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의
계보
책과 책 사이, 경계의 아카이브
오늘의 삶을 위해 과거와 미래의 책을 수집합니다.
'읽기의 계보'는 하나의 주제 또는 정서로 느슨하게 이어진 책들의 지도, 앎의 숲, 마음의 아카이브가 되어, 드넓은 책들의 세계를 항해하는 독자들의 친밀한 가이드가 되고자 합니다.
"아카이브는 빛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 같다. 그래도 한동안 숲속에 들어가 있으면,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숲의 생김새를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게 된다." -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읽기의 계보 / 2026 #02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
에세이, 고백록, 일기, 르포, 증언, 자전 소설에 이르기까지 '나'를 재료로 삼는 글쓰기는 모든 형식을 가로지르며 자신을 탐구하고 세계와 충돌합니다. 자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내면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시대를 함께 쓰는 일이기도 하기에, 결국 타인도 비추게 마련입니다.
이런 시도는 보통 진실을 추구하지만, 미처 진실에 닿지 못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누군가는 허구의 목소리 속에 숨고, 누군가는 의식하지 못한 채 삶을 작품에 투영합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남겨진 책들을 읽지만 무수히 많은 목소리들이 역사 속에 잔여로 남습니다. 말할 수 있는 주체, 기록될 가치가 있는 내면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자기 쓰기의 경계는 넓어져 왔습니다.
철학과 예술,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각자 내면의 목소리를 품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책은 일종의 자기 쓰기라 할 수도 있겠네요. 다만 이 자리에 세상 모든 책을 가져다 놓을 수는 없으니, 우선은 좁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쓴' 책들을 모아봤습니다.
키워드-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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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에 대해 5백만 단어에 달하는 글을 쓰면서, 막상 자기 이름은 밝히지 않을 수 있다. 성별도.일기에는 이름이 무엇이고 집이 어디인지 하는 당연한 신상을 적지 않는다.일기를 쓰는 사람은 그저 살아 있는 ‘나’일 뿐이다. 그러다가 죽고, 쓰레기장에 던져진다.
고백과 고해
뭐가 두려운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저의 하느님, 바닥을 모르시고 한계도 없으신 그 다면성! 바로 이것이 영혼이고 바로 이것이 저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하느님, 저란 대체 무엇입니까? 저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자연본성입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명, 어처구니없이 무량한 생명입니다.
서구 문화권에서 자기 서사의 가장 오래된 형식은 신 앞에서의 고해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고백은 죄를 열거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했습니다. 루소는 자기 자신을 탐구한 결과를 신이 아닌 독자에게 들려주려 했습니다. 신학적 전통에서 고백은 죄의 인정이었지만, 문학적 전통에서 고백은 자아의 발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백록의 전통은 서구의 자아 서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됩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습관은 마침내 내 불행에 대한 느낌과 그 기억까지도 거의 잊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우리 안에 있음을, 또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을 정말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일기, 기억, 회고
서양의 고백록 전통과는 무관하게 동아시아에도 자기를 쓰고자 하는 충동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비극적인 과거를 현재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해명하기 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헤이안 시대 일본의 궁중 여성들이 남긴 일기와 단상들은 서양의 근대적 자아보다 수백 년 앞서 자기 자신을 기록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이 근사하다. 반딧불이가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일기는 가장 사적인 형식처럼 보이지만, 쓰는 순간부터 이미 독자를 상정합니다. (그 독자가 자기 자신뿐일지라도!) 일기, 회고록, 자서전은 모두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경험을 항상 투명하게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선택되고, 강조되고, 왜곡됩니다.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내가 서술하고자 할 때, 두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생깁니다.
1919년 1월 20일, 월요일 앞으로 몇 주 동안은 하루에 한 시간을 글 쓰는 시간으로 정한다. 오늘 아침은 그 시간을 비축해 두었기 때문에 그 일부를 여기서 쓸 수가 있다. 레너드는 외출 중이며, 1월분 일기가 상당히 밀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기를 쓰는 것은 글을 쓴다는 부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고는 기분 내키는 대로 앞질러 달려 나가는 그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길가의 돌부리에 견딜 수 없게 차이면서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빠른 타자기보다 더 빨리 쓰지 않았다면, 또 쓰던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든지 했다면 이 글은 결코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의 장점은 만약에 내가 머뭇거렸다면 빼버렸을 사소한 것들을 우연하게도 건져 올렸다는 데에 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쓰레기 속의 다이아몬드인 것이다.
카프카는 1922년 3월 말 밀레나에게, 편지라는 것은 배송 도중에 흡혈귀 같은 유령들에게 다 빨아먹혀서 원래 수신자에게 절대 도착할 수 없기에, 자연스러운 인간의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편지를 써 보낸다.
편지, 서간문
나는 자네가 이 글의 마지막 장도 읽게 될지 알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 독특한 부분을, 비록 이것이 편지에 속하지는 않지만 갈겨쓴 거야.
편지는 타자를 향한 자기 서사의 형식입니다. 수신자가 있다는 사실이 편지를 다른 글쓰기와 구분되게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숨길지, 어떤 어조로 자신을 드러낼지... 편지 속의 화자는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고 변호하며 때로는 연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구성합니다. 서양 문학사에서 편지는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자기 형성의 공간이 됩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을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차분함을 느낀다. 위험의 한가운데에 안전이 있는 법이지. 우리에게 뭔가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편지광의 일기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는 17세의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41세 죽음에 이르기까지 편지 쓰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50명을 웃도는 수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620여 통의 편지들은 카프카의 교우 관계와 집필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편지들은 단순히 서신 교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 자신이 고민했던 글쓰기에 대한 논의와 실제 글 쓰는 연습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편지글의 대부분은 카프카의 평생에 걸친 문학적 동반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막스 브로트를 수신인으로 한다. 이 책은 1902년에 만나 카프카가 죽기 직전까지 20년간 지속했던 막스 브로트와의 소중한 우정을 증거하고 있다.
타오르는 희망과 절망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그가 생전에 지인들과 주고받은 900여 통의 편지 가운데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진실, 그리고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는 것들을 모아 시대순으로 엮은 책이다. 우리는 고흐의 편지에서 드디어 화가로서의 꿈을 찾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그가 마주한 기쁨과 괴로움이 무엇이었는지, 무엇보다 그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책에는 고흐와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동생 테오의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고흐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근대적 자아의 탄생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철학사뿐 아니라 자기 서사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의심하는 주체, 자기 자신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근대적 자아의 등장은, 자신에 대해 쓰는 일이 가능하고 또 의미 있는 행위라는 믿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쇄술의 보급과 시장의 형성, 사적 공간의 등장,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 형식의 발전까지. 여러 기술과 문화적 조건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개인의 이성과 내면을 바탕으로 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근대적 자아라는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
하지만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동일하게 허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성과 독립적 개인이라는 근대의 이상은 오랫동안 백인 남성 시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여성은 공적 주체의 자리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의 옹호>에 이러한 질서에 균열을 냈습니다. 이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이들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또 다른 근대적 주체가 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근대의 자기 서사는 배제되었던 존재들이 자기 자신을 말하려는 투쟁 속에서 조금씩 확장되어 왔습니다.
역사책에 그려진 과거와 오늘날의 현실을 살펴볼 때 내 가슴은 서글픈 분노로 무너질 듯했고, 남녀가 애초부터 전혀 다르게 태어났든지, 지금까지 세계 역사가 아주 불평등했든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갖가지 교육 이론서와 부모들의 자녀 양육법, 각급 학교의 운영 방식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이 비참한 현실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잘못된 여성 교육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고, 단 하나의 편견에서 비롯된 갖가지 원인 때문에 여성이 나약하고 가엾은 존재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모험하는 글.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글. 형식, 스타일, 표면적 짜임새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이로써(누군가는 “이로써”에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글. 감정의 차원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글. 이런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주장 또는 서사라는 물길들과 글자라는 섬들이 한데 모여 한 편의 작품 혹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다도해가 된다.
에세이라는 형식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그리고 (……) 홀로 있음의 아늑함으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내 생각들을 데려온다.
에세이는 '시도'입니다. 몽테뉴가 자신의 글에 붙인 이 이름(에세, essai)에는 이미 이 형식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 자체를 따라가는 글. 에세이는 자기 자신을 소재로 삼는 동시에, 그 소재를 통해 세계를 사유합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습관, 취향, 신체(그것도 아주 자세히...), 두려움에 대해 썼지만, 자기 자신에 머물지 않고 인간 일반에 대한 탐구가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이후 이 자유로운 형식을 선택해 왔고요.
책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알지 못하듯이,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삶이 없다. 나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그리고 그 매일의 매 순간에 삶의 현재에 의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사람들 각자가 '나의 삶'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전혀 모르겠다. 흩어진 나를 한데 모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다. 혹은 그 남자에 대한, 내 아이에 대한 사랑뿐이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라는 삶의 모델을 단 한 번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걸까?
에세이의 기원
에세
1571년 법관직을 사직한 뒤 몽테뉴 성으로 은퇴한 몽테뉴는 1592년 죽을 때까지 이십여 년간 107편의 짧고 긴 에세들을 집필했으며, 글쓰기를 시작한 지 칠 년째 되던 해에 그간에 쓴 글들을 묶어 ‘에세(Les Essais, 에세들)’라는 제목으로 초판을 출간하며 새로운 글쓰기 형식의 탄생을 알렸다. 에세(essai)는 ‘시험하다’, ‘경험하다’, ‘처음 해 보다’ 등을 뜻하는 동사 ‘에세이예(essayer)’에서 몽테뉴가 만들어 낸 명사로, 이 특별한 글쓰기 형식인 에세에서 영어로 통용되는 글쓰기 형식인 ‘에세이’가 탄생했다.
독서와 자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낯선 문장들 사이에서 독자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어떤 책과의 만남은 읽는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 역시 달라져 있죠. 자기 자신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읽는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기 서사의 역사는 독서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 이름은 책 속에서 나를 향해 스스로 걸어나왔다. 그 책은 내 상상과 사유의 결과물이며 나를 영원한 그 도시의 시민으로 기록한다. 나는 배에서 내려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의 섬으로 떠 있는 도시의 광장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나는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언어로, 몸으로 수행하는 글쓰기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책의 여백에 쓰는 글’을 뜻하는 마지네일리아(marginalia). 우리는 마지네일리아를 남기고 또 발견하면서 ‘여성적 읽기’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메리 셸리와 버지니아 울프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토니 모리슨, 테레사 학경 차, 다와다 요코, 찬쉐까지. 이들은 어떻게 여백을 쓰고 확장하는가? 어떻게 서로의 마지네일리아로 존재하는가?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등 을 쓴 작가이자 독립연구자 김지승은 기록되지 않은 말과 몸을 감지하고 드러내며, 경계를 넘는 여성적 읽기를 실천한다.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헤매는 사람에게 거리의 이름들이 마치 마른 잔가지들이 뚝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움푹 패인 산의 분지처럼 시내의 골목들이 그에게 하루의 시간 변화를 분명히 알려줄 정도가 되어야 도시를 헤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을 나는 늦게 배웠다.
여행, 이동, 장소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근대적 자아가 등장한 이후, 여행은 자기 발견의 형식으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낯선 장소는 일상의 습관과 태도를 흔들리게 하고, 낯섦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보게 됩니다. 여행기는 외부 세계의 기록인 동시에 내면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유롭게 세계를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유럽 남성 지식인의 여행과 피지배자의 이산은 같은 층위의 경험이 아닙니다. 정착과 이동, 추방과 망향 사이의 긴장은 떠돌며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글쓰기에 스며 있습니다.
우리 일행이 알타이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다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갈잔은 말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진지한 당부이다. 몇 년 전 우리는 고비 사막으로 갔었다. 그때 우리 일행 중 한 명인 여든 살 난 독일 여인이 갑자기 죽는 일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에게 드리는 진지한 당부이다. 유언이 될 수 있는 쪽지를 써라.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라. 이곳은 세계로부터 잊힌 땅이나 마찬가지인 알타이 산악 지대 깊숙한 곳이며, 그것이 언제 어디서 오게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예술에 대한 성찰
이탈리아 기행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으로 문명을 날리던 스물일곱의 청년 작가 괴테. 바이마르 공국의 고문관으로 10년을 일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괴테는 베로나와 비첸차에서 접한 고대 건축물에 매료되었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반해 두 주 이상 머무른다. '세계의 수도' 로마와 나폴리, 시칠리아를 경유한 후, 다시 로마로 돌아와 일 년을 더 체류했다. 괴테는 이 기간 동안 익명의 여행자로 지냈다. 쾌적한 유람이 아닌, 예술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목적 아래`홀로 경치를 즐기거나 사색, 그림 공부에 몰두한 것이다.
균열하는 주체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자아를 사유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19세기와 20세기의 사상가들은 그 믿음에 차례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내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든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이 던져준 충격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고, 니체는 통일된 자아라는 생각 자체를 의심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려 했죠. 근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은 이전처럼 단단하게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인식의 투명한 기록으로 남을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말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소곤거려야 했고, 억제해야 했고, 참아야 했고, 억눌러야 했고, 숨겨야 했던 것을 마침내 고함치며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 결과들이 광기의 순간을 닮았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힘없는 자들이 정치의 공식 무대 위에 올라가 본 적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할 말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리라.
자기신화의 철학적 선언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자서전적인 책이다. 생애 마지막 저작인 이 책을 통해 니체는 자신의 가족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런 자료는 니체의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하여 그때까지 자신이 발표해온 여러 책들을 하나씩 거론하면서, 책을 쓰던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집필 동기를 밝히는 한편, 각 저작이 출간되고 나서 사람들이 보여준 갖가지 반응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나는 오늘 내가 행해야 할 담론 안으로,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몇 년 동안, 내가 이곳에서 행해야 할 담론들 안으로, 마음 같아서는 슬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가고 싶다. 나는, 내가 말(parole)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말에 감싸여, 모든 가능한 시작 너머로 옮겨지기를 바랐다. 나는, 내가 말을 하는 그 순간, 이름 없는 어떤 목소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앞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으면 좋겠다.
저자란 무엇인가
나는 나의 저 옛 조각을 지치도록 찾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나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다(기념물처럼).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를 묘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텍스트 하나를 쓴다. 그리고 그것을 R. B.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바르트의 선언은 문학을 바라보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놓았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저자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생산됩니다. 바르트에게 저자는 텍스트의 기원이 아니라 하나의 효과였습니다.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다른 방향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텍스트를 묶고 분류하며 특정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푸코가 '저자 기능'이라 부른 이것은 개인의 창조적 의도가 아니라, 특정 시대의 제도와 권력 관계가 만들어낸 효과입니다. 누구의 말이 저자의 말로 인정받는지, 어떤 텍스트가 권위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 유통되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 어둡고 습한 새벽에 건조하게 메아리치는 타자기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물체이기를 원했다. 나는 하나의 물체다. 피로 더럽혀진 물체. 그 물체는 다른 물체들을 창조하며 타자기는 우리 모두를 창조한다. 그것은 요구한다. 그 메커니즘은 내 삶을 요구하고 또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복종하진 않는다: 내가 물체가 되어야만 한다면 소리치는 물체가 되게 하라. 내 안에는 아픈 것이 있다. 아, 그것은 얼마나 아픈지, 도와달라고 얼마나 소리치는지. 하지만 나라는 타자기에서는 눈물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운명 없는 물체다. 나라는 물체는 누구의 손안에 있는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내 운명이다. 나를 구해 주는 건 소리침이다. 나는 생각-느낌 너머의 너머에 있는 물체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나는 긴급한 물체다.
'저자'를 떠나 '텍스트'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이 책에서 놀라운 실험을 시도한다. 자신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마치 남을 관찰하듯 ‘R.B.(롤랑 바르트)’, 혹은 ‘그’라고 3인칭으로 지칭하며 짧은 단편들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조각조각 그려낸다. 보통 자서전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일관된 자아상을 제시하고 선형적 서술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글쓰기 규칙을 깨뜨렸고 작가와 작품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새로운 형태의 자서전으로 기록되었다.
해체, 불안, 침묵
어떤 글쓰기는 자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해체합니다. 쓰면 쓸수록 자신이 누구인지 더 모르게 되는 경험. 언어가 자아를 포획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는 감각.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드러나는 심연. 카프카의 일기, 베케트의 작품들, 블랑쇼의 산문과 같은 것들은 자아를 확인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자아의 불가능성을 탐구하는 글쓰기입니다.
나는 이전이고, 거의이고, 전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신에 대한 사랑을 그치면서 얻게 되었다.
말하지 않음. 쓰지 않음. 쓰다가 멈춤. 이러한 침묵들은 자기 서사의 주변에서 그 중심을 위협합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잔여들의 역사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너는 꼼짝하지 않는다. 너는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 너를 그대로 빼다 박은 사람, 섬세하고 유령 같은 분신 하나가, 어쩌면, 너를 대신해서, 네가 더이상 취하지 않는 동작들을, 하나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씻고, 면도를 하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너는 그가 계단을 뛰어내려가도록, 거리에서 달음질치도록, 달리는 버스를 재빨리 잡아타도록, 숨을 헐떡거리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시험장에 도착하도록 내버려둔다. 일반사회학 고등교육 자격증. 제일차 필기시험.
이 글을 쓰는 게 허튼짓인지 당연히 우려했지. 뭔가 쓰려는 건 그걸 붙들고 싶기 때문이거든. 경험에 대해 쓰는 이유의 절반은 그 일의 의미를 알기 위해, 절반은 그 일을 시간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지. 망각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늘 반대 현상이 생길 위험이 있지. 경험 자체의 기억을 경험을 쓴 기억에 뺏기는 거야. 여행지에 대한 기억이 사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에 대한 기억이듯이. 결국 글과 사진은 과거를 간직하기보단 과거를 망치지. 그러니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어. 잃은 사람에 대해 글을 써서 - 혹은 그에 대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 그를 영원히 묻는 걸지도.
타자, 우정, 관계
비애는 다르다. 비애는 거리가 없다. 비애는 파도처럼, 발작처럼 닥쳐오고 급작스러운 불안을 일으켜, 무릎에 힘을 빼고 눈앞을 보이지 않게 하며, 일상을 까맣게 지워버린다. 가까운 사람을 잃음으로써 비애를 겪은 사람은 거의 모두가 이런 ‘파도’ 현상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서사의 많은 글들은 언제나 누군가와의 관계를 중심에 둡니다. 사랑하는 사람, 친구, 스승, 때로는 적까지. 타인은 자신을 비춰보게 만드는 거울이자 내가 누구인지를 새삼 의식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 결국 타인에 대해 쓰는 것이듯이) 타인에 대해 쓴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관계에 대한 글쓰기는 온갖 감정을 거쳐 나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이 됩니다.
아마도 우리는 끝내,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온전히 선택하지 못할 터다. 우리의 전기는 대개 시간과 공간의 질서 속에 미리 마련된 자리들을 차례로 점유해가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여러 틀이 우리에게 부과되고, 여러 역할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사로잡으며 우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앞으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결정하는 만남들이 우리 운명을 빚어낸다.
사회, 르포, 증언
자기 쓰기는 내면의 탐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글쓰기는 자신의 신체와 경험을 세계를 보는 창으로 삼습니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 가족 안에서 일어난 어떤 특정한 일이 아니라, 침묵이 어떻게 내 일상의 짜임을 규정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 어머니가 말없이 저녁을 먹는 가족들 속에서 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는지 완전히 살을 붙여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어. 시간이 갈수록 나는 어디나 이런 식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나의 호기심은 쌓이고 쌓이다 그 자체로 역동성을 가지고 굴러가게 돼. 우리 가족의 비정상성은 거의 감지되지도 않던 침묵에 있었어. 때때로 우리 집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다가 종내는 배경으로 자리를 잡은 그 침묵.
르포르타주, 현장 보고, 증언과 같은 형식들은 자아를 출발점으로 하지만, 그 자아를 통해 사회적 현실을 가시화합니다. 그것은 때로 역사의 기록이 되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언제나 같은 오르락내리락. 내 모든 글쓰기가 나를 강제 수용소로 인도하리라는 공포.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기분, 내 삶의 과업, 나의 직무, 나의 사명. 헛되고 헛되다는 기분, 내 휘갈긴 글씨가 무의미하다는 기분. 하지만 결국에 나는 글쓰기를 계속한다.
우리에 대한 대량학살은 오직 광고 시간에만 멈춘다. 판사들은 대량학살을 합법화한다. 통신원들은 수동태로 우리를 죽인다. 운이 좋으면 외교관들이 우리의 죽음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범인을 비판하기는커녕 절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관성적이거나 무능하거나 공모자인 정치인들은 우리의 종말에 돈을 댄다. 동정하는 척이라도 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다. 학자들은 관망한다. 풍진이 가라앉고 나면 그제야,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에 관한 책을 쓸 것이다. 용어니 뭐니를 만들고. 과거형으로 강연을 하고. 심지어는 우리 중에도 있을 독수리들이 박물관을 돌며 정작 당시에는 비난했던 것, 구태여 옹호해주지 않았던 것-우리의 저항-을 찬미할 것이다. 낭만화할 것이다. 신화화하고, 탈정치화하고, 상품화할 것이다. 우리의 살로 조각상을 만들어 세울 것이다.
계급, 출신, 노동
나를 포함한 시민 대중도 빈곤의 연결망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던 국가 통치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족 바깥의 삶에 대한 무심함을 내면화한 채 '쓸모없는' 생명의 축출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공조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는 권리가 특정 계급에게 더 많이 주어져 온 만큼, 그들의 내면 성찰은 인간 일반의 경험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자신의 계급과 출신을 전면에 드러내는 글쓰기, 노동 계급의 전복적 자기 쓰기는 ‘보편적’으로 가정되는 삶의 양태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환상을 깨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근데 너 배는 왜 타려는 거냐?"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돈 때문'이겠지만 분명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새로 도착한 선원은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건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구술, 아카이브
그러나 글을 직접 쓸 여건이 되지 않거나, 스스로 쓸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자기 서사로 남을 수 있을까요? 차별과 억압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을 문자 바깥에 남겨두었습니다. 구술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집에만 있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두려웠어요. 턱이나 계단, 버스, 시설 같은 물리적인 건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죠. 그런데 나와보니 시선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내 시선이 바뀌었거든요.
직접 기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기록될 가치가 있는 삶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전쟁, 재난, 빈부의 격차, 차별 등으로 소외된 존재들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는 좋은데, 오늘의 경험에서만 배울 수 있는 운명이군요.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노가다 인생이랄까?” 생각해 보면 우리 할아버지도 노가다 일을 했고, 그 딸이 우리 엄마니까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 나의 절실한 소원은 지금 오르고 있는 이 산이 이번에야말로 틀림없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딸이 내 전철을 밟지 않는 것. 참고로 이 티셔츠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이 파자마로 입고 잔다.
자신이자 타자로 존재하는 것. 이야기와 언어의 힘을 느끼는 것. 이 두 주제는 문학 전반에 걸쳐 서로 얽혀 있다. 이를테면 내러티브는 독자에게 어떤 면에서 자신의 타자와 동일시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타자는 물론 독자와 조금 다를 때도 있고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 부류인 경우도 있다. 작가 역시 작품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타자성과 씨름하는데, 적이나 낯선 이들이 제기한 문제부터 부모, 자식, 이웃, 친구, 연인과 관련된 친밀한 딜레마에 이르기까지 범주가 다양하다. 언어와 자아도 타자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자기 존재나 언어와의 관계에서 이런 타자성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인지도 모른다.
이주, 이산, 탈향
고정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그것을 보는 편이 불안정하게 움직일 때는 달리 보인다.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소수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 글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 한 시도다.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하는 이주와 이산의 경험은 자아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어떤 언어로 자신을 써야 하는지, 자신의 내면에 어떤 풍경이 담겨 있는지, 스스로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정확히, 때로는 자유롭게) 자신을 쓰고자 하는 이들의 분투가, 경계에서는 항상 벌어지고 있습니다.
프라이어를 보며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제도를 상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정체성, 젠더, 퀴어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거나,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에 대해 쓸 수 있을까요? 정상성의 범주에서 어긋나는 존재가 자기에 대해 쓰고자 할 때 자기 서사는 곧 저항이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삶을 언어로 써내는 시도. 때로 이러한 시도는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수행이자 과정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나는 이방인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우리는 이방인을 그렇게 여기도록 배운다), 우리가 (이방인으로서)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방인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은 이곳 출신이나 이곳 소속이 아닌, '어울리지 않는 신체body out of place'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의심스럽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는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이방인이 되면 결국 방과 대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우리의 일부도, 우리와 같지도, 우리와 함께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제약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를 걸고 써야 하는 경험을 소수만 겪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어 왔는지, 혹은 어떻게 지워지고 누락되어 왔는지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계로서의 언어, 규약으로서의 언어, 훈육으로서의 언어는 언어의 성 안으로 들어가고자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자미
《자미》는 우리 시대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자 목소리인 오드리 로드의 자전신화로, 이 기념비적인 인물이 우리가 익히 아는 모습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인도제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시인 오드리 로드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우르는 자기 정체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뜻하는 ‘자전신화(biomythography)’라는 새로운 장르의 글에서, ‘자미’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자신에게 흔적을 남겼던 수많은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다. 소리의 내면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는 궤적은 공적이다. 외부로 투영된 한 조각의 내부, 그러한 투영의 검열은 (우리가 살펴봤듯이)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가부장적 문화의 과업인데, 그 부류란 이런 것이다. 스스로를 검열할 수 있는 인간과 그럴 수 없는 인간.
몸, 질병, 장애
1974년, 크립턴Cripton 행성에서 온 한 아기가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교외에 당도했다. 여자 아기였고 중국계 이민자인 엄마 웡씨와 아빠 웡씨 부부의 소생처럼 보였다. …… 지구 중력의 힘 때문에 아기는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그래서 네 발로 길 수 없었던 아기는 앉아 있는 단계에서 [기는 단계 없이] 걷는 단계로 직행했다. 어리둥절해진 엄마 웡씨와 아빠 웡씨는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아기가 크립턴 행성에서 온 뮤턴트mutant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체는 오랫동안 정신과 내면을 담는 배경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몸이 아프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 상황은 달라집니다. 통증과 피로의 감각, 차별의 경험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변형시킵니다. 질병과 장애, 퀴어한 몸에 대한 기록에서 몸은 세계와 충돌하는 가장 직접적인 장소가 됩니다.
나 말고 이 병을 앓는 다른 사람이 썼다면 더 괜찮은 책이 탄생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못을 박는 일에 대해 연신 불평만 늘어놓는 망치의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나? 어떤 물건이든 저마다 존재 이유를 갖고 있는 법이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암 환자에 관해 쓴 책이 하나둘 내 우편함에 도착할 때면 하여간 그렇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하나같이 좋디좋은 의도로 쓰인 그 책들은 한결같이 대머리로 죽어 가는 여자들, 즉 자매나 아내나 장모에 대해 말하는데, 그중 어떤 여자도 자기만의 목소리라든가 남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오토픽션
‘오토픽션’은 자서전도 소설도 아닙니다. 혹은 자선이면서 동시에 소설입니다.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하되 허구의 방식을 차용하는 이 글쓰기는, 자기 서사와 픽션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게 합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는 것과 실제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쓰는 사이에서, 오토픽션은 종종 후자를 선택합니다.
내가 쓰지 않으면 사건들은 그 끝을 보지 못한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
완전한 기억을 쓰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완전한 허구를 쓰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이 계산법이라면 완전한 에세이도 완전한 소설도 가능하지 않을 수 있겠죠. 이 흐릿한 경계에서 우리가 낚아낼 수 있는 진실이란 어떤 농도의 진실일까요?
책이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네요, 샘. 대학살에 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두가 죽었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원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도 늘 그렇습니다. 새만 빼면. 그런데 새는 뭐라고 할까요? 대학살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지지배배뱃?' 같은 것뿐입니다.
원한다면 이 글쓰기 스타일의 첫 번째 층위를 오토픽션이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글쓰기 안에 있다. 안녕, 나예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실 근처에서 춤추는 허구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나다.
원한다면 두 번째 층위를 자기이론이라고 불러도 좋다. 자기이론은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추출하기보다 개념을 더 많이 그러모아야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여기서 상황은 레이브다.
레이브란 무엇과 같은가? 사우나 안의 착암기. 레이브하기. 방랑하기. 백일몽에 잠기기. 레이브라 불리는 것에는 기대되는 바가 있다. 긴 시간 이어지리라는 것. 화학적 도움이 조금 필요할 수도 있다. 사교, 플러팅, 혹은 레이브 섹스가 동반되기도 하겠으나 무엇보다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춤추러 왔다.
자기이론
"자기 이론"은 직접적이고 자기-인식적인 방식으로 이론 및 철학과 자서전을 통합하려는 문학, 글쓰기, 비평의 작업을 기술하기 위해 21세기 초입부에 등장한 용어이다. "각주가 달린 회고록"이 하나의 사례일 듯하다. 이 용어는 아주 단순하게는 자서전과 이론 및 철학의 통합, 신체, 그리고 이른바 개인적이고 명시적으로 주관적인 다른 양태들을 가리킨다. 또한 오늘날 문화 생산의 시대정신 내에 존재하는 어떤 것, 특히 예술과 학계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페미니스트, 퀴어, BIPOC(흑인, 선주민, 유색인)의 공간들에서, 체험과 주관적인 신체화와 나란히 이론-담론, 프레임 혹은 사유와 실천의 양태로서의-에 관여하려는 자의식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오토픽션이 사실과 허구의 혼합이라면, ‘자기이론(autothéorie)’은 이론과 자기 서사의 혼합입니다. 개인적 경험을 이론적 사유의 재료로 삼고, 이를 통해 도출된 이론적 언어를 자기 이해의 도구로 사용하는 글쓰기. 자기이론은 이론이 누구의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론은 오랫동안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보편성 자체가 특정한 신체와 권력을 지닌 이들의 경험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면? 로런 포니에는 퀴어/젠더 이론과 신체 철학을 자신의 삶과 직접 교차시킨 매기 넬슨, 폴 B. 프레시아도 같은 작가들을 통해 이 질문을 탐구합니다.
스스로를 진짜 편에 세우고 다른 사람들은 근사치나 흉내에 불과한 놀이를 하고 있다고 암시하며 얻는 쾌감이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기만이 진짜라는 완고한 주장은, 특히나 이 주장이 하나의 정체성에 매여 있는 경우에는, 착란에도 한 발 담그고 있기 마련이다.
미디어, 기술, 이후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기술적 조건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펜과 종이,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인터넷 도구는 글쓰기의 형식과 리듬을 바꾸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자기 서사의 종류를 바꾸기도 합니다. 블로그와 SNS, 유튜브의 브이로그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환경은 자기 서사를 보다 대중화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사람뿐 아니라 말하고 보여줄 수 있는 모두가 자신을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나 플랫폼은 중립적이지 않고, 알고리즘은 자기 서사의 유통을 측정하며, 자기 표현을 자기 상품화로 변경시킵니다. AI를 통한 생각의 외주까지 가능해진 지금, 자기 자신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요?
단 한 가지 카프카가 타자기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저자성이라는 허깨비를 피하는 법이었다. 이미 첫번째 사랑편지에서 “나,” “나라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삭제 표시 아래로 사라졌고, 『소송』의 요제프 K, 『성』의 K 한 글자만 남을 때까지 축약되었다. 낮 시간에 그의 사무실 타자기가 문학에 매달리던 밤의 카프카를 모든 대리권, 다시 말해 서명권으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이다.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기계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언어는 지금까지 인간만이 유일무이하게 소유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AI 기술이 진화하면서 기계가 사람처럼 글을 쓰고 말을 거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들은 지금 우리 시대가 마주한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거대언어모델(LLM) AI와 지능, 언어, 소통, 저자성, 글쓰기의 쟁점들을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고대 철학자부터 데카르트, 하이데거, 데리다, 바르트, 비트겐슈타인, 푸코, 플루서 등 근현대 사상가들에 이르는 언어학과 언어철학, 문학연구,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통해 탐구했다.
너의 삶은 하나의 가설이다. 늙어서 죽는 사람들은 과거의 집합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를 생각할 때는, 네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따라온다. 너는 가능성의 집합체였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