효석·이상·황순원 문학상)을 휩쓸었다. 올가을 그는 문학상 수상작을 비롯해 무려 18편이나 되는 작품들을 두 권으로 묶는 소설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 특정한 성향에만 집착하는 독법을 배제한다면 이번 소설집은 단연 최고의 작품집으로 평가할 만하다. 발표지면들을 통해 꾸준히 따라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2010년까지의 작가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하는 작품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박민규 작가를 지금까지보다 앞으로를 더 기대하고 기대하면서 주목하는 것은, 그는 묵묵하게 쓰고 또 쉬지 않고 쓰고, 무섭게 쓰는, 지치지 않는 상상력의 엔진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2000년을 열고 꼬박 열한 번째 가을을 맞이한다. 지난날, 우리가 슬쩍 검지로 넘겨 읽던 시와 소설 들은 비 내리는 흑백 무성영화처럼 질박하고도 빈티지스러운 책장을 타고 넘어, LCD 모니터 휴대기기나 E-ink 기반 전자책 단말기 속 텍스트로 변모 중이다. 10년을 단위로 신분을 바꾸어 새 삶을 사는 남기남((c)정훈이만화)도 있지만, 세상 그 달콤한 유혹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칠 만한 것 중 하나가 종이책의 질감이고 보면, 10년 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강화된 형태로 시장을 들쑤시는 E북의 열기와 논의에 호기롭게 태연해보고 싶지만…… 도시 심상치 않다. 마치 지난 10년의 잠복기를 거쳐 뇌관 어느 한 곳을 집중 공략하는 것처럼 도서출판산업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작가, 편집자, 서점 마케터, 그 누구든 간에 한목소리로 외친다. “바꿔! 바꿔!”

그럼에도 변함없이 모두의 동감同感상련相戀은, 새로운 형식,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상상력, 그 서사와 미학적 전위를 탐하는 젊은 시인과 작가 들의 목소리에 가닿는다. 세상 다시없는 구애, 짝사랑이라 이름 부르고 싶은 그것. 새로움에의 열망. 새로움의 이름으로 우리 문학의 자장을 넓고 깊게 한 이들이 다행히도 ‘있다.’ 그들은, 차고 넘치는 윤택함과 익숙함 대신 조금 부족하고 조금 엇나가고 조금 쓰라린 것들에 기우는 마음을 짐작 밖의 말줄임표 속에 묻고 국정교과서의 문법도 가볍게 코웃음 치며 세상을 비틀어 보이고(박민규.황정은), 도심 어느 곳에나 묵묵히 24시간 불 밝히고 서 있는 편의점과 수산시장의 노릿노릿 꾸덕한 냄새 배어든 고시원을 소설의 주 무대로 불러내는가 하면(김애란.김미월), 호기심 어린 시선은 있지만 좀체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발설하고 싶지 않은 일간지 사회면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로 재탄생한다(김이설.임수현). 이른바 루저나 금치산자 수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을 지나 남보다 내가 혹은 유독 나만 더 배고픈 오늘의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 속에서 나만의 웃음, 나만의 눈물, 나만의 얼개 그리하여 나만의 문장을 빚어가고 있다. 여기에, 진부한 일상이나 다를 바 없는 익숙한 고전을 비틀고 인문학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유머와 위트, 상상력을 자재롭게 다루고(최제훈.조현), 할리우드 SF나 PC게임 못지않은 다차원의 서사를 묵묵히 휘두르거나(윤이형.조하형), 유구한 세월 꿋꿋하게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던 시와 소설의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과연 (소설을)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올인(한유주.김태용)하는 그들. 그들의 서사(書史)가 이제 긴 항해를 위한 닻줄 하나, 막 드리운 터라 지난 10년의 흥분을 뒤로하고 앞으로의 10년을 새롭게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한편, 그저 먼먼 미래의 일인 양, ‘21세기 전망’만으로도 족했을 그 시기를 지나, ‘미래파’라는 한 단어로 지난 10년의 절반 가까이를 관통한 이들 역시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동류로 묶어낸 그 용어를 부정하면서 자라왔고, 그대로 2000년대 첫 10년 한국문학의 뜨거운 감자로 가장 빈번하게 해부되고 해석된 노래들(황병승.김경주.김민정.이민하.장석원.이근화 등등)을 불렀다.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언어적 감수성과 3D 입체영상도 무색케 할 시적 상상력은 때로 기성문단에 의해 뚜렷한 증빙서류 하나 없이 난삽하고 난해하다며 일축되기도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바로 그들의 언어적 자의식과 모험심으로 뭉친 촉수야말로 시간에 침윤되고 둔해져가는 우리의 오감과 의식을 두드리고 깨웠을 터다. 하나 더! 잠들지 않는 서정에의 목마름을 곰삭은 언어와 수평의 미학으로 끌어올리고(문태준), 서정에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도 은근한 권유와 발랄한 유혹으로 세상과 조우하거나(김행숙), 도저한 사유와 청신한 언어, 낯선 은유의 묘한 조합으로 세상의 진실에 귀 기울이게 하는(진은영) 시들이 있어 우리의 내면은 진실로 촉촉하고 풍요로워질 기회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늘, 100% 정답이 부재하는 누구나의 삶에서 저릿한 아픔과 모호한 슬픔만이 시 그리고 소설의 몫은 아닐 것이다. 온몸을 자극하고 너머의 너머, 안의 밖, 밖의 안을 탐색하는 낯선 언어들은, 반복하건대 그들의 문학은 결코 친절하지는 않지만 새로움을 새로움으로 갱신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과 교감하는 틈을 만들고 그 안에 동감同感상련相戀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성마른 이들을 통해 나날이 세를 넓혀가는 ‘전자책 시대의 임박, 그 가공할 만한 위력’의 슬로건조차도 끝간데없이 질주하는 문학적 상상력, 언어의 모험을 추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를 지원한 분들과 면접을 할 때면, 누구에게나 꼭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군가요? 최근에 읽었던 작품 중 좋았던 작품은 무엇인가요?” 평상시에는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했을 법한데도, 예비 편집자들은 무척이나 뜸을 들인 다음 조심스럽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마도 개개의 이름과 제목들에는 그 나름의 고유성과 지향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21세기 첫 10년의 한국문학에 대해서 주제를 정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근 10년간 출간된 소설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우선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 작품에는, <칼의 노래>, <모랫말 아이들>, <괴물>, <해신>, <오빠가 돌아왔다>, <미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달려라>, <아비>, <달콤한 나의 도시>, <아내가 결혼했다>, <즐거운 나의 집>, <친절한 복희씨>, <완득이>, <스타일>, <개밥바라기별>, <엄마를 부탁해>, <덕혜옹주>, <강남몽> 등이 있었습니다. 이 목록과 관련지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키워드를 뽑아보았습니다.

목록을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장편소설입니다. 2005년 세계문학상을 시작으로 뉴웨이브문학상, 멀티문학상, 중앙장편문학상 등 한국 출판계에 1억 원을 내건 다수의 장편문학상이 제정된 데에는 문예지를 토대로 일구어졌던 단편 중심의 풍토에서 슬슬 벗어나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시대의 흐름을 실감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는 같은 기간 국내도서 베스트셀러 목록 중 대부분이 외국작가의 장편소설이었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그다음으로는 소위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사례가 눈에 띕니다. 앞으로도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 산업과는 더욱 밀접해지리라 예상됩니다.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21세기 한국문학은 영상 매체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한 창조적 활용 방안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이 자본과 결탁한 상업주의로 흘러갈까 두려워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참여 문학에 대한 논쟁에 계속 머물러 있거나 예술지상주의적 관점만 고수해서는 내일의 문학에 대한 설계가 부족해 보입니다. 그나마 우리 스스로가 무겁지 않고, 쉽고, 즐겁고, 단순한 것들에 익숙해짐을 경계한다면, 문학의 예술적 창조성과 진정성, 도전 정신과 사회성이 쉽게 꺾이진 않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또한 블로그, UCC, 트위터 등 인터넷 공간을 통한 사회문화적 콘텐츠의 획기적 생산력과 대중적 파급력은 창작을 하는 문화예술 공급자와 그를 향유하는 수요자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안에서 문학 독자들과의 소통 방식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온라인 문예지, 즉 ‘웹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년 안에 주요 문학 출판사를 중심으로 생겨난 《문학웹진 뿔》, 《창문》, 《나비》, 《웹진 문지》 등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인터넷 세대와의 접근성을 높이고, 기존의 종이잡지를 중심으로 한 문단 중심의 창작활동에서 멀어졌던 문학 독자층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가 한국문학의 미래에 긍정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를 응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년간 자신만의 고유한 문학세계를 유감없이 보여 주며, 독자들에게 기다림의 즐거움과 문학의 감동을 선사해 준 ‘젊은 소설가들’을 떠올려봅니다. 김연수, 권여선, 김숨, 편혜영, 김중혁, 천운영, 심윤경, 천명관, 박민규, 정이현, 김애란, 한유주, 김태용… 등등. 앞으로도 자신만의 이야깃거리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어내기 위해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글쓰기가 보다 아름답고 튼실하며 세계적인 한국문학으로 나아가는 데 의미 있는 토양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를 걸어봅니다.

예비 작가들은 지금 이 시간,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요. 예비 편집자들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 할까요. 그리고 독자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한국문학의 오늘을 말해 주고 내일을 가늠케 하는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잊은 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문학이 달라졌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내 또래의 작가들, 또는 나보다 한참 어린 작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는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씁쓸한 자각에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긴 하지만, 어차피 ‘체감’ 없는 판단이란 공허한 사실에 불과할 터. 나보다 어린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있다 보면 가끔 이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세대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그들이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서사를 쓰거나 그간의 문학사를 뒤엎을 만한 혁명적인 실험을 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서를 깔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반응이거나 변형이거나 재조합일 뿐이다.

내가 느끼는 ‘새로움’의 지점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소설에 대한 관점’이다. 즉 소설이 되는 이야기는 어떤 것이며,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입장인 것이다. 이 ‘관점’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해서 이미 있는 것들의 반응, 변형, 재조합에 ‘어떤 무엇’이 첨가되는 것인데, 그 ‘어떤 무엇’은 그 사람만의 복잡다단한 역사의 결과물이므로 그것이 서로 완벽하게 똑같은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무엇’의 고유성, 그 고유성이야말로 새로울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며, 결국 내가 감지한 ‘한국문학의 변화’란 바로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눈에 띄게 달라졌음을 말한다.

사실 이는 나보다 어린 작가들에게서만 느끼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물론 진짜 ‘어느 순간’일 리는 없지만―‘젊은 작가군’ 전반에 대해 그런 인상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내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소설에 대한 관점’들이 반박되기 시작하면서 느낀 개인적인 감상일 것이다. 이를테면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스스로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관점, 즉 ‘이런 것들이 소설이 되는 이야기이며 소설을 통해서는 이런 것들을 말해야 한다’라는 뚜렷한 기준들을 스스로 회의하도록 만드는 작품들이 사방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회의는 확장을 불러오는 법, 나는 나도 모르게 그동안 나를 압도해왔던 문학에 대한 엄숙한 기준들이 부담스럽게 여겨졌고 그것들을 하나씩 놓을 때마다 전혀 다른 것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것이란, 한국문학이 실로 다채로워졌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물론 다채롭다고 다 좋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그 안에는 ‘굳이 이 이야기를 책으로까지?’라는 의문과 ‘좀더 정제되었으면, 문제의식이 좀더 날카로웠으면’ 하는 아쉬움, 그리고 옛날에 비해 참 쉽게 소설을 쓴다는(물론 ‘참 쉽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을 테지만) 거만한 냉소가 깔려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 전체를 생각하면 마치 태양부터 운석까지 참으로 다양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의 물질들이 그 어느 때보다 어지럽고 활기차게 폭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여 ‘본격문학’, ‘순문학’, ‘대중문학’, ‘장르문학’ 등등의 용어들이 내포하고 있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도,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던 뚜렷한 문제의식이 아랫세대로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도, 일종의 다양성을 향한 몸짓으로 보이는 것이다.

언젠가 모 출판사의 문예공모전 심사평에서 근래의 투고자들이 대부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유행처럼 따르고 있다는 (약간은 불만의 뉘앙스를 품은)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뭔가가 폭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 뭔가가 모종의 이유로 갇혀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무의식적인 것들은 결국 의식적인 사건이 되려고 요동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드러나는 것들’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고.

시대의 요구 때문인지, 사람들의 욕구 때문인지, 타이밍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본격화되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요소들의 드러남 이후엔 또 어떤 일들이 이어질까를 생각하면 문득 한국문학이 스스로 미로를 (헤매는 게 아니라) 여행하는 방랑자처럼 느껴진다. 모든 방랑은 멋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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