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고 말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우리가 사랑한 책
창간 5주년이 넘은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은 “혼자 걷고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을 위한 한 달치 큐레이션”을표방하며 주제별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아 월간 발행하는 종합 오디오매거진이다.
그중 ‘책 읽는 의자’는 책장을 훔쳐보고 싶은 각계의 명사들을 초대해 그들이 사랑하는 책을
신중하게 골라 진행자인 김혜리 기자와 함께 읽고 대담을 나누는 코너다.
책에 관한 대화는 뜻밖에도 ‘나’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우리’로 맺어지는 세계에 관한 탐구로 나아간다.
이 눈부신 이야기가 그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우리가 사랑한 책>으로 단단히 붙들어 엮었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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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안에 갇혀 있어요. 여하튼 안에 있으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갇혀 있으니 그건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니까 이런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상태,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그게 희망의 본질이라는 거예요. 보기 나름이다, 긍정적으로 보자, 이런 얘기와는 좀 달라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희망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죠? 누군가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행동을 할 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희망을 느끼게 되잖아요. - 51쪽, 신형철 문학평론가 -
내가 어떤 경험을 전하는 입장에 있을 때 판단하지 않고 ‘저 사태는 저 사람에게 어떤 별자리에 가서 붙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존 버거가 말년에 자주 사용한 ‘지평’horizon이라는 단어도 이 맥락에서 별자리하고 같은 의미인 것 같아요. 지평 안에 있는 어떤 대상은 그 지평 안에 있는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안에서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지평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요. - 93쪽, 김현우 다큐멘터리 PD · 번역가 -
이별이라는 감정에 굉장히 취약한 사람 같아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소설에 구차한 캐릭터는 나오지도 않아요. 이별을 겪어도 잘 살아가죠.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이별의 형태를 보면서 가끔 울 때가 있어요. 실제로 제가 겪어본 감정이 속에서 막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요. 이별의 순간에 인물이 생각하는 것, 혹은 이별의 대상과 이야기할 때, 심지어 문장으로 적혀 있는 정적의 순간이나 리듬이, 이건 진짜 같다. 헤어졌을 때의 공기와 그때의 비참함 같은 것. 결과를 알고 있는 그 며칠, 몇 시간의 감정이 확 올라와서 힘들 때가 있어요. - 125쪽, 박정민 배우 -
어린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작은 사람이고, 이들의 호기심을 계속 북돋워주는 방향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죠. 예술가가 ‘예술은 결국 어린이에게로 흘러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힘주어 하는 책을 저는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책에서 ‘예술’이라는 개념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규명해보려는 시도도 좋았어요. - 151쪽, 이수지 그림책 작가 -
감염인을 위한 공적 안전망의 설치를 요구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그런 안전망 바깥에서 서로를 돌보며 친밀성을 경험하는 일에 관심 갖는 것도 이 책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퀴어한 친족’ ‘퀴어한 책임감’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조차 거부당했을 때, 과연 그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는 존재는 누구일까. 그건 바로 ‘퀴어한 친족’이라고 부를 만한 동료 감염인이자 간병인이죠. - 200쪽, 오혜진 문학평론가 -
의사들도 ‘나는 어떤 의사가 되어야지’를 각기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상상적 자원과 경험이 부족해요. 그러다 보니 환자와 대화하는 방식도 매우 획일적이에요. 무엇보다 환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의사에게 너무나 중요하죠. 치료의 효과성 측면뿐만 아니라 과다한 검진과 치료를 하지 않게 해서 사회 전체에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의사뿐만 아니라 환자로서 우리도 ‘의사와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 246쪽, 서보경 인류학자 -
해본 적 없는 경험에 대해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도 생각하고요. 아파보기 전에는 이 감정, 이 상태에 대해서 표현할 몸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거죠. 언어가 있는 만큼 해석할 수 있잖아요. 저는 오늘 소개한 책들이 질병의 언어를 넓히는 사전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내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 다른 사람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는 부분도 있고요.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개별적인 경험인데, 개별 경험으로만 남겨두지 않은 점이 이런 책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 279~280쪽, 장일호 기자 -
흔히 자연주의적인 오류라고 하는데요. 자연 상태에서 동물의 속성을 두고 인간이 배워야 한다거나 동물의 본질이니 응당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뭔가 잘못됐죠. (…) 특정한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인간에게 대입하거나 논리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물들이 인간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 303쪽, 이원영 동물행동학자
작가 소개

김혜리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20세기부터 했다. 라디오에서 영화 소개를 한 인연을 계기로 2016년부터 영화 전문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을 최다은 PD, 임수정 배우와 함께 만들며 성격이 한결 밝아졌다. 글이 아닌 말로 하는 일에 친근해지면서, 2021년 2월부터 “혼자 걷고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을 위한 한 달치 큐레이션”을 표방하는 종합 오디오매거진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을 서울 홍익대 부근 지하 스튜디오에서 매달 만들고 있다. 영화 주위만 공전하며 살다가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로 인해 다른 태양계의 사람들과 조우하고, 재회를 바라던 사람들과 다시 마주 앉게 된 행운에 감사하고 있다. 소리 없이 북적이는 지금의 생활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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