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만 : 삶이 비범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쉽사리 그렇게 살 수 없기에 우리는 시에서만큼은 다른 숨을 쉬고 다른 눈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사는 것을 넘어서는 시를 만지거나 가져보려 한다. 그러니 애쓰는 촉감과 구상조차도 자신의 분신이 아니던가. 확신컨대 이 시인은 지금 사람이 사람의 편이 되게끔 속이는 희소한 마술을 벌이고 있다. 구상과 연출은 그의 것이지만 그 성취를 시인에게 눈빛을 빌려준 이들에게 도로 내 놓는다. 입체적인 시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발랄한 웃음이 일고 맑은 눈물이 솟고 아이들이 달려와 안기고 식구들이 밥상 위에 모이는 울다가도 웃는 저녁이 온다. 이렇게 은근하니 좋은 실감과 작품으로서 미더움이 밀려오는 연유는 무엇일까. 어떤 서사일지라도 뻔한 전개와 귀결에 이르지 않으려는 시인의 도도한 품새 때문일까, ‘도덕을 공중분해하며 피고 싶’은, ‘악취를 잃어버린 하루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 는 선생으로서 고해를 뱉을 때 내 목구멍도 같이 탔던 탓일까? ‘입체를 평면으로 바꾸는’ 얕은 인식을 경계하며 표리부동한 언어를 밀쳐내려는 시인의 쫄리지 않는 긴장이 떨림으로 전해져 온 탓일까? 그는 어느 편이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지만 어느 편임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폐지를 가득 싣고 달리는 노인을 나도 모르게 믿게 된 미신’이라고 말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일컬어 ‘한 점 부끄럼 없는 우상’ 이라 떠받드는. 한편의 눈빛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첫 친구는 뇌성마비 옆집 형이었고 혼자만 입학한 게 괴로워 도망쳐 달려온 일곱 살 이장근, ‘꾸물꾸물 대청마루로 기어와 내 몸속에 들어오던 뜨거운 눈동자’를 잊지 않는 그의 ‘바닥’을 알기에 우리는 ‘바닥을 모시는 자들의 단합’에 불가피하게 연루된다.