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이인
활활 타오르던 날에는 진심으로 바스라져 눕고 싶었다 조금 덜 살고 싶었고 작디작고 자유로운 입자로 남고 싶었고 낙서가 되고 싶었지 낙서당하는 지저분한 벽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벽난로가(家)의 번영 中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수록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등이 있다.
추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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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시인
대표작: 비신비, 도움받는 기분 등
신이인의 시를 읽으면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화자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외계인이며 영원한 비성년이다. 그는 말한다. “못돼처먹은을 사랑해”(시 <꿈동산> 중에서)달라고 여기서 “못돼처먹은”(같은 시)은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자 이방인이다. 이렇게 세계와 이격감을 느끼는 존재의 순간들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다르다는 이유로 겪은 모욕감을 나는 돌려주지 못한다. “모욕감은 너무, 너무 나쁜 기분이니까/ 돌려줄 수조차 없다”(시 <성숙>에서)고 말하는 화자는 약하지 않다.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나는 끝내/ 이것과 함께 묻히겠지”(같은 시)라고 말하면서도 그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힘을 시 속 화자들은 가지고 있다. 신이인의 시를 읽으면 누군가 다가와 나의 과거를 대신 발음해주는 것만 같다. 꾸밈없이 깨끗한 얼굴로 당당하게 바람에 맞서며 “못돼처먹은 시”(시 <꿈동산>중에서)를 발설하는 그 주문 속에 독자는 저항 없이 빠져들고 만다. 자기도 모르게 스며드는 것. 그것이 시가 가진 힘이 아닐까? 가만히다가와 우리의 어깨를 쥐고 “당신, 슬픈 사람이네”(시 <부적>중에서) 하고 툭 발설해버리는 심상함으로. 그러나 끝까지 목격한 것을 쓰고 말 거라는 강한 의지로. 자꾸만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신이인의 시가 가진 슬픔을 가까스로 외계인이라 불러보는 마음. 그 마음이 여기에 있다.
변윤제 시인
대표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반국가세력 등
신이인의 시는 슬프고 강력하다. 그는 ‘의자를 삼키고’, ‘표본으로 박제’가 되고, ‘아무래도 부끄러운 마음’에 골몰하다가, 결국 ‘쓸모를 획득’한다. 신이인의 시는 내가 나를 파헤치고, 불러세우고, 내치고, 뒤돌아본 뒤, 결국 마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나와 나와 나들을 모조리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곳에 있다. 시 속의 나는 이전의 나와 동일인이 아니며, 이후의 나, 심지의 지금의 나와도 동일인이 아니다. 그저 계속되고, 연속된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의 일원이자, “외계인이 될지도 모”를 어떤 가능성일 뿐. 신이인은 ‘아/이상해’ 와 같은 한 마디 툭툭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일어서고, 점프하고, 마침내 떨쳐오르는 힘. 그것을 시적 태도라 할 수도 있고, 시적 도약이라 부를 수도 있고, 궁극적인 시적 구조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난 신이인의 시가 그저 ‘따뜻하’고 ‘좋다’. 그는 스스로 그걸 ‘무기’라 자부하고 있으니. 신이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안쪽’ 그 깊숙한 곳을 향해 나도 그의 말투를 빌려 힘껏 응원하고 싶다. 그의 모든 ‘모멸이’가 아, 좋다고.
서효인 시인
대표작: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여수 등
드레이크 방정식에 의하면 우리가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만날 확률은 현저하지만 그렇다고 0인 것은 아니다. 그 수식은 다음과 같다. ……적지 않겠다. 수식을 한창 들여다봐도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변수와 무한에 수렴하는 확률을 지닌 듯한 방정식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그게 무슨 말인지 똑바로 알 수는 없어도 그러하였다. 미지의 독자에게 특정한 한국시가 마찬가지였을까?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알 것 같아서 더 신비한 게 아닐까? 내게는 신이인의 시가 특히 그랬다. 외계인을 만난 듯 낯설었지만, 너와 내가 극악한 확률을 뚫고 지금 여기서 만난 것이라 생각하니 반갑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드레이크 방정식은 우리에게 외계인을 만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말한다. 아니, 무지하게 어려운 일이라 알려준다. 시를 쓰는 우리는 그래서 보다 편한 방식을 찾는가 보다. ‘외계인 찾기’가 아니라 ‘외계인 되기’가 그것이다. 외계인이 되려면 우선 인간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신이인은 첫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에서 그는 스스로 비인간이 된다. 너구리도 괜찮고 바퀴벌레도 괜찮다. 차라리 최대한 이상해지는 게 좋다. 인간만 아니면 우리는 무엇이든 되긴 되니까.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만 아니라면 우리는 별의별 게 다 될 수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될 건데? 묻는다면 단연 외계인이다.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에서 신이인은 비로소 만난 외계인에게 인간의 언어를 이렇게 소개하는 듯하다. “못돼처먹은 시인, 못돼처먹은 시, 못돼처먹은 신” 시의 엉뚱함은 때로 건방짐으로 평가받고, 시의 태생적 난해함은 때로 이기적인 폐쇄성으로 치부되었다. 그리하여 못돼처먹은 것이 되어버렸는데, 나 또한 내가 너무 못돼처먹은 게 아닌가 걱정이었는데…… 신이인의 손을 잡으면 이렇게 외칠 수도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외계인인데? 아, 속 시원하다. 신이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저 회사원이거나 고시생이거나 주부거나 노인이거나 장애인이거나 곱슬머리거나 퀴어거나 암튼 그게 뭐거나, 외계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뭐 어쩌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이 참으로 시원하다. 마치 방정식의 답을 찾은 모범생처럼. 마치 3번으로 모두 찍어버린 탕아처럼. 우리는 둘 사이에 있고, 둘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그리고 외계인이니까.
신진용 시인
대표작: 없어질 행성에서 씁니다
신이인의 시를 뭐라고 축약할 수 있을까. “못돼처먹은” 시? 못돼처먹었음에도/못돼처먹었기에 씩씩한, 재밌는, 슬픈, 사랑스러운 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리지 않았을 뿐인 듯하다. 그러니 축약 같은 건 그만두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부디 신이인의 시를 “아주 잠깐씩만”이라도 “끌어안고 보내”길 반복해보라고. 반복하다보면 당신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부르며 (...) 숲으로 들어가”길 택하는, 그 선택이 “무섭지 않다”고 굳이 덧붙임으로써 무서움을 고백하는, 결국 “숲 바깥으로 달아나버렸”음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 ‘신이인식 사랑법’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인지 말이다.
“같잖은 지구식 다정”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하고 싶다. “부딪치고 기를 쓰고 아파하”며 사랑하는, 천진하고 ‘못돼처먹은’ 어느 외계인을 계속 응원하겠노라고. 그리고 언제가 되든 지구 밖 우주정류장에 홀로 앉아 있는 그 외계인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전하겠노라고. 나, 신이인의 시를 읽었어. 그래서 “못돼처먹은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그가 내 말을 듣고 ‘그랬구나. 여기 앉을래?’하고 묻는다면, 나는 흔쾌히 그의 옆에 앉을 것이고 또 기다릴 것이다. 그가 기다리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함께.
양안다 시인
대표작: 숲의 소실점을 향해,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등
이것은 ‘솔직하기 위해 노력한’ 시집이 아니라 ‘솔직할 수밖에 없는’ 시집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에 신이인 시인은 ‘솔직함’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은 착각에 가깝고, 진심을 전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착각을 즐기거나 감내하는 일인 걸까요? 때로 신이인 시인은 솔직하게 말하다가 머뭇거리곤 하지만, 끝내 쏟아내는 편을 선택합니다. 그저 시인이 바라본 세계가 쏟아지고 있을 뿐이며, 시인은 자신 앞에 당도한 풍경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을 읽다 보면 관찰하고, 사유하고, 체험하며, 혼자 길을 잃었다가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정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을 지나게 됩니다. 모두 시인이 겪은 것을 솔직하게 옮겨놓은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솔직함’이라는 것은 외계인의 기질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가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하니까요.
신이인의 시
벽난로가(家)의 번영
제 성은 벽난로입니다 소개하면 자랑을 즐기는 사람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자랑 될 것도 아님을 알기에 그냥 쓴다
“불은 뜨뜻하고, 조금은 아쉽고,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지저분해지는 것…… 그러나 명백히 주는 것”
부모는 아쉬움을 모르도록 장작을 넣고 또 넣어 자신들이 건설한 자신들만의 벽난로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태어날 자녀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이름에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었다
“불은 아프고, 따갑고, 무서운 것…… 명백히 다 죽여버리는 것”
완고한 잿더미씨는 내 첫 연인이었다 잿더미씨의 이해를 고치려 드는 누구든 잿더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잿더미와 잿더미의 가족들은 입 모아 말했다 그러나 잿더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날 원했다
무례한 벽난로, 재수없는 벽난로, 더러운 벽난로, 멍청한 벽난로, 죽지 않는 벽난로, 망하지 않는 벽난로
흰 손가락을 짓이겨
보이지 않는 곳에 낙서
이후 나는 맹렬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몸에 넣었고 개중에는 놋쇠 그릇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오래 남았던 단단한 자식들도 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녹여 없애거나 내쫓거나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그건 내가 잿더미를 원한다는 뜻인지도 몰라 불우한 기분을 유발했다 무례한 벽난로, 재수없는 벽난로, 한번 잿더미를 만들고 나면 같은 말이 돌아왔으며 불길은 어떻게든 가라앉았다 역시, 불은 그런 것일까?
나는 벽난로인데, 아프지 않고 따갑지 않고 무섭지 않은데, 불 때문에 죽어본 적 없는데, 불과 멀어질 수도 없는데
활활 타오르던 날에는 진심으로 바스라져 눕고 싶었다 조금 덜 살고 싶었고 작디작고 자유로운 입자로 남고 싶었고 낙서가 되고 싶었지 낙서당하는 지저분한 벽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을 익히고 시원하게 욕하거나 원하면서 가벼워지고 싶었다……
제 성은 벽난로입니다 소개할 때 그것 봐, 너도 벽난로지? 너는 어쩔 수 없는 벽난로라니까? 벽난로들은 꿰뚫어보았다는 듯이 웃으며 모여들었다 자신들의 중심에 난 커다란 구멍―무엇이든 던져 넣을 수 있고 훤히 들여다보이는―에만 집착하는 이들이었다 구멍을 맞대는 방식으로 구멍을 감추려는, 구멍이라고는 안 보이는 멋진 삶을 도모하는 이들이었다
나는 벽난로와 가족을 이뤄 뜨뜻하고 아쉽고 누구도 잿더미로 만들지 않는, 벽과 벽을 마주대고 선, 누구도 누구 안으로 들어가볼 수 없는 여생을 살았다
꿈의 고백
친언니가 피자를 사와서 내게 한 조각 먹이고 말했다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외계인이었는지도 몰라
담담히 피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는 맛 좋은 맛
그렇지만 오늘은 안 먹고 싶었던 맛
피자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악독한 선생이 가로수길에서 팔았고 내 최초의 사랑이 익선동에서 팔았던 맛 나는 피자를 처음 먹은 날에 기절할 듯이 놀라 뱉어버리고 집으로 뛰어가 일주일을 숨어서 당황과 분노에 두근거려야 했지 그러나 이제는 그들처럼 그 과거처럼 예삿일처럼 씹고 삼키고 넘겨버리네
흔하디흔한
갈기갈기 찢어진
죽은 동그라미
지구는 재미있구나 가족이 이종족일 수 있다니
외로워도 홀로 이종족인 편이 낫겠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해를
오해라는 이름의 가장 큰 이해를
우주로 쏘아올리는 얼렁뚱땅함이 우리의 같잖은 지구식 다정이라면
이해를 받고 또 받으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
한 번도 내 심장을 맞춘 적 없는 장난감 총알이 팔다리를 멍들게 하듯
이 동그라미는 살아 있구나 어설프게 우주에 붕 떠
과녁…… 죽은 동그라미로서 느끼듯
언니, 인생에 할 고민이 많은데 지금 그런 고민까지 더해야겠어? 생각하지 말고 피자나 먹어 나는 꼭 내가 피자를 사온 것처럼 생색을 냈다
드디어 우리 딸들도 대화란 걸 하는구나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 아빠가 모자를 벗으며 반가워했다 부모의 뒤통수에 솟은 더듬이들은 그날따라 모른 체하기 어려울 만큼 꿈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은 내 생애의 거의 유일하고 능숙한 요령이었다 유전적으로 타고났을 수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