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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이름:오민석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8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

최근작
2023년 11월 <냉소적 이론들>

굿모닝, 에브리원

이 시집을 묶기 위해 함께 원고를 읽던 아내가 얼마 전 세상을 떴다 말하자면, 나는 벼락을 맞은 거다 죽음이 소환한 죄들 때문에 내가 소란騷亂하다 저 쥐 같은 것들, 저 지겨운 불행들, 을 떠난 당신, 부디 평안하시라 사랑은 가고, 언어만 분분紛紛하니 나는 차라리 쓰러져 호랑이 꿈을 꾼다 2019년 9월 10일 먹실 산방山房에서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러기 편대가 지나간다 저마다 제자리를 지키며 죽음도 불행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몸이 명하는 대로 지금은 흐린 하늘을 날아갈 뿐 짱구 굴려봐야 느그덜 사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야 비웃듯 인간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떠가는 저 새새끼들 저것들의 꽁지라도 잡고 꼬장 부리며 순례 가고 싶다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대략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에 씌어진 것들이다. 말하자면 근 십여 년의 시간차를 갖는 작품들이 한 군데에 어우러져 있는 셈인데, 따라서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말을 부리는 방법, 시적 소재, 정서적 구조 등에 있어서 각 작품들 사이에 일정한 편차가 존재할 것이다. 비교적 늦은 편에 속한 나의 첫 시집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아무도, 교정을 볼 때 내가 느꼈던 그 참담했던 심정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처참함 속에 나의 십여 년 정겨웠던 문청기(文靑期)를 묻는 기분이 썩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길은 언제나 길로 다시 시작되고, 길 떠남은 곧 길 만들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 부족한 나에게 덕을 베푸신, 내가 아는 모든 나의 사람들이여, 별로 따뜻할 것 없는 이 세상을 그래도 내가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그대들과의 정 깊은 교분 때문이리. 1992년 3월, 따뜻한 날에

사랑니

이 세계는 가공할 만한 폭력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 폭력은 우리의 존재와 인간적 삶을 끝없이 위협한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가련할 정도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인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장애, 가난, 불륜, 낙태, 성폭력, 죽음이라는,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이 심각한 항목들을 어떻게 당위로 받아들일 것인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에게 당위의 작위를 주기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집요한 자기 싸움의 기록이다. - 해설 중에서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가난한 어깨에 비듬이 쌓이듯 궁핍한 정신에도 글이 계속 쌓인다. 블랑쇼M. Blanchot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학은) “사라짐이라는 본질”로 향한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사라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 때문에 계속 글을 써대는 것일 수도 있다. 먼저 쓴 글들은 어느 정신의 해변에서 연기처럼 지워졌는가. 글은 소멸을 향해 있고, 문학은 소멸하면서 진화한다. 말하자면, 문학은 ‘사라짐이라는 본질’들의 무덤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사라지는 것들은 다시 나타나는 것들의 원인이 된다. 소멸이 없으면 탄생도 없으므로, 소멸은 그 자체 탄생의 유의어이다. 배가 고파 사과를 따려고 하면 가지가 자꾸 위로 올라가고,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굽히면 수면이 자꾸 낮아지는 탄탈로스의 지옥처럼, 문학이 늘 허기와 갈증의 원인인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문학이라는 사과와 물속으로 이미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미 사과이고, 물이다. 나는 사과 안에서 배고프고, 물속에서 목마르다. 괜찮다. 앞에 나온 평론집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여전히 주체란 모름지기 몸-주체라고 믿는다. 몸은 아주 작은 통증만으로도 정신의 전면적인 활동을 마비시킬 수 있다. 숭고한 영혼도 몸-그릇에 담겨 있다. 그리고 문학은 상처를 자처하는 ‘타자 지향의 윤리학’이다. 문학의 리비도는 늘 자기를 떠나 타자에게로 이동 중이다. 19세기의 리얼리즘과 20세기의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문학은 사회·역사와 맞짱 떴고 욕망의 심연을 궁구했다. 최근의 팬데믹 사태는 이제 모든 골방의 작가들을 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안전한 밀실은 없으므로, 이제 더 이상 분리된 공간은 없으므로, 인류는 다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사유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집단성이 광기와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밀실이 무책임한 도피가 되지 않으려면, ‘유쾌한 상대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공통체commonwealth를 건설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A. Negri는 이것을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이라고 부른다. 문학은 그 먼 옛날부터 이런 세상을 꿈꾸었다. 또 한 권의 책을 무슨 노아의 방주처럼 끌고 세상으로 나간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황홀하다. 글들이여, 거기 지옥에서 오래오래 소멸하라. 나는 이미 다른 글을 쓰고 있다. 2022년 11월 먹실골 우거에서 - 머리말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문학이론은 ‘문학에 대한 이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학의 콘텐츠가 인간과 세계의 ‘모든 것’이므로, ‘문학에 대한 이론’ 역시 ‘모든 것’들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이론이 문학을 넘어 영화 비평, 미디어 비평, 정치 비평, 대중문화 비평, 철학, 사상 등 사유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온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문학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유하는 효과를 동반한다. 매우 ‘비전문적’인 학생들이 내 강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배웠다고 고백할 때, 나는 이론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가장 큰 환희를 느꼈다. 이 책을 통해 문학 전공자는 전공자대로, 비전공자는 비전공자대로 세계를 읽는 다양한 시각들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세계는 간단하지 않으며 모든 이론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모든 이론은 오로지 ‘국부적(local)’ 정당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우리는 다양한 이론들의 각축장을 통과함으로써 세계를 읽는 유효한 ‘사유의 그물들’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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