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나 시인 사진

김보나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

미친 봄날 생각 中
『나의 모험 만화』 수록

1991년 출생. 2022년 『문화일보』 등단. 시집 『나의 모험 만화』.

모험가 여러분, 안녕하세요. 올해는 어떤 모험을 떠날 예정 인가요? 여기, 멋진 보라색 물약을 하나 드릴게요. 당신의 여정에 극복 가능한 시련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김보나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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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시인

대표작: 온,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김보나의 화자들은 피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아서 만나게 된 것과 마음에 담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모욕과 조롱도, 슬픔과 고통도 달콤한 사탕처럼 입안에 굴릴 수 있는 것이 된다. 알사탕 같기도 하고, 팝핑 캔디 같기도 하다. 둥글게 입안 가득 퍼지는 맛. 그 각양각색의 맛을 언어로 보여준다.
김보나의 화자들은 유쾌한 용감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시간을 통과하며 얻게 된 것 같다. 다만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서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사람이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그래서 김보나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내게도 재미있는 용기가 생길 것만 같다. 슬픔을 아는 농담은 트램펄린처럼 우리를 높은 곳으로 튀어 올라 전혀 다른 곳을 볼 수 있게 하니까.

김보나의 시

「미친 봄날 생각」

안녕 나
갑상샘에 암이 생겨서
방사선 약을 먹은 뒤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어
팝핑캔디를 삼킨 때처럼
몸 안이 반짝거리더니
괴수로 변해버렸다?
이것 봐
광화문 사거리에
송전탑처럼 씩씩하게 서 있어
사람들이 가는 면발처럼 쏟아져 달려가는
정오의 사거리에서
텔레파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중이야
기억해?
전학 간 너의 긴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나를
너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나를
명동성당 뒤편에 딸린 여고에서
너는 만화부였고
나는 클래식 기타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단 거
복도를 지나다니는 수녀님들에게도
가로막히지 않았던 너의 마음
십자가 형태의 길에서 성호를 긋지
어른이 된 네가 여기 있다면
너를 납치해 걸어갈 텐데
기자들과 카메라가 화동처럼 뒤따르는 행진이야
스물셋에 처음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처럼
일생에 단 한 번
잊을 수 없는 고백을 듣고 싶었지만
나는 늘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자랐어
환자복을 입은 다음부턴
미안한 사람들을 병상에 모아 놓고
안녕 나 암이래
말하고 싶었어
사람 아니게 되어
모든 빚을 탕감받고 싶었어
성당에 못 들어간다면
사각사각
창밖에서라도 미사를 구경하고 싶네
고딕 첨탑에 기대 낮잠 자고 싶네
하다못해 절 마당을 비로 쓸면서
발등부터 목덜미까지
누군가 필사한 경전의 글자로 뒤덮이고 싶네
마취총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처럼 몸이 불어나도
용감하게 걸었다는 기억을 갖고 싶어
작년에 꽃구경을 한 벚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기다릴게
만날 수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